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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코레아뉴스 | - 동영상 -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1권 제1장 5.《압록강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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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5-03 13:0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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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영상 - 김일성 주석 회고록 제1권 제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 5. 압록강의 노래 


5. 《압록강의 노래》


1923년초에 아버지는 나를 불러앉히고 이제는 소학교를 졸업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장차 어떻게 할 생각인가고 물었다.

나는 상급학교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싶다고 말씀드리였다. 나를 상급학교에 보내려는것은 우리 부모님들이 평소부터 품어온 소망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장래에 대한 포부를 물으니 나로서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심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제부터는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는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였다.

그 말씀 역시 나한테는 뜻밖이였다.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려면 부모님의 슬하를 떠나야 했다. 나는 그런 경우를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옆에서 바느질을 하던 어머니가 놀라면서 아직 나이도 어린데 어데 가까운 고장에 보내면 안되겠는가고 물었다.

아버지는 이미 결심이 확고히 서있는것 같았다. 지금 당장은 섭섭하고 허전하더라도 성주를 기어이 조선에 내보내야겠다고 거듭 말씀하였다. 원래 우리 아버지는 한번 내놓은 말을 리유없이 거두는 법이 없었다.

네가 어려서부터 부모들을 따라다니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제 다시 조선에 나가면 그보다 더 큰 고생도 할수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너를 조선에 내보내자고 결심하였다,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 네가 조선에 나가서 우리 나라가 왜 망했는가 하는것만 똑똑히 알아도 그것은 큰 소득이다, 고향에 나가서 우리 인민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있는가 하는걸 체험해보아라, 그러면 네가 할바를 잘 알게 될것이다.

아버지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진지하게 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뜻대로 조선에 나가서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리였다. 당시로 말하면 조선에서도 돈냥이나 있는 집 자식들은 저마다 보따리를 싸들고 외국류학의 길에 오르던 때였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데 가야 개명도 하고 학문도 닦을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하나의 시대적풍조로 되여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외국행을 할 때 나는 조선행을 하게 되였다.

아버지의 사고방식이 아주 독특하였다. 나는 지금에 와서도 그때 아버지가 나를 조선에 내보내준것이 옳은 처사였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열두살도 되지 않는 자식을 당시는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던 천리길에 홀로 내세운것을 보면 보통성미가 아니였다. 그 성미가 오히려 나에게는 힘으로 되고 믿음으로 되였다.

사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은 그렇게 단순한것이 아니였다. 조국에 나가서 공부하라니 다른것은 다 좋았는데 부모동생들의 곁을 떨어지는것이 싫었다. 그렇지만 고향에 가고싶은 생각은 불같았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단란한 가정의 분위기를 떠나고싶지 않은 미련이 검질기게 교차되는 복잡한 심리의 파동속에서 나는 들뜬 기분으로 며칠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날씨라도 좀 따스해진 다음에 보내면 어떻겠는가고 말씀하였다. 아직 어린 자식을 천리길에 홀몸으로 내세우자니 어머니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말씀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천리길을 가야 할 내 앞길을 은근히 걱정하면서도 아버지가 계획한 날자에 나를 떠나보내려고 밤을 새우며 두루마기와 버선을 지었다. 아버지가 일단 결심한 문제였으므로 어머니도 다른 말씀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 어머니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떠나갈 날이 다되자 아버지는 나에게 팔도구에서 만경대가 천리인데 혼자서 갈수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갈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목책에 로정도를 그려주었다. 후창에서 아무데, 화평에서 아무데, 어데 어데까지 그리고 그 어간이 몇리라는것도 써주고 전보는 두번 치되 한번은 강계에서 치고 한번은 평양에서 치라는것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팔도구를 떠나던 날은 음력 정월 그믐날(양력 3월 16일)이였다. 아침부터 눈보라가 일고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그날 팔도구에 사는 동무들이 나를 바래주느라고 압록강을 건너 후창남쪽까지 30리를 따라왔다. 길동무를 해준다고 하면서 한정없이 그냥 따라오기에 겨우 설복해서 돌려보냈다.

