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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코리아뉴스 | 1958년의 진보당 조작사건과 2014년 말의 통합진보당 조작 해산 사건의 동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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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1-08 03:2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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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의 진보당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은 어떻게 닮아있나?-                         글쓴이: 이준영 우리사회연구소상임연구원
 
지금으로부터 57년 전인 1958년은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암흑의 해로 기억되고 있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죽산 조봉암 선생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 작전이 실시되었다. 진보당의 당수인 죽산은 은신중인 터라 검거를 피할 수 있었지만, 동지들의 체포소식을 듣고 자신이 도망을 가면 무고한 동지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면서13일 오전에 전화로 자진출두 의사를 밝혔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주장은 죽산과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대한민국의 국시인 북진통일을 위배했으며, 북한이 밀파한 간첩과 접선해 ‘폭력혁명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조봉암 체포 후 진보당 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체포1개월 만에 진보당은 전격적으로 등록 취소되어 해산당했으며, 조봉암에 대한 재판은 사건이 발생한지 채 2년이 되지 않아 3심이 모두 종료되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진보당 당수 조봉암 선생은 4.19혁명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산화했다. 물론 진보당과 조봉암에 대한 모든 혐의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두 번의 ‘진보당 해산’
 
한편, 반 세기가 흘러 2014년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은 비극이 재현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시킨 데 이어, 통합진보당 자체를 해산시키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제출했다. 정부 측의 요지는 자주·민주·통일 등의 내용이 담긴 통합진보당 강령이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반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며, 통합진보당이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폭력혁명의 수단으로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의 박한철 소장을 비롯한 8명의 재판관들은 정부의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을 전격 해산시킨 데 이어,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된 국회의원 3명에 대해서까지도 의원직을 박탈했다. 정부가 ‘해산심판 청구안’을 제출한 지 1년, 첫 공개변론이 시작된 지 11개월만의 일이었다. 반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해산의 논리는 허술했지만, 심판의 과정은 기민했다. 또한 반세기 전 1심에서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한(조봉암에게는 불법무기소지죄로 5년을 선고) 유병진 판사와 마찬가지로 통합진보당 해산 반대 의견을 낸 재판관은 김이수 재판관 단 한명 뿐이었다.
 
1958년의 진보당 해산과, 2014년의 통합진보당 해산 사이에는 이처럼 비슷한 논리와 사건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하지만,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이 두 편의 비극 앞에서 우리는 미래세대에게 ‘역사’에 대해 무어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세 번째 비극의 재현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두 사건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1. 집권세력의 견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죽산은 1950년대 말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다. 1956년 치러진 3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은 유효표의 30%가 넘는 216만표를 득표했다. 이는 당시 선거가 이승만과 자유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엄청난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조봉암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조봉암의 등장으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불투명해지자, 이승만은 혁신을 통해 민심을 수습할 것인가, 극우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해 파시즘으로 영구집권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애초부터 영구집권이 목표였던 이승만은 당연히 후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조봉암과 진보당은 그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이승만은 진보당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어떻게든 조봉암을 제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월 14일 진보당 사건을 보고받고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으며, 4.19이후의 한 폭로에서는 “조봉암은 공산당이니 없애야 한다”는 이승만의 친필 쪽지가 육군 특무대장에게 전달되었다고도 밝혀졌다. 또한 1심에서 조봉암에 징역 5년만이 선고되자, 이승만은 “책임판사들을 처단해야”한다면서 격분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목적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의 위법성을 밝히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조봉암이라는 인물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2014년의 통합진보당 해산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해산 선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 각계에서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고 했지만, 그 해산 논리의 빈약함은 헌법학자들은 물론 사회 각계에서도 숱한 질타를 받았다. 17만 여 페이지에 달하는 증거와 변론자료들을 수개월 내에 검토해 판결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이 재판이 이미 모종의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번 판결이 지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노골적으로 공격한 이정희 후보와 통합진보당에 대한 보복이라고 여기고 있다.
 
특히 정당해산이 이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된 데에는 집권 2년차 들어 심각하게 약화되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통치력을 종북공세를 통해 만회해보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2014년 들어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세월호 참사, 그리고 정윤회·십상시 국정농단 등의 사건을 겪으며 취임 이후 최악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다. 힘이 빠져가는 집권세력이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 바로 종북몰이임은 지난 역사를 통해 숱하게 증명된 사실이다.
 
