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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5-27 08:3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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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우크라이나와 나치관계


강호석 기자 민플러스 5월 26일 서울  


우크라이나 전장에 나타난 나치의 학살 만행을 아직도 믿지 않는 분들을 위해

 

우크라이나 전장에 나타난 아조프 연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네오() 나치의 실체도 서서히 드러난다.

 

알려진 대로 아조프 연대가 정말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의 잔당이란 말인가?

 

아조프 연대가 우크라이나 국가방위대 소속이라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친나치 세력일까?

 

그렇다면 “8년간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정권으로부터 학대와 학살을 겪어온 사람들을 보호하고 비나치화를 달성하는 것이 러시아 군대의 목표라던 푸틴 대통령의 주장이 옳단 말인가?

 

 

아조프 연대의 실체

 

돈바스 전쟁이 한창이던 20145, 네오나치가 창설한 테러집단 아조프 대대는 같은해 11월 우크라이나 정규군에 편입된다. 이후 20151월 우크라이나 국가방위대 소속 특수부대 아조프 연대로 승격한다.

 

아조프 연대는 나치독일을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와 이를 변형한 ‘Z’문양의 깃발을 들고 다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자 조직’(OUN-B)을 창설해 유대인을 학살한 대표적인 나치스트 스테판 반데라를 추종한다.

 

아조프 연대 창시자인 안드레 빌레츠키는 우크라이나 국가의 목표는 전 세계 백인을 이끌고 유대인이 이끄는 열등한 인종들에 맞서 마지막 십자군 원정을 벌이는 것이다.”라고 말해 자신들이 네오나치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더우기 아조프 연대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돈바스 지역 주민들을 미개한 슬라브족이라며 학살 만행을 자행했다.

 

국제앰네스티의 보고서에 따르면, 무장한 우익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그룹(아조프 연대)2014년 돈바스 지역에서 납치, 불법 구금, 학대, 절도, 갈취, 처형 등 광범위한 학살에 연루되어 있다라고 전했다.

 

뉴욕 타임즈는 우크라이나 군대의 공격으로 20144월 중순부터 7월까지 민간인 799명이 숨지고 최소 2,15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영국 BBC는 유엔 관리의 말을 인용해 우크라이나 동부(돈바스 지역)에서 갈등이 고조되면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떠났고, 최소 814천 명이 러시아로 갔다라고 보도했다.

 

80% 이상의 난민들이 러시아로 갔다는 것은 누가 돈바스 민간인들을 학살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2016년 돈바스 지역 민간인 건물에 병력을 배치하고 주민들을 약탈하던 아조프 연대가 수감자들을 강간하고 고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일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규군이던 아조프 연대를 미군이 직접 훈련을 시킨 사실이 알려져 네오나치를 지원한다는 비난이 일자, 2017년 미 의회는 아조프 연대 훈련 예산을 끊어 버린 일도 있었다. ☞관련기사 보기

 

이처럼 아조프 연대를 네오나치라며 비난하던 미국과 서방 언론이 20222월 돌연 아조프 연대를 정의의 군대로 둔갑시켰다.

 

이런 변화는 페이스북의 게시물 검열에도 드러난다.

 

2016년 페이스북은 아조프 연대를 위험조직으로 지정했고, 2019년엔 미국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와 같이 그들에 대한 칭찬이나 지지를 금지해버리더니, 2022년에 들어서는 갑자기 우크라이나 정규군의 일부로서 아조프 연대를 지지할 수 있다라며 금지령을 풀었다.

 

아조프 연대가 우크라이나 정규군에 편입된 시점이 20145월이었다는 사실을 페이스북이 모를 리 없다.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의 역사

 

우크라이나에 나치의 출현은 1929년 독일 나치당의 후원으로 결성된 OUN(창설자: 스테판 반데라)에 뿌리를 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OUN 조직원들은 나치 침공군의 일원이었으며, 나치가 우크라이나 서부를 점령했을 때 OUN은 민병대를 조직해 유대인을 학살했다. 당시 이들에 희생된 유대인만 15만 명에 달한다.

 

2차대전 기간 나치독일의 총에 죽어간 소련인은 24백만 명이다. 지금 러시아가 나치라면 치를 떠는 이유다.

 

OUN의 전투사단 갈리시아는 나치 독일 최후의 날까지 히틀러와 나치를 위해 싸웠다. 그들이 바로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에 서식하던 나치 잔당, ‘네오나치들이다.