막상 길을 떠나고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는 험산준령이였다. 그 험한 산악들을 단신으로 넘는다는것이 헐치 않았다. 후창에서부터 강계에 이르는 길 량옆의 수림들에서는 대낮에도 맹수들이 어슬렁거리였다.

그때 천리길을 걸으면서 고생을 퍼그나 했다. 직고개나 개고개(명문고개)와 같은 고개를 넘을 때는 정말 혼이 났다. 오가산령은 하루종일 넘었다. 아무리 걸어도 고개가 끝이 나지 않고 새 고개가 연방 나타나군 하였다.

오가산령을 넘고나니 발이 다 부르텄다. 다행히도 그 령밑에서 어떤 로인이 나를 붙들고앉아 발바닥에 성냥으로 딱총을 놔주었다.

월탄을 거쳐 오가산을 넘은 다음에는 화평, 흑수, 강계, 성간, 전천, 고인, 청운, 희천, 향산, 구장을 지나 개천에 이르러 거기서 기차를 타고 만경대로 나왔다.

개천에서부터 신안주까지는 협궤철도가 놓여있었는데 《니끼샤》라는 자그마한 영국제기관차가 끄는 경편렬차가 다니였다. 신안주에서 평양까지는 지금과 같은 광궤철도가 부설되여있었다. 그 당시 개천에서 평양까지의 차표값이 1원 90전이였다.

나는 그때 천리길을 걸으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번은 발이 너무 아파서 어떤 농민의 발구를 얻어탄 일이 있었다. 헤여질 때 값을 치르려고 돈을 내놓으니 농민은 받지 않고 오히려 그 돈으로 나에게 엿을 사주는것이였다.

제일 잊혀지지 않는 사람은 강계객주집 주인이다.

저녁늦게 강계시내에 도착하여 객주집에 들어갔더니 그가 대문밖까지 나와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것이였다. 하이칼라를 하고 조선바지저고리를 입은 키가 자그마한 사람이였는데 아주 사근사근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그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친 전보를 받고 나를 기다리고있었다는것이였다.

우리 아버지를 《김선생》, 《김선생》하면서 존경해온 이 객주집의 할머니도 나를 보자 4년전에 아버지를 따라 중강으로 들어갈 때는 조그마했는데 이렇게 컸구나 하면서 친손자라도 만난것처럼 기뻐하였다.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놓은 소갈비국도 끓이고 청어도 구워서 자기 집 아이들한테는 하나도 먹이지 않고 나한테만 주었다. 밤에는 새로 꾸민 이불도 내놓았다. 주인들이 그때 정말 나를 위해 있는 성의를 다했다.

나는 다음날 아침 강계우편국에 가서 아버지가 일러준대로 팔도구에 있는 부모님들에게 전보를 쳤다. 전보문 한자에 3전이였는데 여섯자가 넘으면 1전씩 더 받는다고 하여 전보용지에 《강계무사도착》이라는 여섯글자를 써넣었다.

이튿날 객주집주인은 나를 차에 태워보내려고 자동차사업소에 갔다왔다. 그는 차고장으로 열흘쯤 기다려야 할것 같다면서 신청은 해놓았으니 친척집에 온셈치고 그동안 자기 집에서 묵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진정이 고마왔지만 빨리 가야겠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짚신 두컬레를 주면서 개고개쪽으로 가는 달구지군까지 한사람 물색하여 붙여주는것이였다.

개천역앞에 있던 서선려관 주인도 마음씨가 고운 사람이였다.

나는 그 려관에 들자 15전짜리 밥을 청하였다. 려관밥도 등급이 있었는데 이 려관에서는 15전짜리가 제일 눅거리였다. 주인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나에게 50전짜리 밥을 주었다. 내가 돈이 없어서 50전짜리는 못먹겠다고 했더니 주인은 돈이 없어도 그냥 먹으라고 하였다.