2. 보수 야당의 부화뇌동
 
죽산과 진보당이 제거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승만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정치를 양분하고 있던 민주당은 진보당이 창당되면서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까 두려워 자유당과 선거법 협상을 통해 조봉암과 진보당의 활동을 옥죄고 있었다. 민주당 지도자 조병옥은 이승만의 수족인 이기붕과 진보당을 말살하기 위해 획책했으며,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옭죄기 위해 1958년 국가보안법 파동을 일으키는 데 동조했다.
 
진보당 사건이 터지고, 진보당이 창당 1년 만에 일개 경무대 공보실장의 발표에 의해 등록취소·해산되자 명색이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밝혀진 범죄 사실이 사실이라면 등록취소가 마땅하다”며 이승만 정부의 편을 들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혁신계에서 활동하다 노선 갈등으로 죽산과 돌아선 ‘어제의 동지’ 서상일 같은 자는 검찰 증언에서 “첫째 당 기구상 개인독재 정당이고, 둘째 유물론에 입각한 맑스주의 이론을 토대로 하였으며, 셋째 노동자, 농민만을 위한 계급정당이기 때문에 결국 좌경정당으로 볼 수 있다”며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반세기 후,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자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성명을 통해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이나 민주주의 기초인 정당의 자유가 훼손된 것을 우려한다”며 “통합진보당에 결코 찬동하지 않는다”고 우스꽝스러운 논평을 내놓았다.이 당의 안철수 의원 역시 “헌법재판소 판결을 존중합니다”라면서 이런 중대사안은 “유권자가 투표로 심판해야할 몫”이라는 웃지 못 할 의견을 밝혔다. 또한 서상일과 마찬가지로 ‘어제의 동지’였던 천호선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진보의 위기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서 시작된 것 … 그 동안 통진당은 북한 인권문제나 세습체제에 대해 국민이 물을 때 대답하지 않는 것을 당의 방향으로 삼고 있었다…정의당은 (통진당과)무조건 다르다”고 했으며, 마찬가지로 심상정은 “진보정치 안에서 종북주의 논란을 자체적으로 정화하지 못해 이런 판결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며 헌법재판소의 종북논리에 부화뇌동하고 있었다.
 
3. 언론을 통한 여론재판
 
언론이야말로 1958년이나 2014년이나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1958년 언론은 빨갱이몰이의 선봉부대였다. 이들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위보도를 일삼으며, 여론재판에 앞장섰다. 수사당국에서 흘리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 적었으며,극우적인 의도를 가지고 노골적인 빨갱이몰이에 펜대를 놀렸다. 이들은 진보당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의 전주곡이라도 울리는 듯이, 진보당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극우적인 용공조작에 적극 가담했다. 죽산이 체포되자 언론은 조봉암이 북괴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느니, 간첩과 접선해 야합했다느니, 진보당과 북괴는 종적으로 연락했고 비밀 서클이 5개나 있다느니, 조봉암의 집에서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다느니 하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아마도 언론의 집중포화로 치자면, 조봉암의 진보당 사건 때보다도 통합진보당 사건에 대한 언론의 ‘종북몰이’가 훨씬 길고 집요했을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소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가 발생한 이래 ‘종북’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종북몰이에 가장 앞장서고 이를 통해 가장 재미를 본 것이 바로 보수언론이었다.
 
종북이 없으면 지면과 방송시간을 채울 수 있을지가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보수언론들은 정권에 불리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통합진보당을 들먹이며 종북 마녀사냥에 나섰다. 종편채널은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부부를 ‘종북부부’로 낙인찍기도 했으며,변희재 등의 극우논객은 이 대표와 통합진보당을 ‘종북주사파’라고 비방해 법적인 제제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진보당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과 온갖 비방중상은 날로 심해져 갔다. 통합진보당과 ‘종북’ 이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수언론의 지면과 화면을 뒤덮었다.

무죄가 된 조봉암·진보당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은?
 
2007년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진보당·조봉암 사건을 이승만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려고 저지른 조작 사건으로 결론 내리고 대법원에 재심을 권고했고, 대법원은 2011년 조봉암 선생의 재심사건 선고공판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이 된 지 52년만의 일이었다. 대법원은 자신들이 유죄로 판단한 모든 죄목에 대한 판결을 뒤집었다. “진보당이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체제의 골간, 대의제도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고 해서 헌법에 위반된다거나 국가변란을 주창한 것이라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조봉암 선생의 간첩혐의에 대해서도 전부 무죄로 판단했다.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이 무죄로 되기까지 52년의 세월이 걸렸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역사의 재심도 무죄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출처: 우리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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