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석방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한때 우리 사회가 빨갱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이었다. 가수 안치환은 노래 ‘빨갱이’를 열창했고 2만여 참가자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자가 빨갱이라면, 그래 내가 빨갱이다’라는 가사가 나오자 열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머리 위에는 푸른 물결이 출렁였다.
이상규 민중당 대표는 “더는, 호소하지도 요청하지도 않겠다. 우리 운명은 우리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강조했고, 이석기 전 의원은 옥중서신을 통해 “누가 뭐래도 다가오는 미래는 민중의 것”이라고 독려했다.
20일 오후 2시, 광화문 광장에 푸른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이석기 구명위원회가 준비한 그늘막이었다. 가로 40m, 세로 210m 크기의 초대형 그물막을 10t 크레인 8대가 들어 올렸다. 그늘막에는 가로 15cm, 세로 65cm 크기의 고밀도 폴리에틸렌 필름으로 제작된 ‘소원지’ 10만 장이 주렁주렁 달렸다.
소원지는 흰색과 하늘색, 푸른색이 어우러진 그러데이션이 인상적이었다. 하늘색과 푸른색은 이석기 전 의원이 좋아하는 색이라는 게 구명위 관계자의 설명이다. ‘석방이 정의다. 민주다. 평화다.이석기 의원 석방하라’는 글씨가 소원지에 인쇄됐다.
2만여명의 참가자와 푸른 그늘막 사이의 거리는 10m, 그 사이로 태풍 다나스가 만들어낸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초대형 그늘막이 바람에 출렁이는 모습은 거대한 파도를 연상케했다. 그늘막 아래서 하늘을 보니, 심해에서 유영하고 있는 듯 착각이 일었다. 구명위 관계자에게 ‘자유로움을 상징하느냐’고 물으니 “더우니까 그늘을 만들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우린 그렇게 복잡한 것 잘 모른다”라고 답했다.
이석기 전 의원은 지난 17일 구명위에 옥중서신을 보냈다. 이 전 의원은 서신에서 “수원에서 대전으로 왔다. 답답했던 콘크리트 건물에 갇혀 지내던 수원옥 시절에 비해 이곳에선 흙도 밟고 하늘도 볼 수 있으며 바람의 질감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저에 대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자기 땅에 든든히 자리 잡고 일하는지 정말 보고싶다. 오직 아쉬운 것이 있다면 동지들을 힘껏 안아볼 수 없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 전 의원은 자유한국당과 황교안 대표의 준동에 대해 “우리 사회를 촛불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 하는 헛된 꿈”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제 발로 설 때만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새로운 백년을 출발하자면 오직 자주의 원칙 위에 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상은 저절로 바뀌지 않으며 사회의 변화는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주체의 강한 의지와 실천을 통해서만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옥중서신은 김선동 전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이 대신 읽었고, 대열 세 번째 줄에 앉은 오병윤 전 사무총장은 검은색 모자를 쓰고 묵묵히 손뼉을 쳤다. 전문은 기사 하단에서 볼 수 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이미 지난 12일 중앙일보의 보도로 김이 빠졌다. 신문은 “민정라인을 통해 정치인 사면 불가 입장이 확인하면서 관련 논의가 종결된 것으로 안다”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전했다. 이날 무대에서 8‧15특사를 언급한 것은 밴드 타카피가 유일했다.
무대에 오른 민중당 이상규 대표는 “더는, 호소하지도 요청하지도 않겠다. 우리 투쟁으로 이석기 의원을 구출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석기 의원을 석방하지 못한 이 정권이 뼈아프게 후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약속을 저버린 민주당 정권이 자기 잘못을 알도록 해야 한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도 열지 못한 소심하고 소심한 정권이 자기 민낯을 보도록 해야 한다”고 외쳤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100만 조합원과 함께 투쟁하겠다”고 했다. 대열에는 전국건설노조, 학교비정규직노조, 공무원노조 등 민주노총 산하 조직 깃발이 펄럭였다.
사법 정의 회복을 위한 내란음모 조작사건 재심청구 변호인단은 지난달 이 전 의원 등 7명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변호인단을 이끌고 있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최병모 전 회장은 “내란음모사건의 재판 내용을 보면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사건인데 과거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처럼 완전히 조작됐다”며 “변호인단은 이 의원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고, 조만간 재심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전 의원은 옥중서신에서 “민주화를 위해 애써오신 원로 법조인들께서 나서 주신데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며 “이제라도 잘못된 판결은 바로 잡혀야 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을 반세기 넘게 옥죄어 온 최악의 적폐인 분단을 극복하는 시작”이라고 밝혔다.
가수 안치환은 노래 ‘빨갱이’를 열창했다. 빨갱이는 ‘내란음모’사건이 터졌던 2013년 작곡했고, 통합진보당이 해산됐던 2014년 쇼케이스에서 처음 공개됐다.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자 단숨에 쓸어버리고 싶을 때, 무조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면 돼, 빨갱이라 낙인찍어 버리기만 해’라는 가사가 인상적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자가, 더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자가, 너희가 만든 빨갱이라면, 그래 내가 빨갱이다. 나는 빨갱이다.’라는 가사가 나오자 2만여 참가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했다. 무대에 선 안치환은 “왜 아직도 양심수가 있나. 이석기 의원은 왜 아직 감옥에 있나. 전교조는 왜 합법노조가 아닌가. 우리가 이정권을 어떻게 만들었는데. 왜 그러고 있나”라고 반문했다.
