남코리아뉴스 | 통일애국열사 류종인 선생 민족통일장 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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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02 05:2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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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애국열사 류종인 선생 추도식’이 지난 28일 저녁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거행됐다. 공동장례위원장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조순덕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과 안병길 양심수후원회 회장이 대표 분향하고 있다.
[포토뉴스] 통일애국열사 류종인 선생 민족통일장 엄수
분단에 서린 한 풀고 영면하소서 류경완 담쟁이기자 news@minplus.or.kr
지난 28일 79세로 타계한 류종인 선생을 기리는 ‘통일애국열사 류종인 선생 민족통일장 추도식’이 29일 저녁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200여 추도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추도식에서는 공동장례위원장의 대표 분향과 애국의례, 약력보고와 각계 추도사가 이어졌고, 추도 노래와 춤에 이어 호상인사와 유족인사, 합동 헌화의 순으로 시종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 고인에 대한 묵상에 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추도객들.
▲ 추도식장에 걸린 선생의 약력.
[약력보고] 통일애국열사 류종인 선생 걸어오신 길
1938년 12월18일 경북 안동에서 부친 류기형, 모친 전재임 사이 5남매 중 둘째로 출생
1958년 단국대 야간부 수학과 입학
1960년 군 제대 후 농협 기업은행 근무
1966년 유신산업사(일본 주끼기계 수입대리점) 설립, 일본 출장 중 총련계 친척들의 연결로 부친 생존을 확인하고 편지 왕래 끝에 방북 결정
1970년 전쟁 때 헤어진 부친을 찾아 평양행, 황해도 은율에서 온 부친과 20년 만에 상봉
1971년 6월 중정에 연행되어 4개월에 걸친 혹독한 고문 조사 끝에 '일본거점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구속, 1심 사형 선고
1972년 20년형 확정, 대전교도소로 이감
1975년 대구교도소 이감, 6살 아래 동생과 헤어짐
1990년 20년 형기를 다 채우고 3.1절 특사로 출소, 이후 석재사와 창호지공장, 목재소 등지에서 노동
1990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활동
1995년 민가협 감사 역임
2001년 소개로 만난 유치자 님과 새 가정을 이룸
2016년 오랜 옥고의 후유증과 많은 병마와 투병해오시던 도중 7월 25일 갑작스런 뇌출혈로 한양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 치료하였으나 7월 27일(수) 오전 8시 45분 경 끝내 운명(향년 79세)
범민련 서울연합 부의장, 민자통 서울회의 의장을 거쳐 현재 범민련 남측본부 부의장, 민자통 상임의장,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 “부디 편히 쉬십시오. 참 잘 살았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통일의 길에 한 생을 바친 선생의 영전에 추도사를 바치는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
▲ 추도사를 하는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조순덕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과 류정식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회원(왼쪽부터).
이날 추도사에 나선 이규재 범민련남측본부 의장은 “전쟁과 분단은 류종인 동지의 가족 비극사의 시초였고, 또한 민족적 비극의 시작이었다”며 선생이 짊어져야 했던 분단의 고난을 지적하곤, “꿈에도 그리던 선친을 만나러 1970년 연락선에 몸을 싣고 평양을 향해 방북길에 오른 선생의 설레임과 아직도 풀지 못한 육친의 정을 이제 맘껏 누리시기 바란다”고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또한 “변함없이 언제나 늘 그랬던 것처럼 조국의 정세를 직시하고 여생을 바쳐 조국통일에 헌신해 나갈 것이다. 선생과의 인생에 기꺼이 동행하였던 유치자 여사께도 이제는 우리가 동행하겠다”고 다짐하며 동지적 인사를 전했다.
이어진 추도사에서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과 조순덕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상임의장, 류정식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회원 역시 한결 같이 선생의 기구한 가족사와 출소 이후 자주 민주 통일 투쟁 현장에서의 인연을 회고하고, “선생의 뜻을 이어 국가보안법도 양심수도 없는 자주통일 세상을 위해 남은 사람들이 온몸 바쳐 일할 것”이라 밝혔다.
한편, 범민련 북측본부와 해외본부, 공동사무국에서도 추도사를 보내와 고인의 삶을 추모하고 남녘 각계 인사와 유족에 애도의 뜻을 전했다.
류종인 선생 관련 기사 ‘20년 만의 재회, 30년의 그리움’
▲ 추도 노래를 부르는 노래극단 <희망새> 단원들.
▲ 추도 노래를 부르는 방기순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회원.
▲ 김길숙 민가협양심수후원회 회원이 추도 춤을 추고 있다.
▲ “선생님 가시던 어제는 며칠 전 사모님과 같이 고향 안동에 가시자고 약속했던 그 날이었습니다. 어쩌면 선생님은 고향을 늘 그리워하셨고 그 고향 가시는 날에 훨훨 날개로 자유로이 지금은 고향에 닿아 있으시겠지요. 고향녘 넉넉히 돌아보시고 이북의 아버님, 형님도 찾으셔서 못다한 소회 나누시고 사모님 등 더불어 행복하셨던 기억들도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생과의 숱한 일화를 떠올리며 시종 목이 메인 채 호상 인사를 하는 김호현 양심수후원회 전 회장.
▲ 20년 복역 후 출소한 선생과 2001년 가정을 이룬 미망인 유치자 여사(78세)가 헌화하고 있다. 유족 인사 중에 “여든까지 같이 해로하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제가 보필을 잘못했습니다.”라며 통곡해 장내가 눈물바다로 변했다.
▲ 헌화하는 유족들.
▲ 헌화하는 2차 송환 신청 장기수 유기진 선생(92세)과 통일광장 원로 선생들.
▲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선생과 오랜 연을 맺어온 2차 송환 신청 장기수 박희성(82세), 강담 선생(84세)이 헌화하고 있다.
▲ 29일 아침 유족의 오열 속에 장지로 항하는 운구.
▲ 29일 낮 용미리 서울시립공원묘지 안치식.
▲ 1973년 대전교도소로 보내온 선생의 세 아들 사진. 성수(1966년생, 당시 8세), 성준(6세), 성재(4세). 1983년 전 부인과 도미한 후 연락이 끊겼고, 출소 후 수소문했지만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선생을 기리는 추도식장의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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