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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1-21 17:2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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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해부 ②] 모든 지원금엔 꼬리표가 있다


안병직과 '낙성대연구소'…일본에 길들여진 그들


이병권 인문연구가 시민온론 민들레 들판 11월 18일 서울   

이병권씨가 8일 연구모임 이태원 클래스에서 '뉴라이트 해부' 강의를 하고 있다. 2024.11.8. [이태원 클래스 화면 캡처 ] 시민언론 민들레 
이병권씨가 8일 연구모임 이태원 클래스에서 '뉴라이트 해부' 강의를 하고 있다. 2024.11.8. [이태원 클래스 화면 캡처 ] 시민언론 민들레 

뉴라이트란 무엇일까? 한국사회 한 귀퉁이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뉴라이트가 어느 순간 우리 옆에 와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정부와 주요 공공기관장의 자리를 꿰차고, 역사를 생뚱맞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뉴라이트 연구에 천착해 온 인문연구가 이병권 씨의 글을 연재합니다. 1980년대 역사학도로 운동권에 몸 담았던 이병권 인문연구가는 지금도 역사와 인문학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네 차례에 나눠 게재할 글은 1. 뉴라이트의 탄생과 변질 2. 모든 지원금에는 꼬리표가 있다 3.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4. 자존의 길, 자비의 길입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은 조선 침략 시기였던 1870년대부터 조선의 지식인을 회유하고 매수하는데 탁월한 능력과 성과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애초 친미파였던 이완용이 친러파를 거쳐 최종 친일파로 정착하는 과정에도 엄청난 상금과 귀족작위라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에 따르면, 일진회를 이끌었던 송병준은 한술 더 떠 국권 찬탈 직전, 일본에 대해 자신이 나서서 반드시 병합을 성사시킬 테니, 대가로 당시 돈으로 1억 원(현재 가치 약 7조 원)을 요구했고, 결국 분할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일제하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선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이었던 이병도나 신석호 역시 일본 유학생으로 유학 시절부터 큰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병도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은사였던 요시다 도고(吉田歸, 1864-1918)를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인물로 꼽았는데, 이병도는 개인적으로 요시다 도고를 아버지와 같이 모셨다고 합니다. 요시다는 쓰다 소우키치(澤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지식인 포섭의 달인 일본

이병도는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 처벌 특별위원회(반민특위)’에 기소되었으나, 이승만의 반민특위에 대한 탄압과 해체로 기사회생했고, 한국전쟁 뒤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게 됩니다. 일제하 한국 역사학의 계보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독립투사들의 혼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박은식 선생을 필두로, 이상룡, 김교헌, 신채호 등이 이들입니다. 그러나 민족사학의 전통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학계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외로운 길을 걸었던 학자들조차 유령 취급당합니다. 일제하 좌파 이론을 근거로 역사학을 연구했던 백남운이나 김석형 등도 있었으나, 이들 모두 한국전쟁 전에 월북함으로써 이 계보 역시 한국 역사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한국전쟁 이후 반공 이념을 등에 업고 이병도, 신석호 등이 서울대와 고려대를 장악하며 그 제자들이 자신들의 식민사학 이론을 여전히 활개치게 만든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이병도, 신석호의 후예들은 여전히 고대 한사군의 중심 낙랑이 지금 중국의 요동 지역이 아닌 현재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일본이 애지중지하는 ‘임나일본부설’을 틈만 나면 색깔만 바꿔 재생산하고 있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아무런 역사적 사료나 근거도 없이 무시하려 합니다. 모두 일제하 일본으로부터 물려받은 식민사학의 잔재들입니다.

 

문재인, 이재명이 종북좌파라고 주장하며 적대하는 극단적 뉴라이트 인사들은 윤석열 정부의 주변이 아니라 핵심 요직들에 들어가 있다 - MBC '스트레이트'가 취재 보도한 뉴라이트 인사들 현황
문재인, 이재명이 종북좌파라고 주장하며 적대하는 극단적 뉴라이트 인사들은 윤석열 정부의 주변이 아니라 핵심 요직들에 들어가 있다 - MBC '스트레이트'가 취재 보도한 뉴라이트 인사들 현황

