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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포뉴스 | - 담론 136 - 1. -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승리는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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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2-13 10:2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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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론 136 - 1.-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승리는 과학

     

 -자주자력자존을 국풍으로 정립한 주체조선  리준식 코레아뉴스 편집위원


 2020년 새해가 밝아 어느새 한해의 첫 절기인 입춘(2월4일)을 맞이하고 있는 북에서는 “우리의 전진을 저애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으로 뚫고나가자”는 《전원회의결정서》 관철 투쟁으로 온 나라가 뜨겁게 타오르는 가운데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굳건한 토대를 한 생을 바쳐 튼튼히 마련해주신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강계정신, 성강의 봉화, 락원의 봉화, 새 세기 산업혁명》을 위해 눈보라 강행군, 삼복철 강행군, 심야 강행군의 험산준령을 넘고, 또 넘으신 자력부강의 혁명가, 절세의 애국자 탄생을 경축하는 2월의 봄 《광명성절》 열풍 속에 절세의 위인을 그리워하는 《2월은 봄입니다》 찬가가 2월 강산에 울려 퍼지고 있다.  

 

 세인들은 말한다. 《나라의 건국보다 건국이념사상을 지키는 것이 백배는 더 어렵다!》 고..... 사회주의주체조선은 친일파와 민족반역세력들을 깨끗이 청산하고 자주자력자존을 조선의 국풍으로, 강성대국부강번영을 확고부동한 미래로 정립한 북에서는 2019년 12월28일부터 31일까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 직접 보고한 김정은 위원장동지께서는 조국통일의 변하지 않는 장애물인 미제국과의 《정면돌파전》 을 만천하에 천명시고 위대한 두 분 수령님들의 당과 건국이념사상을 계승한 《김일성-김정일주의 만세!》 소리를 온 나라, 온 세상에 《백두에서 개척된 주체혁명위업승리는 과학》 임을 선포하셨다.     

  

 인간의 삶이 집단적사회공동체로 종족보존과 생활안정을 통해 진화 발전한 인류문명사 중, 우리 민족이 단군조선으로 창대한 역사의 첫발을 뗀 5천년문화문명역사에서 확고부동하게 애국애족애민의 사회주의이민위천제도를 구현한 조선로동당의 애국애족애민사상을 대를 이어 계승한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선 미제를 두목으로 하는 연합세력들의 악착같은 제재를 자력갱생정치사상으로 만난을 뚫고 자체의 힘과 과학기술로 기필코 자력부강의 사회주의조선, 지구상 어떤 세력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핵전략보유국지위로 미제와의 대등한 《평화회담/군축관계회담/외교정상화회담》 을 주동적으로 추진하게 할 《전원회의 결정서》 를 읽는 세계는 인류에게 도덕, 물질, 기후재앙의 뿌리로 전락한 자본주의자유시장경제체제에 관해 다방면, 다각도로 연구 분석한 과학적보고서들은 더 이상의 자유시장경제체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구의 재앙이며,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기후온난화로 인한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세계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서거와 함께 쓸어 닥친 가뭄, 폭우, 연이은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바라지 말라!》 천명하며 20세기 고난의 행군 길을 피눈물로 넘으며 무적강군혁명무력건설의 만년초석을 다지며 우리 식 사회주의를 굳건히 수호하고 부강조선건설을 위한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려고 주치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민행열차에 오른 2011년 12월17일 애석하게 서거한 김정일 국방위원장동지를 잊지 못한다. .


 세계가 보았다. 애통하며 통곡하는 인민들의 머리위로 아이들 주먹 만 한 눈송이가 쏟아지는 거리.... 박달나무도 얼어터진다는 백두산, 백두밀영귀틀집에서 항일의 총소리를 자장가소리처럼 들으며 첫 걸음마를 떼신 우리 장군님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눈을 밟고 가시게 할 수 없다며 밤새워 눈을 쓴 청년들이 길바닥에 자신들의 외투와 웃옷을 벗어 덮은 광경, 통곡하는 오열과 눈물 속에 숙연하고 비통함에 잠긴 김정은 국가장례위원장의 영상을......    

