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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5-03 11:1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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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반도 개입 역사①


1. 미국의 19세기 한반도 개입 역사

권 오 창 진보당 고문 : 자주시보 5월 3일 서울 

1. 미국의 19세기 한반도 개입 역사

 

주한미군의 본격적인 한반도 진주는 1950년 9월 8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미 미국은 19세기 중엽부터 한반도 개입의 야욕을 실현하고 있었다. 

 

미국은 영국인이 청교도라는 허울을 쓰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며 원주민인 인디언을 모두 죽이고 산자는 노예로 팔아먹고 세운 나라다. 

 

미국은 1776년 독립선언 이후 침략의 야욕을 전 세계적으로 뻗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미 1830년대부터 아시아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1834년 5월 당시 미 국무부 극동지역 특명전권공사 에드먼드 로버츠(Edmund Roberts, 1784~1836)는 국무장관에게 일본과 통상조약의 길을 열게 되면 장차 조선과도 교역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 일이 있다. 

 

1845년 2월 12일 미 의회 하원의원 자독 프랫(Zadock Pratt, 1790~1871)은 국회에서 조선 개방안을 제출한 일이 있다. 

 

그 후 미국은 독립선언 후 77년 만에 벌써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점령하였고 1858년에 중국과 톈진조약을 맺었고, 1860년에 베이징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남부와 중부시장을 차지하였다. 

 

1865~1866년 사이에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렀는데 이 시기 미국은 북부 중국과 동북아시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에 대하여 눈독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중국, 러시아와 국토가 잇닿아 있는 관계로 조선을 그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덜레스(Foster Rhea Dulles, 1900~1970)가 쓴 『태평양에서의 아메리카: 확장의 세기』(America in the Pacific, a century of expansion: Houghton, 1932.)란 책에서 식민지 영토로서 한반도를 지명하였고, 1860년대 러시아 주재 미국 공사로 있었던 클레이(John Randolph Clay, 1808~1885)가 자기 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장차 미국이 침략의 기초를 닦기 위해서는 미 육군과 해군이 튼튼히 의거할 수 있는 아시아대륙에 미국이 기지를 창립해야 한다. 그러한 곳으로는 지브롤터와 같은 의의가 있는 조선 해안 거문도를 우선 점령해야 한다”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이처럼 미국은 한반도를 통상 국가로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국의 침략기지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미국은 1866년 셔먼호사건을 저지르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2,300여 명이라는 대부대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침범하다가 참패를 당한 일이 있고, 일본을 돌격대로 내세워 1875년에 운양호사건(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이 사건을 구실로 1876년 2월에 조선왕조와 일본 사이에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데 배후 조종을 하였다.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고 한다. 그러니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조선의 통치자들을 기만하여 1882년 5월에 매국적인 14개 조로 되어있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불평등조약은 오늘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과 같이 미국인이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 사람의 생명과 재산에 손해를 입혔을 때 조선법률로는 다스릴 수가 없고 오직 미국법률에 의해서만 처벌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로부터 얼마 후 1905년 7월에 소위 태프트-가쓰라(Taft-桂) 밀약을 일본과 체결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을 집어먹는 것을 미국이 용인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필리핀을 집어먹는 것을 일본이 용인해 준다는 일본의 가쓰라 다로(桂 太郎, 1848~1913) 총리와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 국방부 장관과의 밀약이었다.

 

이 비밀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4개월 후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에 한일병탄이 되었다.

 

이러한 비밀 협약을 우리 민족은 체결된 지 20년 후인 1924년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미국의 한반도 지배는 처음부터 계획적이고도 음흉한 수법으로 이루어졌다.

 

애초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는 종교활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공식 허가를 통하여 미국은 선교사들을 조선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에 선교사 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은 광혜원이라는 서양병원을 차려 의사 진료를 하였고, 1866년에는 스크랜튼(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1909) 신부가 이화학당을 세우고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는 배재학당을 세웠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연희학당을 세웠다.

 

언더우드 부인(Lillias Sterling Horton Underwood, 1851~1921)은 민씨 황후의 주치의가 되었고 언더우드 자신은 성경간행위원장을 맡아 기독교 선교의 지도역할을 하였다.

 

그 후 박헌영의 간첩 활동도 언더우드와의 친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미국은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를 통해 조선을 침략하기에 벽이 너무 두꺼운 것을 느끼고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하여 일본이 침략하게 하고, 그동안에 선교활동을 통하여 미국이 침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은 다음에 기회를 보는 장기적 전략에 따라서 조선에 침투하였다.

 

일제강점기 미국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시킨 것은 그 전략의 일환이었다. 

 

1923년 요시카와 분타로(吉川文太郞)가 쓴 『조선의 제종교』(朝鮮諸宗敎: 조선흥문회)라는 책에는 미국 장로교가 세계 각국에 파견한 선교사 총수 가운데 그 3분의 1이 조선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의 조선 강점과 미국의 종교문화 침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가운데 일제가 패망하자 바로 미국이 일제의 뒤를 이어 일본과 공모·결탁하여 한국을 점령한 것이다.

 

교회가 세계에서 우리 한국에 제일 많다고 하는데 이것이 다 미국의 침략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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