밤이 되자 려관에서는 손님들에게 포단과 모포 두장씩을 내주고 50전정도 받았다. 수중에 있는 로비를 계산해보니 모포를 두장씩이나 덮고 호강할 형편이 못되였다. 그래서 나는 모포를 한장만 달라고 하였다. 주인은 이번에도 다른 손님들이 다 포단을 깔고 모포를 두장씩 덮고 자는데 너 혼자만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돈을 안내도 되니 마음놓고 받으라고 하였다.

조선사람들이 비록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가 되여 어렵게 살았지만 조상전래의 인정과 미풍량속만은 깨끗하게 간직하고있었다. 금세기초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는 무전려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집이나 마을에 찾아오는 나그네들이 돈을 내지 않아도 밥을 먹여주고 잠을 재워주는것이 조선의 풍속이였다. 이런 풍속에 대해서는 서양사람들도 몹시 부러워하였다. 나는 천리길을 걸으면서 조선민족이 참으로 선량하고 도덕적인 민족이라는것을 깊이 깨닫게 되였다.

서선려관 주인도 강계객주집 주인이나 중강려인숙 주인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사람이였다. 여덟살적에 중강으로 들어갈 때에도 느낀바이지만 아버지한테는 이처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친지들이 어디에 가나 있었다.

나는 우리 일가를 친혈육처럼 맞이하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저 많은 친구들을 언제 다 사귀였을가, 저런 동지들을 얻느라고 걸음인들 얼마나 많이 걸었을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사방에 친구들이 있으니 객지에 나서도 아버지는 이모저모로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도 그들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

천리길을 걸을 때의 인상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4년전까지 등잔불을 켜고 살던 강계시내에 전등불이 환한것이였다. 강계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왔다고 좋아하였지만 나는 왜색이 짙어가는 거리풍경을 보고 쓸쓸한 생각을 금할수 없었다.

조국에 나를 내보내면서 조선을 알아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한 아버지의 참뜻이 마음속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였다. 나는 그 뜻을 되새기면서 비운에 잠긴 조국의 모습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천리길이 조국을 알게 하고 우리 인민을 알게 해준 하나의 큰 학교였다.

팔도구를 떠난지 열나흘만인 1923년 3월 29일 해질무렵에 나는 마침내 고향집뜨락에 들어섰다.

아래방에서 물레질을 하던 할머니가 버선발로 마당에 뛰여나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구하고 함께 왔니?》

《무얼 타고 왔느냐?》

《아버지, 어머니는 다 잘 있느냐?》

할머니는 나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한꺼번에 많은것을 물었다.

방에서 멍석을 틀던 할아버지도 밖으로 뛰여나왔다.

할머니는 혼자서 걸어왔다는 나의 대답이 잘 믿어지지 않는지 《아니, 네가 정말 혼자서 왔단말이냐! 너의 아버지가 범보다 더한 사람이구나!》 하고 혀를 찼다.

그날은 온 집안이 모여앉아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루밤을 새웠다.

산천은 예나 다름없이 유정하고 아름다왔건만 마을의 구석구석에서 내비치고있는 가난의 자취는 이전보다 더 두드러져보이였다.

나는 만경대에 며칠간 머물러있다가 외할아버지가 교감으로 계시는 창덕학교 5학년에 편입되여 조국에서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때부터는 칠골외가에 가있으면서 학교를 다니였다.

당시의 외가는 사실 내가 얹혀살 형편이 못되였다. 외가에서는 그때 강진석외삼촌의 일로 시련을 겪고있었다. 외삼촌이 잡혀서 감옥살이를 시작한 후부터 경찰들의 감시와 성화가 심해진데다가 옥중에 있는 외삼촌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온 일가가 몹시 상심하고있었다. 외가의 살림살이 역시 타개죽이나 비지밥으로 그날그날을 겨우 연명해가는 형편이였다. 둘째외삼촌은 농사를 짓는것만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수가 없어 우차몰이까지 하면서 가까스로 생활고를 헤쳐나갔다.

그러나 외가에서는 내앞에서 가난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내가 학습에 열중할수 있도록 뒤받침을 잘해주었다. 나를 위해 안채의 웃방을 따로 내주고 거기에 남포등도 걸어주고 돗자리까지 깔아주었다. 내 동무들이 셋씩넷씩 무리를 지어 때없이 찾아들어도 탓하지 않았다.

