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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코레아뉴스 | 김일성 주석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4 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1. 손정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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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5-23 09:2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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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 회고록 제2권 제 4 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1. 손정도목사



제 4 장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1. 손정도목사 

 

나는 만주의 정세가 매우 험악한 때에 감옥에서 석방되였다.

반일독서회사건으로 온 도시가 발칵 뒤집히던 1929년의 가을처럼 길림의 거리에는 계엄상태를 방불케 하는 긴장된 분위기가 떠돌고있었다. 도로교차점들과 관청건물의 주변에서는 독군서의 헌병들이 통행인들을 세워놓고 검문검색을 하고있었다. 총대를 들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가택수색을 하는 군경들도 보이였다.

리립삼의 좌경로선때문에 온 만주땅이 진통을 겪고있던 시기여서 공기가 이만저만 살벌하지 않았다. 그때 만주지방에서는 5.30폭동이 한창 벌어지고있었다.

우리 나라 력사가들속에서 5.30폭동이라고 불리워지고있는 이 투쟁을 중국사람들은 《적색5월투쟁》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투쟁을 5.30폭동이라고 하는것은 그것이 상해에서의 5.30참살 5돐에 즈음하여 벌어진 투쟁이고 또 5월 30일에 그 투쟁이 절정을 이루었기때문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지도권을 잡고있던 리립삼은 1925년 5월에 있은 상해시민들의 영웅적투쟁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로동자, 학생, 시민 3파가 파업을 일으키는 동시에 폭동형식의 투쟁을 전개하여 쏘베트유격대를 창설할것을 전당에 지시하였다.

이 로선이 내려오자 만주성위산하의 혁명조직들은 리립삼이 제창한 《한개 성 또는 수개 성의 우선적승리》라는 구호를 들고 군중을 동원하여 도처에서 돌격식집회를 소집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동만의 거리와 농촌들에는 폭동을 선동하는 삐라와 격문들이 나붙었다.

5.30폭동의 시작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들의 공세는 전례없이 강화되였다.

그 파동이 벌써 길림에까지 미쳐오고있었다.

감옥을 나와 내가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마항에 있는 손정도목사의 집이였다. 일곱달동안 꾸준히 옥바라지를 해온 손정도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것이 도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손정도목사는 자기 자식이 감옥에 있다가 나온것처럼 기뻐하면서 나를 맞아주었다.

군벌이 자네를 일본놈들에게 넘겨줄가봐 우리는 은근히 마음을 조이였네. 형을 지지 않고 무사히 풀려나왔으니 천만다행일세.》

《목사님께서 후원을 잘해주신 덕에 저는 감옥생활을 한결 헐하게 했습니다. 저때문에 옥리들에게 돈도 많이 찔러주셨다는데 그 신세를 무엇으로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혜를 일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목사는 그때 중국관내로 갈 준비를 하고있었다.

나는 손정도목사에게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길림에서 떠날 생각을 하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손목사는 한숨을 쉬고나서 서글프게 웃었다.

《장작상까지 맥을 추지 못하니 이제는 이 길림바닥에서 우리를 비호하고 후원해줄 힘도 바랄수 없게 되였네. 장작상이 조선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일본군대가 쳐들어와도 야단이야. 3부가 통합되면 독립운동도 날개달린 룡마가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룡마는커녕 집안싸움으로 평온한 날이 없으니 이 고장에 더 버티고있을 생각도 나지 않네.》

관내에는 그가 상해림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직을 력임할 때 가깝게 지내던 인사들도 있었고 흥사단시절의 단우들도 있었다. 손정도가 관내로 들어가려고 결심한것은 그런 사람들과 다시 련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투신해보려는 동기에서 출발하지 않았겠는가고 생각된다.

손정도목사는 일제의 만주침공이 시간문제로 되고있는것 같은데 성주는 장차 어떻게 할 작정인가고 물었다.

《저야 다른 길이 있습니까. 군대를 크게 조직해가지고 일제놈들과 결판을 내자고 합니다.》

내가 이런 대답을 하자 손목사는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총으로 일본과 맞서보겠다는건가?》

 《그렇습니다. 그 길밖에야 다른 출로가 없지 않습니까.》

 《일본이 세계 5대강국의 하나라는걸 명심하라구. 의병이나 독립군도 일본의 신식무장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주저앉았네. 하지만 이왕지사 결심을 했으면 판을 크게 벌려보게.》

나는 내가 길림에 발을 붙인 초기보다 별로 어수선하고 썰렁해보이는 목사의 집안풍경을 살펴보면서 서글픈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전에는 이 집에서 축음기소리도 들리고 시국을 론하는 독립운동자들의 활기에 찬 목소리도 들리였다. 손목사를 찾아오는 신자들의 경건한 모습도 볼수 있었으며 소년회원들이 부르는 《바람아 불지 말아》라는 구슬픈 노래가락도 들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였다. 목사의 주변에서 맴돌던 이 집의 단골손님들은 모두 류하로, 흥경으로, 상해로, 베이징으로 종적을 감추고 《황성옛터》와 《방랑가》를 애달프게 부르던 축음기도 입을 다물어버리였다.