 조선의 인민들은 국상의 슬픔 속에서도 2011년 12월30일 김정은 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무력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모시면서부터 조선로동당혁명의 붉은기는 김일성 혁명시대→김정일 혁명시대→김정은 혁명시대계주봉으로의 전환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2012년 새해를 맞이하여 8년차를 맞이하는 2019년 10월 첫 눈 내린 백두산 백마 행군, 12월 초 당지도부일군들을 대동한 백두산준마 행군의 의미는 사회주의주체조선의 창건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혁명유훈을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당의 요구대로 집행실천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주체사회주의백두형명의 영광스러운 혁명의 시대를 자신의 대에서 역사, 민족사적으로 완성하겠다는 억척불변의 신념의지가 12월28일부터 31일까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 관한 로동신문 1월1일자 보도(결정서)인 것이다.    


 - 보천보 밤하늘에 울려 퍼진 조선독립 총소리  

 

 사회주의주체조선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수많은 출판도서들 중, 북을 연구하는 기관, 연구원, 학자들에게 필요한 관련부문전문도서 외에 보통일반대중들에게 사회주의주체조선을 이해하는데 김일성 주석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8권 만 큼 좋은 도서가 없다. 

 한 생을 제국주의와 싸워 조국광복을 안아 오셨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시어 심장의 고동이 멈추기 전에 수표(서명)한 문건이 우리 온 겨레의 소원인 《조국통일》 문건이었다는 사실자체가 한 생을 애국애족에 헌신하신 숭고함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무엇보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엔 어려운 표현이 없어서 좋다. 모두 우리 글로 중고등학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어휘들이며, 영원무궁할 통일조국을 떠메고 나갈 새 세대들에게 주는 교훈들을 가슴으로 읽는 민족구원, 민족재생의 불후의 고전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귀중한 역사적 사진자료들과 함께 회고록 1권부터 6권까지 수록된 친필부문을 따로 먼저 소개한다.   

 

 - 회고록 제1권 제1부 항일혁명 (1)에 수록된 친필, “혁명하는 사람은 언제나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거하면 백번 승리하지만 인민의 버림을 받게 되면 백번 패한다는 진리를 삶과 투쟁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 회고록 제2권 항일혁명 (2)에 수록된 친필,  “민족의 운명은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귀중히 여기는 모든 애국력량의 단합과 거족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구원될수 있다.”


- 회고록 제3권 제1부 항일혁명 (3)에 수록된 친필,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만이 조국이 얼마나 귀중하고 조국에로 다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시련에 찬 길인가를 진정 뼈에 사무치게 느낀다고 말할 수 있다.”


- 회고록 제4권 제1부 항일혁명 (4)에 수록된 친필, “언제나 인민을 믿고 어떤 조건에서도 혁명적 신념을 버리지 않으며 자주로선을 일관하게 견지하면서 광범한 반일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운 것은 항일혁명의 승리를 담보한 주되는 요인이였다.”


- 회고록 제5권 항일혁명 (5)에 수록된 친필, “온 겨레의 단합된 힘으로써만 조국의 운명을 구원할수 있다는 것이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의 력사적교훈이다.”


- 회고록 제6권 항일혁명 (6)에 수록된 친필, “민족의 운명이 생사기로에 놓여 있던 암담한 시기 항일의 용사들이 조국 땅에서 울린 총소리는 멍들었던 겨레의 넋을 되살리고 항일혁명의 앞길에 승리의 서광이 비끼게 하였다.”

 

 한 생을 항일혁명과 조국통일에 바치신 숭고한 애국애족혁명의 삶 자체가 우리 민족이 나가야할 방향과 이정표를 똑똑히 인식하게 될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는 현재 친필 본 1권∼6권외에 계승본 7권 8권까지 출판되어 있다. 전 세계의 국립도서관과 주요대학도서관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를 북조선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우리 민족끼리》 웹 사이트(http:// www. uriminzokkiri. com)에 올라와 있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8권을 누구나 부담 없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무료제공하고 있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를 넘어 세계진보적인사의 필독서 1∼8 전권의 정독을 권면하면서 1937년 6월4일 역사적인 국내 첫 진공작전을 다룬 회고록 제6권 보천보의 불길(1) 149쪽부터 지양개군민련환대회 195쪽까지 내용을 간추렸음에도 부득이하게 길어진 핵심행간을 소개하는 이유는 83년 전, 강도 일제의 탄압과 압제에 신음하고 절망하던 암흑시대에 2천3백만 조선인민들에게 조선인민항일유격대가 보천보를 들이쳐 조선은 죽지 않았음을, 조선인민은 살아있음을 전 세계에 보여준 민족사의 쾌거에도 불구하고 2020년 남녘의 99% 민중들이 미제의 탄압과 압제의 암흑시대를 극복하는데 주체적 용기와 신심을 주고 싶기 때문이다. 