창덕학교는 우리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칠골일대의 선각자들이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조류를 타고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세운 경향성이 좋은 사립학교였다.

구한국말기와 《한일합병》후 우리 나라에서는 구국투쟁의 일환으로 애국적인 교육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였다. 국권상실의 수치스러운 본원이 나라의 후진성에 있다는것을 눈물겹게 통감한 선각자들과 애국지사들은 교육이야말로 자강의 기초이고 근본이며 교육을 발달시키지 않고서는 나라의 독립도 사회의 근대화도 실현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깨닫고 도처에서 사립학교운동을 벌리였다.

이 운동의 앞장에는 안창호, 리동휘, 리승훈, 리상재, 유길준, 남궁억과 같은 애국적인 계몽운동자들이 서있었다. 각 지방에 조직되여있는 학회들도 교육운동을 힘있게 추진시키였다.

온 나라를 휩쓸고있던 교육문화운동의 열풍속에서 수천개의 사립학교들이 태여나 봉건의 구속에서 잠들고있던 이 나라의 지성에 불을 달아주었다. 공자, 맹자의 교리를 가르치던 서당들이 신식학문을 배워주는 학당이나 의숙으로 개편되여 후대들에게 애국의 정신으로 분발하라고 부르짖은것도 이무렵이였다.

민족주의운동의 지도자들은 례외없이 교육을 독립운동의 시발점으로 삼고 거기에 온갖 재력과 심혈을 다 기울이였다. 테로를 독립운동의 기본방책으로 틀어쥐고 리봉창,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들을 배후에서 끊임없이 조종해온 김구도 초기에는 황해도일대에서 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안중근도 남포지방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후대들을 가르친 선비였다.

서선지방에 설립된 사립학교들가운데서 유명한것은 안창호가 주관한 평양의 대성학교와 리승훈의 개인자금으로 세워진 정주의 오산학교였다. 이 학교들에서는 이름난 독립운동자들과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외할아버지는 창덕학교에서 안중근과 같은 인물이 한명만 나와도 영광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애국자가 되라고 하였다.

나는 안중근과 같은 유명한 렬사는 못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애국자가 되겠다고 대답하였다.

창덕학교는 서선지방의 사립학교들가운데서도 비교적 규모가 크고 현대화된 학교로서 학생수가 200명이상 되였다. 당시로서는 작은 학교가 아니였다. 학교가 하나 있으면 그것을 거점으로 주변인민들을 빨리 계몽시킬수 있었다. 그러므로 평양지방의 인민들과 유지들은 창덕학교를 매우 중시하였고 여러모로 이 학교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선행도 창덕학교에 거액의 자금을 희사하였다. 본명보다도 백과부라고 많이 불리운 그는 해방전에 평양에서 자선사업으로 이름이 높던 녀자이다. 스무살전에 과부가 된 그는 80고령이 될 때까지 수절하면서 한푼두푼 돈을 모아 부자가 되였다. 치부방법이 아주 대담하고 독특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였다. 오늘날의 승호리세멘트공장소속의 석회석광산부지도 한때는 백선행의 땅이였다고 한다. 그가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돌박산을 헐값으로 사두었다가 일본자본가들에게 본전의 몇십배가 되는 비싼 값으로 팔아넘긴것이 바로 오늘의 승호리세멘트공장에 속해있는 석회석광산부지라고 한다.

문서장 한장으로 국토를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넘긴 역신들에 대한 원성이 구천에 사무칠 때 수판알도 튀길줄 모르는 평범한 녀성이 장사속이 밝은 일본자본가들과의 거래에서 막대한 폭리를 얻어냈기때문에 사람들은 그 소문을 일종의 전승무훈담처럼 통쾌하게 들었다.

사람들이 백선행을 존경한것은 그가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많이 하였기때문이다. 수중에 돈이 많았지만 그는 부귀영화를 조금도 탐내지 않고 조반석죽의 수수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가 평생을 두고 저축해온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바치였다. 그 돈으로 다리도 놓고 공회당도 지었다. 백선행이 지은 평양공회당건물이 지금도 련광정앞에 원상그대로 남아있다.