손정도목사자신도 그후 얼마동안은 베이징에 가있었다. 베이징은 상해림시정부 초창기 목사와 뜻을 같이하던 이름난 력사가이며 문장가인 단재 신채호가 활동하던 고장이였다. 그곳에는 신채호외에도 손정도선생의 동지들이 많았다.

목사가 베이징에 갔을 때는 단재가 동방련맹과의 사업을 위해 대만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여 려순감옥으로 끌려간 뒤였다. 신채호가 없는 베이징은 그지없이 고적하고 한산스러워보이였다. 목사와 단재는 그처럼 큰 우정으로 튼튼히 얽혀져있었던것이다.

신채호는 후대들에게 우리 민족의 유구한 애국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소개하고 조국애를 고취할 일념밑에 국사서술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한동안 출판활동에도 열정을 쏟아부었다. 《해조신문》은 그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찍어낸 인기있는 신문이였다. 박소심이 《해조신문》에 론문을 종종 써보낸것도 그것을 주관하고있던 신채호의 이름이 교포사회에 널리 알려져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문장을 숭배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로선상으로 보면 신채호는 무력항쟁의 제창자였다. 그는 리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을 다같이 현실성없는 위험한 로선이라고 보았으며 조선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강도가 한편이 되여 네가 망하지 않으면 내가 망하게 된 정황에서 우리 2천만 민중은 하나가 되여 폭력파괴의 길로 나가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일부 인사들이 리승만을 상해림시정부 수반으로 내세웠을 때 신채호가 분격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해나선것도 평소부터 리승만의 위임통치론과 자치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왔기때문이였다.

 《리승만은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리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리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것은 그가 림시정부를 조각하는 자리에서 폭탄같이 내던진 유명한 말이다. 그는 림시정부를 탈퇴한 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서도 리승만을 호되게 비판하였다.

손정도목사는 이따금씩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신채호는 성미가 면도날같고 주장이 무쇠쪽같은 사람이였다. 그가 리승만을 리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탄핵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통쾌감을 금할수 없었다. 신채호의 말은 민심을 대변한것이였다. 단재의 심정이자 내 심정이였다. 그래서 나는 신채호와 함께 림정을 결별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런 발언을 참고해보면 손목사의 정견을 어느 정도 가늠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치론도 위임통치론도 다같이 망상이라고 단정한 사람이였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대해서는 반신반의의 립장을 취하였으며 대중을 동원하여 거족적인 항쟁으로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우리의 전민항쟁론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지지하였다. 이런 혁신적립장은 그로 하여금 리승만과 같은 사대주의자, 야심가가 수반으로 군림하고있는 상해림시정부에서 각원으로 남아있을 필요를 더는 느끼지 않게 하였으며 결국은 림정과 결별하고 길림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용단을 내리게 하였던것이다.

손목사는 길림에 온 후 일본경찰들이 《제3세력》이라고 규정한 혁신파인물들과 련계를 가지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새 세대의 청년들과도 잘 어울리였으며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성의를 다하여 후원해주었다. 그가 교직을 차지하고있는 대동문밖의 례배당은 우리의 전용집회장소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례배당에 자주 찾아가 풍금도 타고 연예선전대의 활동도 지도하였다. 손정도목사가 우리가 요구하는것이면 무엇이건 다 해결해주고 우리의 혁명활동을 충심으로부터 지지해주었기때문에 나는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하였다.

손정도목사도 나를 친자식처럼 사랑해주었다. 내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있을 때 장작상에게 뢰물을 먹이면서 나를 석방시키기 위한 청원운동을 이끌고나간 주동인물도 바로 손목사였다.

손목사는 나를 친구의 자식으로뿐아니라 일가견을 가진 혁명가로 대해주었다. 그는 독립운동자들속에서 론의의 대상이 되여 해결을 보지 못하는 어려운 가정문제까지도 내앞에 서슴없이 털어놓고 조언을 요구하였다.

그 당시 손목사는 맏딸 손진실과 윤치창과의 혼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길림의 독립운동자들은 누구나 그 혼사를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손목사자신도 딸이 배우자를 잘못 선택하였다고 못마땅해하였다. 그는 딸이 윤치창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가문망신을 시킨다고 생각하였다. 윤치창은 친일파이며 매판자본가인 윤치호의 동생이였다. 목사가 딸을 설복하지 못해 속을 썩이고있을 때 독립군보수파들이 윤치창에게서 자금을 뽑아내려고 한주일동안 그를 억류하였다.