 

 1. 보천보의 불길(1)

 

 “보천보전투의 력사적측면에서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연구하고 이야기 하였지만 이 전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한 나에게는 정신적 체험이나 추억거리들이 적지 않다. 지금도 반세기 전에 있었던 가지가지의 정경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천보전투는 한마디로 말하여 생리별당한 어머니와 그 자식들의 상봉과 같은 사변이였다고 할 수 있다. 조국은 보천보에서 울린 총소리를 계기로 하여 자기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충직한 아들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전투는 망국사의 흐름을 광복에로 돌려세운 결정적인 계기의 하나 였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중략) 민족어는 민족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를 빼앗고 말살하는 것은 민족전체성원들에게서 혀를 잘라내고 얼을 빼앗는 것과 같은 잔학무도한 짓으로 된다. 령토와 국권을 잃은 민족에게 남는 것이란 언어와 정신밖에 없다.

 그런즉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민족전부를 숨쉬는 시체로 만들려는 것이다. 《황민화》의 본질은 조선 사람들을 일본사람과 똑같은 《1등 국민》으로 만들어서 흰쌀밥을 먹이려는 것이 아니고 아침마다 《궁성요배》나 《신사참배》를 하며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일본 국민의 종복으로 만들려는데 있었다.“


“중략)적지 않은 우리 인민들 속에는 일본군의 강대성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조성되여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이 만주를 단숨에 삼켜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군대를 당해낼 군대는 없다고까지 생각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일본과 같은 강대국을 상대로 하여 독립전쟁을 벌린다는 것은 닭알로 바위를 깨겠다고 덤비는 것과 같이 황당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하였다.

 여러 가지 징후들로 보아 일제가 중국관내로 침략전쟁을 확대하리라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현실로 되었다. 준일전쟁은 시간문제로만 남아있었다. 일본군이 기세등등해서 전쟁의 불길을 넓혀가는데 따라 《무적황군》 에 대한 공포와 환상은 혁명의식을 마비시키는 환각제와 같은 것이다. 이 환각제의 작용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려면 일본군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본군이 강국이기는 하지만 치면 꺼꾸러뜨릴수도 있고 괴멸시킬수도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어야 하였다. 우리가 한 5년 동안 북간도와 서간도를 중심으로 하여 벌린 무장투쟁은 일본의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려버리였다. 그러나 혹심한 보도관제와 외곡된 선전으로 하여 우리 군대의 전과는 국내 깊이에 까지 사실대로 널리 알리지 못하였다. 


 이런 때에 우리가 대부대로 국내에 쳐들어가게 되면 온 나라 강산이 경탄과 감격으로 발칵 뒤집히고 인민들은 일제를 쳐부수고 조선을 독립시킬 군대가 있다고 기뻐할 것이다. 조국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조선의 혁명군대가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 이것이야 말로 2천300만 동포들이 조국광복전선에 과감히 떨쳐나설수 있는 힘과 의지의 기초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국내진공작전에 일관되여있는 우리의 전략적 의도였다. 나는 그 당시 두가지 점에 사색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나는 군사적으로 국내의 큰 요충지들을 공격해서 온 나라에 충격을 주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하조직망을 조밀하게 뻗혀서 전민을 반일항전에 준비시키자는 것이였다. 그래서 조국을 해방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가 도래할 때 무장투쟁과 전민봉기를 배합하여 일제를 격멸하고 독립을 실현하자는 것이였다.“ 2;계속.....

 

 “중략) 조선은 사람이 살지 못할 생지옥으로 변하였다. 동방조선에 칠칠야밤과 같은 암흑이 끝없이 계속되였다. 그 밤은 날이 가고 달이 가도 지샐줄 몰랐다. 