공부를 시작한지 며칠 안되는 어느날 외할아버지는 내가 볼 5학년 교과서들을 가지고 왔다. 나는 한보따리나 되는 책들을 받아안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그 교과서들을 하나하나 펼쳐보았다. 그런데 《국어독본》이라는 교과서를 뒤적거리다가 그만 기분을 잡쳐버리고말았다. 그 책은 《국어독본》이라고 쓴 일본말책이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을 《황민화》하기 위하여 일본말사용을 강요하였다. 강점 첫 시기에 벌써 그들은 관공서와 재판소, 학교들에서 쓰는 공용어는 일본어로 한다는것을 선포하고 조선말을 못쓰게 하였다.

나는 외할아버지에게 일본말책을 왜 국어책이라고 하는가고 물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한숨만 쉬였다.

나는 손칼로 《국어독본》이라는 글자들가운데서 나라국자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날일자를 써넣었다. 《국어독본》이 순식간에 《일어독본》으로 되여버렸다. 일본의 동화정책에 엇서고싶은 저항심리가 나로 하여금 그런 용단을 내리게 하였다.

창덕학교에 며칠간 다녀보니 교실이나 길거리나 놀이터에서 일본말을 하는 아이들이 더러 보이였다. 어떤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일본말을 배워주기까지 하였다.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탓하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조선말도 영영 없어지는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나는 일본말을 익히느라고 애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조선사람은 응당 조선말을 해야 한다고 깨우쳐주었다.

내가 팔도구에서 조국에 나와 칠골에 간 그날 동리사람들은 시국이야기를 들으려고 우리 외가집에 모여왔다가 만주에서 몇해동안 살았으면 중국말을 잘하겠는데 한번 들어보자고 나에게 청을 하였다. 창덕학교 아이들도 중국말을 배워달라고 자꾸 성화를 먹이였다. 그러나 나는 좋은 제 나라 말이 있는데 무엇때문에 남의 나라 말을 하겠는가고 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매번 거절하군 하였다.

내가 조국에 나와서 중국말을 해본것은 단 한번뿐이였다.

하루는 둘째외삼촌이 나더러 성안구경을 가자고 하였다. 일에 몰려서 좀처럼 구경이라고는 다니지 않는분이였지만 그날은 나를 위해 모처럼 통시간을 냈다. 네가 오래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오늘은 나하고 같이 나가 점심이나 한끼 먹자고 하며 나를 데리고 평양성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시내를 한바퀴 돌고나서 점심을 먹으려고 서평양에 있는 중국료리점에 들리였다. 지금의 봉화산려관이 자리잡고있는 일대에는 그 당시 중국료리점들이 많았다.

료리점주인들은 매상고를 올리려고 문밖에까지 나와 《어서 오시오.》, 《어서 오시오.》 하면서 친절하게 손님들을 맞아들이였다. 그들은 돈을 벌려고 경쟁적으로 손님들을 끌었다.

우리가 들어간 료리점주인은 서투른 조선말로 무슨 음식을 잡숫겠는가고 물었다.

나는 주인이 알아듣기 쉽게 중국말로 호떡을 두그릇 달라고 하였다.

주인은 눈이 둥그래서 나를 쳐다보더니 혹시 중국학생이 아닌가고 물었다.

나는 중국학생은 아닌데 몇해동안 만주에 가서 산 덕으로 그럭저럭 중국말을 좀 한다고 하면서 중어로 얼마간 대화를 하였다.

료리점주인은 어쩌면 어린 나이에 중국말에 그처럼 능통한가고 하면서 몹시 반가와하였다. 만주에서 살다가 온 학생을 만나니 조국생각이 난다고 하면서 눈물까지 지었다.

그리고는 호떡과 함께 청하지도 않은 음식까지 식탁에 차려놓고 많이 들라고 하였다. 우리는 사양하다못해 주인이 차려놓은 음식을 다 먹었다. 식사를 끝낸 다음 음식값을 치르려고 돈을 내놓았더니 주인은 호떡값조차 받지 않았다.