 《이 사람,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손정도목사는 내 의향을 물었다. 나는 어른들의 혼사에 간참하는것이 주제넘는 일 같아서 얼마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저희들끼리 눈이 맞아서 련애를 하는데 떼놓을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본인들의 의향에 맡기는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조언을 준 다음 독립군보수파인물들을 설복하여 윤치창을 놓아주도록 하였다.

손정도목사는 베이징에 갔다가 그 다음해인가 길림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것이 오인화, 고원암과 같은 혁신계인물들의 요청에 의한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어느 정도의 진실성을 띠고있는 판단인지는 알수 없다. 여하간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길림에 머물러있은것을 보면 베이징방면의 독립운동상황도 락관적이 못되였고 그의 건강상태도 그닥 좋지 않았던것 같다.

감옥에서 나와 손정도목사를 만났을 때 그가 내 얼굴이 축갔다고 념려해주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의 얼굴에 배여있는 병색을 보고 걱정하였다. 그는 고질로 되고있는 병이 도져 식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몸까지 병들고보니 주야장탄일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아버지도 나한테는 복을 내려주시지 않는구만. 그놈의 류배살이덕을 단단히 보는셈이지.》

손정도목사의 말이였다. 목사는 1912년에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벌리던중 가쯔라 다로암살음모의 혐의로 체포되여 진도에서 2년동안 류배살이를 한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에 목사는 류배지에서 병을 얻은것 같았다. 미신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군중이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병마도 쉽게 침범하였다.

나는 이듬해 봄에 명월구에서 손정도목사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손목사가 길림 동양병원에서 비명에 작고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랑설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로서는 목사가 병으로 급사하였다는 말을 믿을수가 없었다. 반년전에 만났을 때에도 침상에 눕지 않고 독립운동의 장래를 론하던 사람이 위궤양때문에 초불처럼 그렇게 쉽사리 꺼질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사실이였다. 지하조직선을 통해 알아본데 의하면 목사는 입원 첫날에 벌써 입으로 피를 토하고 그 자리에서 운명하였다는것이였다.

당시의 교포사회에는 손목사의 죽음을 모살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것을 모살로 보는 첫번째 론거는 입원직전의 손목사의 병세가 생명을 좌지우지할만 한 정도의 위험계선에 도달하지 않았다는것이다. 동양병원이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병원이라는것도 역시 다른 하나의 유력한 론거였다. 조선사람들을 세균전실험대상으로 삼는것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족속들이니 모살이 아니라 그보다 더 흉악한 음모도 꾸밀수 있다는것이 교포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가장 확실한 론거는 손정도목사가 이름난 애국지사라는데 있었다. 손목사는 일본경찰들이 한시도 감시를 늦추지 않고있던 요시찰인이였다. 가쯔라 다로의 암살혐의도 혐의지만 상해림시정부 의정원 의장, 림정교통총장, 시사책진회 성원, 흥사단 단원, 로병회 리사라는 항일로 일관된 목사의 경력은 일본경찰들로 하여금 그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일본인들이 손정도목사를 얼마나 집요하게 주시해왔는가 하는것은 목사가 급사한 직후 길림총령사가 자기네 외무대신에게 《불령선인 손정도의 사망에 관한 건》이라는 문건을 특별히 작성하여 발송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해석(바다의 돌)이라는 손정도목사의 호에 그의 특징이 그대로 다 반영되여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교직자의 간판을 가지고 한생을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량심적인 독립운동자였다. 손목사는 길림에 와서도 정의부의 혁신계인물들과 함께 시대의 변천에 순응하는 독립운동의 방향전환과 애국력량의 단합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우리가 조선인길림소년회와 조선인류길학우회를 조직하던 그무렵에는 만주농민호조사결성 발기인이 되여 그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손정도목사는 동생(손경도)의 명의로 액목현의 경박호일대에 50향의 땅을 사서 농업공사도 경영하였다.

안창호가 제창한 《리상촌》의 일각이라고도 말할수 있을것이다. 경박호반은 안창호선생이 한때 제일 눈독을 들이였던 리상향건설의 후보지였다. 목사는 농업공사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손정도목사의 장례는 봉천회관에서 기독교식으로 엄숙히 거행되였다. 합방이전부터 수십년의 풍상을 독립항쟁에 바쳐온 목사의 령전에는 일본경찰의 방해로 인하여 40명 남짓한 조객들만 모였다고 한다. 생전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속에 에워싸여 애국의 혼으로 그들을 열심히 교화시키던 목사일진대 고인과의 작별은 너무나도 조용하고 쓸쓸한것이였다. 국부가 죽어도 마음대로 울지 못하는 세상이였으니 경찰이 립회하는 식장에서 눈물인들 제대로 흘리며 통곡인들 제대로 하였겠는가.