일제하, 조선의 지식인 회유에 일가견이 있었던 일본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부터 한국 재상륙을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일 민족주의가 강하다 보니, 일본은 강력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한국 정치인과 지식인을 회유해 우군으로 확보하려 나섭니다. 가장 좋은 명분은 일본 내 유학을 대거 유치하거나, 일본 연수 프로그램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었습니다. 이 지원금에는 대가가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횟수가 거듭될수록 받는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채무가 쌓이게 되고, 뭔가 해주어야 한다는 채무 의식에 내몰리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2단계가 시작됩니다. 채무자들이 나서서 일본에 우호적인 분위기 형성에 앞장서게 하는 것, 한 발 더 나가면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세력이 될 것을 요구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1970년대 욱일승천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쿨 저팬(Cool Japan-매력적인 일본) 운동’을 민관합동으로 전개합니다. 일본재단(Japan Foundation)을 민관 합작으로 만들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일본의 문화를 전파하고, 일본어를 보급하며, 일본 유학생을 대거 유치합니다. 특히 한국, 대만과 같은 인접국에 대해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본에 다녀온 다수의 지식인은 어느덧 자연스럽게 ’선진 일본’ ‘아름다운 일본’을 찬양하는 전도사가 됩니다. 연세대학교의 윤기중 교수(윤석열 대통령 부친)는 한국 내 일본 ‘문부성 장학생 1호’ 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유학생 유치와 지원 열풍은 미국 유학이 대세를 이루는 1990년대에 이르러 다소 누그러졌지만, 1986년 일본이 ‘플라자 합의’를 통해 경제 쇠망의 늪에 빠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국책사업’이었습니다.

일본의 ‘중진자본론’으로 출구 찾기

1985년 일본 도쿄대에 잠시 교환교수이자 유학의 길을 떠났던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안병직은 여러모로 일본의 한국 지식인 포섭 프로그램에 최적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안병직은 서울대(53학번) 대학원 시절부터 나름 진보적 지식인의 길을 걸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접하기 쉽지 않았던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의 저서를 일본을 통해서 구해 탐독하며 암울한 경제 후진국의 현실을 개탄하며 동료, 선후배와 깊은 토론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대 60~70년대 운동권의 주요 이론가로 통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김정남(61학번), 김근태(65학번)와 가까웠고,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김수행(62학번), 신영복(60학번)과는 수시로 토론하며 호형호제로 지냈다고 합니다. 경제학과 2년 후배였던 박현채(55학번)와는 비록 1980년대 중반, ‘사회구성체논쟁’의 대척점에 서 있었으나, 1996년 박현채 선생이 병환으로 타계할 때까지 같이 휴가를 보내는 등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문수(71학번)를 노동운동가로 이끈 것도 안병직이었습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12일 서울지방보훈청에서 뉴라이트 성향 논란 관련 기자회견 중 자신의 저서를 들고 있다. 2024. 08.12 연합뉴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12일 서울지방보훈청에서 뉴라이트 성향 논란 관련 기자회견 중 자신의 저서를 들고 있다. 2024. 08.12 연합뉴스

그런 안병직에게 1984년부터 발화되어 1985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활화산이 되어 타오른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은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85년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진보 진영을 달구었던 ‘사회구성체논쟁’은 한국 사회의 발전단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에 따라 변혁운동의 주체와 방향을 어떻게 수립할 것이며, 장‧단기 변혁운동의 과제를 도출하는 것을 목표로 전개된 치열한 논쟁이었습니다. 논쟁 초기였던 1985년 당시, 한국사회의 성격을 보는 시각은 크게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구분됩니다. 박현재, 이병천, 조희연 등은 한국사회가 이미 상당히 진전된 국가독점자본주의 경제체제이고, 따라서 변혁 주체는 당연히 노동계급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안병직, 이대근 등이 주장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봉건사회의 잔재가 있으며 특히 과거 일본에 이어 미국을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의 착취 그늘에 있어서 정상적인 자본주의 체제로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변혁의 주체는 지식인을 포함한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연합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1960~197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풍미했던 ‘종속이론’의 한국판 변형이론이었습니다. ‘종속이론’ ‘주변부자본주의론’ 등은 모두 1960~197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프랑크(A.G Frank), 도스 산토스(R Dos Santos) 등 남미 경제학자들이 주창했던 이론인데, 이들은 남미의 오랜 경제적 낙후를 식민지 수탈체제의 연장선에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변혁 과제는 식민 관계를 끊고 독자적 발전의 길로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안병직 등이 주장했던 ‘식민지반봉건사회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변혁 과제와 해결 방향을 빈부격차, 계급 간 모순이 아닌 식민지 체제의 근절이라고 보았습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민족해방(NL) 진영에서 동구권 몰락기인 1990년경까지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주요 분석체계로 활용됩니다.