 (이 지리 한 예속의 밤, 굴욕의 밤을 끝장내지 못한다면 우리 어찌 감히 자기들을 조선의 장부라고 할 수 있으랴. 어서 빨리 조국으로 나가자. 조국에 나가서 기나긴 악몽 속에서 시달리는 민족의 넋에 생명을 불어넣자.)

 이것이 조국진군을 준비하던 나날 우리 지휘관들과 대원들의 머리를 지배한 생각이였다.“   


 “금창전투는 인민들의 원한을 통쾌하게 풀어준 유명한 전투였다. 최현이 리도선을 죽이고 《토벌대》를 전멸시킨 소식은 그 당시의 신문들에 크게 소개되였다. 최현은 원래 이름난 싸움군이였다. 최현부대의 무산지구 진출과정에는 가슴 아픈 희생도 없지 않았다. 그 과정에 그들은 《4사의 꽃》이라고 불리우던 리경희를 잃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오빠들과 삼촌들을 잃고 할머니마저 잃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격대원이였다. 리경희도 원한을 품고 쓰러진 혈육들의 복수를 위해 무장대오에 들어섰다. 처음에 지휘관들은 그를 부대에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그마저 총을 잡는다면 리씨가문을 지킬 사람이 한명도 남지 않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리경희의 떼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군을 허락하고 말았다.

 전우들이 《4사의 꽃》이라고 하면서 리경희를 친딸이나 친동생처럼 애지중지하게된 것은 그의 용모가 특별히 아름답고 귀염성스러운데다가 일솜씨가 좋고 마음씨가 고운데 있었다. 그의 특기인 춤과 노래는 부대의 자랑이였다. 리경희가 유격대에 입대하였을 때 지휘관은 권총을 주었다. 체소하고 연약한 이 처녀에게는 보총이 적합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리경희는 권총으로 싸우는 것이 성차지 않아서 마상대총을 메고 다니였다. 그가 마상대를 메고 춤을 출 때면 전우들이 손벽을 치며 늘 재청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중략) 보천보전투가 끝난다음 3개 방면에서 활동하던 부대들이 지양개에서 만나 군민련환대회를 할 때 최현은 나에게 리경희의 최후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눈물로 수건을 적시였다. 이 범 같은 사나이의 눈에서 소리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을 때 나는 리경희의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얼마나 비통한 손실로 되는가를 가슴저리게 느끼였다. 

 최현이 치명상을 당한 리경희를 안아 일으켰을 때 그의 손가락 짬으로는 피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여기가 조국땅이라지요? 그래도 조국땅을 밟아보았으니 다행입니다. 모두들 내 몫까지 잘 싸워주십시오.》 

 이것이 최현의 품에서 전사할 때 그가 전우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후 리경희의 아버지도 회령 쪽으로 국내공작을 나갔다가 적들에게 학살당하였다. 아버지와 딸은 이렇게 조국땅에 묻히였다.“          


“중략)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였다.

 …보천보를 치자면 여러 가지로 타산해보아야 한다. 첫째로, 수백명에 달하는 부대가 조밀한 국경감시망을 번개처럼 뚫고 들어가 적을 치고 번개처럼 빠져나오는 작전을 할 수 있는가? 둘째로, 이 전투는 단순한 화력전이 아니라 국내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주는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것만큼 화력전을 하면서 강력하고 신속한 정치선동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이런 신속한 선전선동이 가능한가? 셋째로, 우리는 이번 기회에 혁명군무력과 지하지좆이 하나의 목표를 놓고 련합작전을 하는 모범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그 세 가지가 다 헐치 않은 전제들이어서인지 지휘관들은 또다시 팽팽한 분위기에 휩싸이였다. 그러나 그때 권영벽이 무게 있는 목소리로 정적을 깨뜨리였다. 

 《사령관동지, 해낼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해낼만한 담보가 있소?》

 나는 권영벽의 대답이 달리는 될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우쳐 물었다.

 《있습니다. 보천보야 조국이 아닙니까!》

 나는 그 대답을 귀로 들었다기 보다는 자신이 웨친것만 같았다. 어쩌면 권영벽의 심정이 내 심정과도 그렇게 같은가.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그럼 대답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실로 모두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던 대답이였다. 