 

네오나치가 본색을 드러낸 것은 소련에서 우크라이나가 분리독립한지 13년이 지나서다.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친미세력에 의한 체제전복(오렌지 혁명) 이후 OUN의 직계 후예임을 자처하는 통칭 자유당(Svoboda)이 등장한다.

 

자유당은 나치의 상징물을 변형시킨 갈고리 십자가를 당마크로 사용했고, 부설기관으로 히틀러의 선전장관 이름을 딴 요제프 괴벨스 정치연구소를 운영했다.

 

우크라이나의 또 다른 네오나치 집단으로는 프라비 섹토르가 있다. 이들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반유대, 반러시아 성향의 극우민족주의자들로 사설 무장부대를 운용하며 폭력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이외에도 2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5.9승전기념일에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찬양하는 집회를 연 조국당 등 우크라이나 곳곳에 네오나치들이 존재한다.

 

이들이 바로 평화적인 반정부 시위로 시작된 2014년 유로마이단을 과격한 시위로 유혈사태를 일으킨 쿠데타의 주역들이다.

 

유로마이단 쿠데타의 전모

 

2014년 유로마이단 쿠데타와 이후 발생한 돈바스전쟁에도 네오나치가 깊숙이 연관돼 있다.

 

처음에는 평화롭게 진행되던 유로마이단 시위는 누군가에 의해 시위대와 경찰이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과격하게 변한다.

 

경찰과 시위대는 서로 상대편이 먼저 총을 쏘았다며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외교장관에 의해 뒤늦게 확인된 데 따르면 경찰과 시위대 양측 모두 같은 저격수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저격수의 배후가 네오나치로 밝혀지면서 유로마이단 쿠데타의 전모가 드러났다. ☞관련기사 보기

 

총격전으로 인해 시위가 확산되고 시위대와 경찰 양측 모두에 피해자가 크게 발생하자, 야누코비치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시위대 요구안을 전부 다 들어준다.

 

이어 미국의 중재안까지 받아들여 조기 총선을 약속하고 경찰을 철수시킨다. 그러나 시위대는 합의를 깨고 총기로 무장한 네오나치는 아조프 연대를 앞세워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추방하고 전국의 정부 관공서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당시 미국측 중재자가 바로 부통령이던 바이든 대통령이다. 이후 그는 쿠데타로 집권한 우크라이나 신 정부를 승인하고, 실권을 장악한 후 네오나치를 국가 요직에 앉힌다. ☞관련기사 보기

 

OUN을 계승한 자유당의 창립자인 안드리 파루비가 신 정부의 국가안보국 국장이 되고 네오나치인 야체뉴크가 신 정부의 총리가 된다.

 

야체뉴크 총리는 20151월 독일을 방문한 자리에서, “소련이 독일과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사실을 우리는 모두 명확히 기억하고 있으며, 이런 일의 재발을 막아야한다라고 친나치 발언을 한다.

 

젤렌스키와 네오나치

 

소련이 러시아공화국이던 돈바스 지역을 우크라이나공화국에 편입한 시점은 1922년이다. , 수천 년 역사에서 돈바스 지역이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적은 겨우 13년에 불과하다.

 

쿠데타로 집권한 우크라이나 신 정부가 반러시아 네오나치였기 때문에 그들의 분리독립 추진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신 정부는 미국의 지원 하에 돈바스 전쟁을 일으켜 지난 8년 동안 14천 명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하고,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다.

 

우크라이나 신 정부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경제개발부 장관이 정권이 너무 부패해서 일을 못하겠다라는 비난 성명을 내고 사임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결국 취임 2년만인 2016년 야체뉴크 총리는 비리 혐의로 사임하고 만다.

 

유로마이단 쿠데타로 친러 정치인들은 전부 감옥에 갔고, 친미 정치인들은 지나치게 부패하자, 실망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2019년 코메디언 출신 정치초보 젤린스키를 대통령에 당선시킨다.

 

젤린스키가 유대인에 우크라이나 동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돈바스 전쟁을 잘 정리하리라는 기대를 품고 표를 주었던 것.

 

하지만 젤린스키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과 손절하지 않았고, 러시아는 돈바스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가 강조한 비나치화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나치 마크를 사용하고 나치를 찬양하는 것을 금지하라는 단순한 요구였다.

 

왜냐하면, 네오나치 세력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쿠데타로 쫓아냈고, 이에 항의하는 돈바스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기 때문에, 네오나치들을 손절하지 못하면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현재 젤렌스키 정부는 네오나치 아조프 연대를 앞세워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군과 맞서고 있다.

 

한편 젤렌스키는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친나치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히틀러도 유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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