외삼촌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늘은 내가 한턱 내려고 너를 성안으로 데리고 갔는데 도리여 네 덕을 입었구나 하면서 크게 웃었다. 이 소문이 외삼촌을 통해 동네에 퍼졌다.

나는 희망대로 강량욱선생이 담임한 학급에 편입되였다.

내가 칠골에 간것은 강량욱선생이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창덕학교에 취직한지 얼마 안되는 때였다. 선생은 학비를 댈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하였다.

가난이 오죽 심했으면 선생의 부인(송석정)이 시집을 버리고 한동안 친정에 가있었겠는가. 부인의 부모들이 네가 인덕이 모자라 조강지처는 되지 못할지언정 가난에 진저리가 나서 지아비를 버리다니 그게 될말이냐, 조선사람치고 그만큼 가난하지 않은 집이 몇집이나 된다더냐, 그래, 시집을 가면 금방석에 앉아서 꿀물에 옥밥이라도 말아먹을줄 알았더냐, 일언이페지하고 당장 돌아가서 사죄하라고 엄하게 질책하여 부인을 시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니 강량욱선생의 가세가 어느 정도였는가가 긴 설명이 없이도 짐작이 가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선생의 부인을 《숙천아지미》라고 불렀다. 부인의 고향이 평안남도 숙천이였다. 내가 가면 《숙천아지미》는 매번 비지밥을 해주군 하였다. 그 비지밥이 참으로 별맛이였다.

해방직후 나는 강량욱선생의 생일을 축하하러 갔다가 부인과 함께 창덕학교시절의 비지밥을 회상한적이 있었다.

《사모님, 나는 지금도 칠골에서 사모님이 해주시던 비지밥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때 그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20여년동안 타향살이를 하느라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오늘은 그 인사를 받아주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부인은 《가난때문에 쌀밥 한끼 변변히 대접 못하고 비지밥만 해드렸는데 감사하다고만 하시니 도리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비지밥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그리고는 창덕학교시절에 장군님대접을 소홀히 한 봉창을 해드린다고 하면서 손수 지은 음식들을 차려주었다.

어느해인가 그 부인이 내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백화주》라는 자작술까지 보내주었다. 《백화주》란 백가지 꽃으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그 운치있는 이름때문에 류다른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나는 가볍게 잔을 들지 못하였다. 쌀밥 한끼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늘 시장기와 싸우던 부인의 지난날이 눈앞에 삼삼해서 좀처럼 잔을 들어올릴수가 없었다.

나라없는 민족의 슬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체험한 나에게는 고향에 있는 한대의 나무, 한포기의 풀, 한이삭의 곡식이 이전보다 몇갑절 더 소중해보였다. 그런데다가 강량욱선생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부단히 고취하였으므로 나는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일상적으로 애국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였다. 그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원족이나 수학려행 같은것을 많이 조직해주었다.

그때 있은 여러가지 일들중에서도 황해도 정방산수학려행이 매우 인상깊다.

해방후 강량욱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과 공화국부주석으로 일하면서 나와 사업상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 우리는 창덕학교시절의 수학려행에 대하여, 우리가 본 정방산의 성불사와 남문루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상하군 하였다.

창덕학교시절의 추억가운데서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것은 강량욱선생의 창가수업이다. 창가시간은 우리가 제일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는 인기시간의 하나였다.

선생은 전문가들을 무색케 할만 한 희한한 고음성대를 가지고있었다. 그런 성대를 가지고 선생이 《전진가》나 《소년애국가》와 같은 노래를 부를 때면 온 교실이 숨을 죽이고 그 노래를 감상하군 하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이 배워준 창가의 선률들이 우리의 가슴에 애국적인 정서를 많이 부어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후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도 창덕학교시절에 배운 노래를 종종 부르군 하였다. 그 시절에 배운 노래들은 지금도 가사와 선률이 그대로 고스란히 머리속에 남아있다.

조국에 돌아와보니 고향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어렵게 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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