 
언론시국회의(언시국) TV-시민언론 민들레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이필재 언시국 대변인(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이병권 인문연구가. 2024.10.9. 시민언론 민들레 

언론시국회의(언시국) TV-시민언론 민들레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이필재 언시국 대변인(왼쪽)과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이병권 인문연구가. 2024.10.9. 시민언론 민들레 

그러나 논쟁이 진행될수록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박현채를 비롯한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이론적으로 밀리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종속이론’ 자체가 저개발국의 현실경제 현상과 원인을 밝히는데 문제점이 많이 노출되었고, 이 이론을 근간으로 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 한국의 경제 현실을 설명하는데 설득력이 매우 취약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남미의 이론을 도식적으로 차용하고, 기계론적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이즘까지 활용해 분석하다 보니, 한국은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1980년대 들어서면서 나름 건실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거듭하는 현실을 자신들의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국주의의 지속적인 착취구조 때문에 자본주의로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실제로 ‘종속이론’은 동유럽 몰락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본주의적 착취가 없는 사회주의권이 붕괴했다는 사실이 이론의 근저를 허물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1980년대 들어서면서 원전을 통해 정통 변혁이론을 습득하고 무장한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이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앞에서 일본 좌파 이론을 통해 형성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철학적 입장에서 사적유물론에 대한 몰이해와 기계론적 해석, 카우츠키적 수정주의라는 맹공을 받기에 이릅니다. 현실분석과 이론의 한계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 무렵, 안병직은 일본 ‘역사평론’에 실린 ‘중진자본주의의 길’이란 논문을 발견합니다. 일본 교토대학교 경제학부의 나카무라 시토루(中村哲, 1931~ ) 교수가 쓴 논문입니다. 나카무라는 역사학자로 출발하여 경제사를 연구한 인물입니다. 일본에서는 아시아 중심의 역사해석이라는 입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만, 한국에서는 ‘중진자본주의’의 전도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안병직에게는 도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진자본주의론’은 후진국도 선진국의 도움만 있다면, 자체적 자본주의 성장을 통해 중진국 이상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따라잡기(catch-up)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부분적인 모방만 가능하지, 근본적인 체제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반 봉건성, 즉 피착취 국의 위상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중진자본주의론’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의 결함을 일부 보완한 수정주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나 ‘중진자본주의론’은 동구권 몰락 뒤 ‘종속이론’과 함께 침몰합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가 지난 10월 9일 언론시국회의(언시국) TV-시민언론 민들레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뉴라이트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2024.10.9. 시민언론 민들레 
이병권 인문연구가가 지난 10월 9일 언론시국회의(언시국) TV-시민언론 민들레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뉴라이트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2024.10.9. 시민언론 민들레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안병직이 주장했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나, 이후 주장했던 ‘식민지근대화론’은 모두 식민지는 제국주의의 입장과 판단에 역사적 운명이 결정되는 피조물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매우 수동적이고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구조와 관계를 설명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인 발전도,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나 노력, 이 모두에 관심이 없습니다. 두 이론 모두에서 독립, 독자적 발전, 주체적 시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안병직은 1985~1987년 동경대에 머물면서, 한편으로 빛바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중진자본주의론’으로 보완하면서, 자신이 설명하지 못했던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원초적 근원을 일제 식민지 시기에서 찾는 작업에 돌입하게 됩니다. 만약 그가 만들게 될 ‘식민지근대화론’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한국이 catch-up 할 수 있게 된 것이라는 모델을 만든 것이라면, catch-up에 따른 모방은 근원적 발전의 길이 아니므로, 한국은 영원히 일본의 지배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추론하게 됩니다. 이 시기 그는 일본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을 받으며,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의 초석을 가다듬게 됩니다.

 ‘극우 일본’의 지원금

1987년 귀국한 안병직은 곧바로 성균관대 이대근 교수와 함께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설립해 ‘실증’에 기반한 한국 근대경제 연구에 본격적으로 돌입합니다. ‘실증’이란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은 독일로부터 실증주의 역사학을 받아들이며, 유난히 '실증'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가 강조한 것처럼 철저히 객관성을 유지하고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는 명분과는 전혀 다릅니다. 매우 정치적인 구분방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실상은 자신들이 인정하고 유효하다고 판단한 사료나 사건만을 제한해서 인정하고, 자신들만이 인정한 사실의 얼개로 만들어진 작품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자료만을 기준으로 합니다. 2차, 3차 교차검증이나 다른 시각의 개입 여지를 봉쇄한 채 자신들만의 자료와 숫자로 만들어진 것을 그들은 ‘실증’이라 합니다. ‘식민지근대화론’에서 강조하는 일제하 조선의 자본주의화 역시 그 자본주의화의 목적과 과정, 보상 등을 생략했습니다. 도로와 철도, 공장, 노동자, 학교 수 등의 증가만을 나열한 뒤 자본주의의 토대와 성장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안병직식의 ‘실증’ 경제학이 그렇습니다. 일제하 조선의 경제적 수치가 상승했으니 자본주의화가 된 것이고, 따라서 조선의 일반 민중의 삶이 자연히 향상됐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런 투자가 발생했는지, 그 성과가 어디로 갔는지, 과정은 공정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그것이 안병직이 주장하는 ‘실증’ 경제학의 민낯입니다.

