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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코리아뉴스 | 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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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12 04:3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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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홍갑표 <민족정기구현회전 회장

  

 

들어가며

 

나는 세균전의 희생자다.

 

얼마 전 케블 티비 히스토리 체널에서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에 대하여 집중 방영하였다시청을 하다 보니까 그 시기가 바로 내가 염병(장티브스?)에 걸려서 사경 한 달을 견디고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고 같은 병으로 이웃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와 일치하였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균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특히 극비리에 세균을 전단에 섞어 뿌렸다는 비행사의 증언도 있었다.

 

또 일본군이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내용도 히스토리 체널은 언급하고 있었다.

악명 높은 731 이시이 부대는 숱한 한국인과 중국인을 생체실험 대상인 '마루타해부를 통하여 세균 무기를 개발했으며 패전 이후 여기에 종사했던 자들이 미 점령군에 그대로 영입되어 미국의 세균 무기 개발에 참여했으며 이들의 일부가 미 군속으로 위장하여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시이 부대 소속 대원들은 전범 재판은 커녕 미국의 비호 아래 한국전 특수로 일본 혈액사업을 벌여 떼돈을 벌었고 일본 굴지의 제약회사로 발전했다.

 

또 뒤에 실은 韓國戰爭資料叢書(63-67)(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미국 정부의 공문서로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미국무부가 작성하였거나 국무부에 접수된 다른 행정부서 및 재외공관개인전문가비평가들의 문서들을 집약한 것인데 이 글의 요약 부분을 읽고 내가 세균전의 피해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동네 사람들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지금도 당시의 상황을 잘 아는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생존하며 비록 이사를 갔다하더라도 거의 다 연락이 되고 있다.

 

아직도 미국이 세균전을 부인하고 은폐하려 한다면 이는 양의 꺼풀을 쓴 이리떼와 뭐가 다르랴.

 

당시 내가 머물렀던 곳은 둘째 누님 댁이 있는 현 경기도 양주시 회천 행정동 관할 봉양 법정동으로서, 2km 쯤 떨어져 있는 현 회천행정동 관활 덕정 법정동인 당시 회천면 '덕정리 원잠동(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을 그냥 두고 누님 댁인 그 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곳이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기 좋은 철도 정거장과 면 소재지에서 떨어져 있고 들을 앞으로 둔 산록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동네는 조선 전기 이태조와 관련하여 국내 최대의 명찰인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과 북으로 이어지는 칠봉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내 초등학교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고난과 아름다움의 기억이 함께 깃든 곳이기도 하다.

 

내가 디지털 말에 2002년 6월 20일과 7월 1일에 색션에 선택된 '나의 6.25전쟁 체험기'(1)(2)의 필요부분만을 다시 게재하여 당시의 상황에 이해를 보태고자 한다.

 

이 글을 읽음으로써 내가 꾸며낸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또 자료를 첨부하고 내가 세균전의 희생자임을 반세기가 넘은 지금 발표하게 된 기회를 디지털 말을 통하여 알리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1

 

1950년 6월 25일 새벽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어머니 조국의 허리가 톱질 당하며 낭자한 피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의정부 아래 덕정리에 살고 있던 나는 아버지를 백 일만에 여윈당시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다.

누나는 영등포 공장에 가고어머니는 큰 누님 해산 차 서울 가시고 둘째 누님은 거리가 떨어진 칠봉산 밑에 살고 계셨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없어졌지만 봉우재(봉화재-지금은 밀어버려 없어지고 그 곳에는 봉우 아파트가 서 있다)는 제법 높아서 일대를 보기에 좋은 전망대였다.

 

사람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이곳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생전 처음 듣는 포성과 저 건너 구덕정 신작로를 타고 길게 나타난 피난민의 행렬을 보고 있었다.

 

'난리가 났다!'

나는 혼자라는 공포에 질렸다외가는 등 너머 있었다외가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간다는 말도 없이 일찌감치 장롱 속 어머님이 두고 가신 몇 푼의 돈을 티셔츠 윗 주머니에 챙기고 초가 삼간을 뒤로 철길을 따라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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