 타향의 이슬비와 설한풍 속에서도 련전련승하여온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어찌 자기에게 생명을 주고 혼을 준 사랑하는 조국 땅에서 승리하지 못하겠는가.

 짧은 모임이였지만 많은 것들이 론의 되었다. 그러나 그 세부들은 세원의 년륜 속에 묻혀버리였다. 다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보천보야 조국이 아닙니까!》 하고 자신 있게 웨치던 권영벽의 음성뿐이다. 국내진공이라는 력사적인 출정을 앞둔 그 순간에도 우리의 가슴속에는 조국이라는 크나큰 존재를 강탈당한 망국노의 울분이 자리 잡고 있었다.“  

 

 2 . 보천보의 불길 (2) 


 “우리는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에서 국내진공대렬을 편성하고 대원들에게 일제히 여름군복을 갈아입히였다. 장사진을 이룬 대오가 일매지게 새 군복을 입고 지양개를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차림새가 그때처럼 좋은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걸음은 작전상의 단순한 위치이동이 아니였다. 그것은 망국의 한을 품고 이국의 하늘밑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국땅에 큰 총성을 울리기 위해 여러해동안 피흘려 준비해온 길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 리별 끝에 몹시 그리웠던 부모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조국인민들에게 혁명군의 위용을 보여줄수 있도록 옷차림과 행장구를 최상의 것으로 갖추었다.“


 “중략) 우리는 6월3일 밤 압록강을 건넜다.

 전원이 강을 도하할 때까지 자신도 모를 긴장감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적들이 1선, 2선, 3선도 모자라 4선으로 경계진을 치고 있다는 삼엄하고 조밀한 국경경비였다. 300여개를 헤아린다는 북부국경지대의 경찰서와 경찰관주재소들, 거기에만도 수천명의 폭압무력이 배치되여있었다. 기동성도 여간 아니였다. 혜산경찰서에서는 국경특설경비대라는 것까지 무어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출에 대비하였다. 유격대의 《토벌》을 기본 목적으로 삼는 정예부대였다고 훗날 이 경비대의 대장이였던 오가와 슈이찌도 솔직히 고백하였다. 


 “중략) 정각 10시, 나는 권총을 높이 쳐들고 방아쇠를 당기였다. 

 10여년세월 조국의 동포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모든 사연들이 그 한방의 총성에 담겨 밤거리에 울려퍼졌다. 그 총소리는 우리 시인들이 노래하듯이 어머니 조국앞에 드리는 상봉의 인사였고 강도 일제를 징벌의 마당으로 불러내는 호출신호였다.

 나의 총성을 신호로 하여 사방에서 적기관들을 들부시는 사격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먼저 이 고장 경찰들의 소굴이며 온갖 폭압과만행의 아성인 경찰관주재소에 주되는 타격을 안기였다. 오백룡의 기관총이 주재소창문을 향해 사정없이 불을 뿜었다. 그때 우리는 산림보호구에 적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 있다는 정보에 기초하여 거기도 드세게 공격하게 하였다. 순식간에 온 거리가 발칵 뒤집히였다. 전령병들이 련이어 황철나무곁으로 달려와 전투정화을 보고하였다. 나는 그들이 왔다갔다할 때마다 인민들을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라고 강조하군 하였다.

 얼마 후에는 여기저기서 불길이 타래쳐오르기 시작했다. 면사무소, 우편국, 산림보호구, 소방회관을 비롯한 여러개의 적통치기관들이 일시에 화염에 휩싸였다. 거리전체가 여러개의 대형조명등을 설치한 무대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중략) 나는 김주현을 앞세우고 거리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총소리를 듣고 움쩍도 못했는데 우리 선동원들이 부르는 구호를 듣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막 쓸어 나왔다. 시인 조기천은 그때의 정경을 그리면서 《밤바다 같이 웅실거리는 군중》이라고 하였는데 그 표현이 참으로 적중한 것이였다.

 군중이 우리를 둘러싸고 끓어대자 권영벽이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조국동포들에게 인사 겸 연설을 한마디해야겠다는 것이였다.

 운집한 사람들을 둘러보니 별빛같은 시선들이 일제히 나한데로 쏠리였다. 