석방대회 첫 무대는 ‘이석기 의원 석방 도보행진단’이 올랐다. 이들은 지난 13일부터 이 전 의원이 수감돼 있는 대전교도소에서 출발해 광화문 광장까지 총 224km를 걸었다. 구명위에 따르면 도보 행진에는 연인원 1천여명의 시민이 동참했다.
서울 석방대회에 앞서 이날 오전 11시에는 부산‧울산‧경남‧전남‧광주‧전북 등에서 서울로 상경하던 시민들이 대전교도소에 들러 ‘사전 석방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석기 전 의원을 접견하고 온 노정현 민중당 부산시당 위원장은 “‘모두 광장으로 달려가는 때, 저도 동지들과 함께 광화문으로 달려가는 겁니다’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며 “그의 옥살이는 지금까지도 그랬거니와 하루하루가 일분일초가 잔혹한 연쇄 범죄”라고 밝혔다.
이날 집회에는 베른트 릭싱어 독일 좌파당 대표, 토비아스 플리거‧실비아 가벨만 독일 연방의회 의원, 클라우디아 하이트 유럽 좌파연합 중앙위원 등 세계 정치인들의 이석기 의원 석방 촉구 영상 메시지가 상영됐다. 이들은 “평화를 애호하는 모든 세력이 힘을 모아야 한다. 이것이 이석기 전 의원이 석방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입을 모았다.
이석기 의원 옥중서신 전문
1.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운 동지들!
벗들. 동지들과 떨어져 지낸 지 벌써 만 6년이 되어갑니다.
그 사이 다들 얼마나 바뀌었는지, 어떤 고민과 구상을 하고 지내는지, 어떻게 자기 땅에 든든히 자리 잡고 일하고 있는지 정말 보고 싶습니다.
저는 그 사이 무려 7년을 끌던 사건에서 완전히 승리를 거두고 이곳 대전으로 옮겨왔습니다. 답답했던 콘크리트 건물에 갇혀 지내던 수원옥 시절에 비해 이곳에선 흙도 밟고 하늘도 볼 수 있으며, 바람의 질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동지들은 저에 대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동지들을 힘껏 안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저의 이른바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애써오신 원로 법조인들께서 나서 주신데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내란음모의 멍에를 쓰기 1년 전에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검찰은 저에게 국고사기라는 황당한 덫을 놓았습니다. 무려 6년의 재판 끝에 촛불혁명 이후에야 모두 무죄로 결론이 났습니다. 국고사기 사건이 저와 진보정치에 도덕적 흠집을 내기 위한 시도였다면, 그 뒤를 이은 내란음모조작사건은 정치적으로 진출하는 민중을 위협하고 민중과 진보정치가 확고하게 결합하는 걸 방해한 모략이었습니다. 만약 공정한 법정에서 ‘내란음모’사건을 다루었다면 내란음모사건 역시 당연히 무죄였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잘못된 판결은 바로 잡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을 반세기 넘게 옥죄어 온 최악의 적폐인 분단을 극복하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내란음모조작사건은 분단체제가 낳은 괴물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민족의 평화와 번영은 빈 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2.
사실, 촛불항쟁이 일어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작년의 남북정상회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보면서 이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백년이 찾아오고 있다는 예감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촛불혁명을 이뤄낸 민중의 요구는 그저 정권교체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실제 촛불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이 변화했습니다.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만난 것이나, 유례없이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스스로 현장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 모든 변화의 현장에 여기 모이신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백년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정권교체를 넘어 온갖 억압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모두가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중심이고 돈이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고 사람이 주인인 나라입니다. 미국만 바라보고 미국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이 아니라 민족이 화해하고 협력하며 공동 번영하는 평화의 새 시대가 와야 합니다.
민중의 나라. 자주의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백년의 깃발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금새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미뤄지고 있습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은 낡은 시대를 되살리려 합니다. 그들은 낡은 분단질서를 붙잡고 시대를 거스르는 반북을 내세우며 대립, 갈등을 조장하며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려 합니다. 물론 황교안씨가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나,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를 촛불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 하는 건 모두 헛된 꿈일 뿐입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지금처럼 좌고우면 한다면 역사는 제자리걸음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남북관계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반도 문제에서 중재자나 촉진자가 아닌 당사자 인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주춤거린다면 평화와 번영도, 통일도 늦추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주 없이는 통일도 없습니다.
스스로 제 발로 설 때만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새로운 백년을 출발하자면 오직 자주의 원칙 위에 서야 합니다.
3.
동지들. 세상은 저절로 바뀌지 않습니다. 사회의 변화는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주체의 강한 의지와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후퇴, 자유한국당의 반동공세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민중의 정치역량 강화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민중 스스로 각성하고 조직하여 정치의 주인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문재인 정부도 자신의 역사적 소임을 순조롭게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지여러분.
새로운 시대는 우리 목전에 이미 다다라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정치역량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민중의 아들, 딸로 태어나 민중의 기쁨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민중의 희망을 만들어 왔습니다.
맨 처음 자주의 깃발을 들었으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진보정치를 일구어낸 사람들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모진 탄압을 헤쳐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개척하는 것은 저와 동지들이 가진 자부심과 긍지의 원천입니다.
저는 비록 감옥 안에 있지만 늘 동지들과 함께 한다고 믿습니다. 동지들이 없다면 나는 없습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동지가 좋아서 이 길을 나섰고, 지금 바로 옆에 동지가 있으니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결속된 우리의 걸음을 막을 자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뭐래도 다가오는 미래는 민중의 것입니다.
2019. 7. 16 대전옥에서
이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