나는 멀리 길림쪽 하늘을 향하여 눈물을 하염없이 뿌리며 간도땅에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손목사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슬프게 울었다. 이 나라 아버지들의 영령을 지키고 원한을 씻기 위해 기어이 나라를 찾고야말리라는 맹세를 굳게 다지였다.

나는 나라를 찾는 길이야말로 은인들의 신세를 갚는 길이고 그들의 불행을 덜어주는 길이며 인민의 손과 발에서 쇠고랑을 벗겨주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후 나와 손정도목사의 유가족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현세기가 다 가는 오늘까지도 가셔지지 않고있는 분단의 비극은 우리를 철조망과 콩크리트장벽과 파도사나운 대양으로 사정없이 갈라놓고있다. 나는 평양에, 손인실은 서울에, 손원태는 오마하(미국)에, 우리는 반세기이상이나 서로 안부조차 전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손정도목사와 그의 유가족들을 잊은적이 없다. 그들에 대한 추억은 시간과 공간의 끊임없는 교차속에서도 풍화되거나 덞어지지 않고 내 마음속에서 세월과 함께 련면히 이어져왔다.

민족의 비극이 심화되고 우리를 갈라놓고있는 장벽이 높아질수록 이 땅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이 나라를 위해 선혈을 뿌리던 은인들과 렬사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 절절하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력사는 그 그리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1991년 5월 미국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시에서 병리학의사로 일하던 손정도목사의 막내아들 손원태가 우리 해외동포영접부의 초청으로 부인(리유신)과 함께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다. 송화강모래터에서 소년회원들과 류길학우회원들이 《땅》편과 《바다》편으로 갈라져서 군사놀이를 할 때 매번 내가 속한 편에 들겠다고 싱갱이질을 하던 십대의 연약한 소학생 손원태는 생일 여든돐을 앞둔 백발로인이 되여 내앞에 나타났다. 60풍상의 지꿎은 장난도 그의 백발밑에 뚜렷이 새겨진 길림시절의 흔적을 지워버릴수 없었다.

《주석님!》 하고 부르며 나를 얼싸안는 손원태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리고있었다. 수만마디의 언어가 집약되여있는 눈물, 참으로 많은 사연을 담고있는 눈물이였다. 허구한 세월 그리움으로 가슴을 에이면서도 우리는 어찌하여 백발이 다되여서야 만나게 되였는가. 무엇이 우리의 해후를 반세기이상이나 끌어오게 하였던가.

60년이란 인간의 옹근 한생에 맞먹는 장구한 시간이다. 음속보다 더 빠른 속도를 가진 비행기들이 하늘을 씽씽 날고있는 문명시대에 십대에 헤여졌던 사람들이 80이 다되여 만난다면 우리를 로년기에로 끊임없이 떠밀어온 그 시간의 루적은 너무나도 무정하고 공허한것이 아닌가.

《손선생은 어떻게 되여 머리가 그렇게 세였습니까?》

나는 지난날의 소년회원이 아니라 미국시민권을 가지고있는 로학자를 대하는 공식적인 말투로 손원태에게 물었다.

손원태는 길림시절에 그랬던것처럼 약간 응석기가 비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김주석님을 만나뵙고싶어 마음을 쓰다보니 그렇게 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길림시절에 김주석님을 형님처럼 따르고 주석님도 자기를 동생처럼 사랑해왔는데 제발 선생이라는 호칭만은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 옛날식으로 원태라고 합시다.》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서먹서먹하던 감정은 순간에 사라졌다. 우리는 흡사 길림시절로 되돌아간듯 한 기분이였다. 나는 평양의 응접실이 아니라 길림의 옛 하숙집에서 손원태를 만나는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길림시절에는 나도 손목사네 집에 자주 찾아갔고 손원태도 내가 하숙하는 집에 뻔질나게 찾아왔다.

차광수처럼 목을 늘 한쪽옆으로 기울이고 다니던 체소하고 과묵한 소년, 그러나 일단 입을 열기만 하면 기지가 번쩍이는 롱과 유모아를 련발하여 상대방의 웃음을 자아내군 하던 제4성립학교 소학생 손원태, 그가 병리학의사가 되였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백발로인이 되였다는것도 놀라운 일이였다. 새삼스럽게 머리를 잡아휘두르는 격세지감, 길림에서 헤여진것이 어제 같은데 그처럼 다감하던 소년시절은 어디로 가고 우리는 이렇게 로인이 되여 그 시절을 옛말처럼 이야기하고있는것인가.

나는 손원태와 함께 길림에서 보낸 나날들을 끝없이 회상하였다. 소년회와 관련한 생활은 두말할것도 없고 거리바닥에서 코흘리개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던 개눈깔사탕장사까지도 우리의 화제거리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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