 나는 모자를 벗어쥔 다음 팔을 높이 들어 흔들면서 만장을 향해 필승의 사상으로 일관된 반일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나라가 해방되는 날 다시 만납시다!》

 연설을 마친 다음 이런 말을 남기고 화공이 충천하는 면사무소 앞을 떠났으나 가슴이 그냥 저려들었다. 칼로 살을 도려낸 것처럼 몹시도 아파났다. 우리는 저마다 이 자그마한 국경의 거리에 심장의 한 부분을 떼어두고 가는 것이였다. 가는 심장과 남는 심장이 리별앞에서 소리없이 통곡하였다.

 

 부대가 곤장덕에 올랐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구령도 없이 갑자기 대렬이 흩어지는 것이였다. 대원들이 저마다 흙을 움켜서 배낭속에 넣고 있었다.

 지휘관들도 뒤질세라 조국의 흙을 간수하였다. 22만평방키로메터라는 나라의 땅덩어리에 비하면 한줌의 흙이라는 것은 너무도 작은 것이였다. 그러나 그 한 줌의 흙에는 삼천리가 담겨 있고 2천 300만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옹근 조국과도 같이 귀하고 소중한 것이였다.


 오늘은 우리 비록 한 거리를 치고 가지만 래일은 100개의 거리, 1.000개의 거리를 치리라. 지금은 우리 비록 한줌의 흙을 안고 가지만 래일은 온 나라를 다 해방하고 독립만세를 부리리라!

 우리는 이런 맹세를 다지면서 압록강을 다시 건넜다.

 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우리측으로 볼 때에도 전사자는 없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여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모든 과정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립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

            

 “중략)보천보전투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의의는 조선이 다 죽었다고 생각하던 우리 인민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싸우면 반드시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이룩할 수 있다는 신심을 안겨준데 있다.

 이 전투가 국내 인민들에게 참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보천보를 들이 쳤다는 소식을 듣고 려운형은 전투현장에 달려갔다고 한다. 그가 이 전투 소식을 접하고 몹시 흥분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는 해방후 평양에서 나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유격대가 보천보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20여년 세월 왜놈들 치하에서 수모를 당해온 망국민의 설음이 순간에 다 녹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 그때 보천보에 가보고 무릎을 쳤지요, 이제는 됐구나, 단군조선이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절로 나지 않겠습니까.》

 안우생의 말에 의하면 김구도 보천보전투에서 이만저만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안우생은 오래동안 상해림시정부를 따라다니면서 김구의 서기로 있었다. 

 어느날 김구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보천보전투소식을 읽게되였는데 어찌나 흥분했던지 창문을 열어제끼고 배달민족은 살아 있다고 몇 번이나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다. 

 김구는 그때 안우생에게 지금은 시국이 험한 때이다. 중일전쟁이 림박하니 운동을 한다던 사람들은 뒤골목으로 다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판국에 김일성이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까지 쳐들어가서 왜놈들을 정면으로 후려친 것은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이제는 우리 림시정부가 김일성장군을 후원해야 겠다, 수일내에 백두산 쪽으로 사람을 보내자고 하였다고 한다.“       

 

 3. 지양개군민련환대회  

 “

 “보천보를 치고 귀로에 오른 대렬이 구시골에 들어서자 대원들은 지휘관들을 통하여 나에게 하루의 휴식을 제의하였다. 그때까지 의 항일전쟁행정에서 대원들이 사령부에 휴식을 요구한 전례는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피곤이 겹쌓였으면 그들이 그런 제의를 하였겠는가. 사실 그 무렵에 우리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단 하루도 편안하게 쉬여본 적이 없었다. 곤장덕에 가서도 만 하루를 지냈지만 모두가 열에 떠서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피곤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전투가 일단락을 짓게 되자 어느새 대오를 지배하고 있던 탕개가 풀어진 것이다.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안정과 휴식을 바라고 있었다. 나 자신도 피로와 수면부족을 느끼였다.”


 “중략) 그러나 나는 휴식을 선포할 수 없었다. 이런 때일수록 지휘관들은 각성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국경을 넘어섰다고 하여 긴장을 늦춘다면 큰 변을 당할 수 있었다. 국경일대의 수비대에는 보나마나 비상동원령이 내리고 소동이 일어났을 것이였다. 그 병력이 어느 순간에 우리 에게 싸움을 걸어올지도 몰랐다. 적이 우리를 추격해오리라는 것은 전례를 보아도 명백한 일이였다.”


 “중략) 나는 전리품의 일부를 마을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배낭들에 주먹밥을 싸넣게 하였다. 동시에 짐을 지고 따라온 보천보사람들의 일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부대전원과 남아 있는 짐군들을 데리고 구시산에 올랐다. 나는 어쩐지 싸움이 붙는다면 이 산에서 붙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구시산은 경사가 60도나 되는 물매가 급한 돌박산이였다.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기가 헐치 않았다. 앞사람이 실수를 해서 돌 한 개만 굴려도 련쇄반응이 일어나 무서운 돌사태가 당할 수 있었다. 나는 백학림 전령병을 시켜 돌을 굴리지 말라는 주의를 몇 번이나 주었다. 누구나 손으로 앞사람의 발을 안전하게 잡아주고 밀어주면서 조심스레 경사를 톺아 올랐다.

 나는 부대가 산꼭대기에 오르자 땀도 들이기전에 전투배치부터 하였다. 지형의 특성에 맞게 돌싸움을 배합할 작정으로 전대오가 달라붙어 곳곳에 돌무지를 무져놓았다. 그런 다음 주먹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게 하였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리가 올라온 쪽으로 어느새 적들이 무리지어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오가와 슈이찌가 이끄는 국경특설경비대 무력이이였다. 오가와는 그 경비대의 대장이였다. 적은 제법 기세 좋게 접근해 왔다. 적이 우리 진지로 30메터가량 되는 곳에 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사격구령을 내리였다. 고지우에서는 보총과 기관총들이 일제히 불을 품기 시작했다.“


 “중략) 우리는 구시산전투를 끝낸후 포위에 들었다가 무사히 돌아온 최현부대와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최현의 신발이며 옷주제를 보니 말이 아니였다. 그는 만나자 마자 보천보와 구시산에서 우리가 거둔 성과를 떠들썩하게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불쑥 꺼냈다. 

 《우린 이번에 베개봉근방에서 놈들의 포위에 들었댔는데 그놈들이 갑자기 포위를 풀고 달아나버리더란 말이오다. 장군님, 이게 어떻게 된 감투끈이오?》

 나는 그동안 최현의 4사를 구출하기 위해 보천보를 치게된 과정사를 간단히 말해주었다. 

 최현은 그 말을 듣자 껄껄거리며 웃었다.

 《갸들이 물러가는걸 보구 귀신의 조화라고 생각했더니 결국은 장군님덕이였구만요. 거 정말 대단하오다.》

 그는 말끝마다 《갸들》이라는 대명사를 붙이였다. 그것은 그가 일본군경들을 멸시해서 곧잘 사용하는 비칭이였다.“


 “중략) 우리는 지양개에서 1군 2사동무들과도 상봉하였다. 2사도 자기 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하였다. 나는 4사와 2사 동무들에게 주력부대의 국내진공작전을 익측과 배후에서 후원하고 협조해 준데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였다. 서강회의 결정에 따라 3개 방면으로 진출했던 혁명군부대들은 이처럼 회합장소로 내정되였던 지양개 등판에 모여 전투적인 우애를 나누었다. 신록이 무르익는 등판은 명절처럼 흥성거였다. 주고받는 이야기마다 신바람 나는 무훈담들이였다.

 서강회의방침을 실현하는 과정에 혁명군부대들이 거둔 전과를 직접 목격한 백두산지구 인민들의 기쁨은 참으로 각별하였다. 박달이네 조직선에서 들려온 통보에 의하면 갑산, 풍산, 삼수일대에서는 혁명군이 자기네 고장을 해방시킬 날이 박두했다고 하면서 남녀로소가 부글부글 끓고있다는것이였다.


 “중략) 최현은 가와시마의 운명처리문제 때문에 자기가 전광, 박득범과 언쟁을 하였다고 하면서 그들이 가와시마를 처단하라고 자꾸 압력을 가하는데 장군님의 생각은 어떤가고 물었다. 

 그날 나는 가와시마를 직접 만나보았다 - 담론 136 - 2.- 에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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