안병직은 토요타재단의 막대한 후원에 힘입어 14명의 한·일 학자들이 참여한 기획저작을 발간합니다. <근대조선의 경제연구(1989)>와 <근대조선 수리조합 연구(1992)> 등이죠. 이러한 책의 내용은 안병직의 제자 이영훈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뉴라이트의 주요 이념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안병직, 이영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조선은 스스로 자본주의화(근대화) 될 능력이 없었지만, 일본 식민지 시기 자본주의적 초석이 닦이면서 이후 자본주의화가 가능해졌다. 오늘날 한국경제가 크게 성장한 것은 일본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고, 일제하에서 자본주의화에 협력한 자(부역자)들이 선각자들이다.” 이것이 안병직과 그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중진자본주의론’입니다.

 

제79주년 8·15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광복회 주최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종찬 광복회장 등 참석자들이 광복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독립운동단체들은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친일 뉴라이트 인사'라면서 정부가 주최하는 광복절 경축식 불참을 선언한 바 있다. 2024.8.15. 연합뉴스
제79주년 8·15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광복회 주최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종찬 광복회장 등 참석자들이 광복절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독립운동단체들은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친일 뉴라이트 인사'라면서 정부가 주최하는 광복절 경축식 불참을 선언한 바 있다. 2024.8.15. 연합뉴스

안병직과 낙성대경제연구소의 뒷배가 일본 극우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외에도 A급 전범 사사카와 료이치(1899-1995)가 세운 ‘사사카와재단’의 거금이 수시로 한국 내 주요 대학과 지식인들에게 제공됐다는 사실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1995년 연세대학교에 ‘아시아연구기금’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100억 원의 기금을 지원했고, 기금의 초대 이사장이 류석춘 교수였으며, 저명한 정치학자 문정인 교수가 다음 이사장직을 수행했다는 사실도 드러난 바 있습니다. 이 기금 전달의 창구가 윤기중(윤석열의 부친) 교수였다는 소문도 무성합니다. 기금은 애초 1995년부터 10년간 비밀리에 운영하기로 약정하였는데, 2000년대 초반 언론에 정체가 드러나 큰 물의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기금의 사용처 또한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그 외 얼마나 많은 일본재단과 기업들의 지원금이 ‘후원금’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얼마나 많은 교수, 지식인, 여론 주도자들에게 전달되었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사카와재단의 창설자인 사사카와 료이치는 일본의 비호 아래 태평양전쟁 직전, 만주국에서 마약으로 큰돈을 벌어 그 돈을 토대로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시절에는 거액의 전쟁후원금을 제공하고 가미카제 돌격대를 창안하며 자신이 파시스트이고 무솔리니를 가장 존경한다고 떠벌렸던 인물입니다. 일본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3년 복역한 뒤에는 도박 사업으로 일본 최대의 부자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사카와재단을 일본 극우 야쿠자 자금의 대명사로 부르는 까닭입니다.

사사카와는 1974년 미국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파시스트”라고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프랑스에서는 설립 자체가 불허된 매우 극우적이고 위험한 재단입니다. 이 재단의 지원금 수백억 원이 한국 주요 대학에 살포되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합니다. 돈으로 매수된 다수의 지식인은 차츰 돈 준 자들의 논리를 재생산하고 옹호하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어느 지점부터는 자신들의 행동이 '애국'이라고 떼지어 우깁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저 역시 최근에서야 저들의 실체와 논리, 배경과 과정을 고스란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많은 시민이 그러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그 정체를 온전히 알게 되었으니, ‘밀정들’을 역사의 재판정 앞에 어떻게 세울지 고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는 매국 우파 집단이자 밀정집단입니다. 저들은 헌법과 앞으로 제정해야 할 법률로 규제하고, 독일이 ‘연방헌법수호청’을 설립해 극단주의 세력을 제어하듯 반국가, 반민족 죄를 물어야 합니다. 그날이 멀지 않다고 믿습니다.

 
류기정 작 ‘구축Ⅲ-형영상동’(71125cm FRP+나무+혼합)“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는 갈 길이 아직 멀고도 먼데 이마저도 대놓고 방해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민족문화의 역사를 지우고, 민중항쟁의 역사를 지우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고... 과연 제정신이 박혀있는 대한민국 국민인가.용산점령군 흉내 내며 뉴라이트와 손잡고 역사를 파괴하는 자들, 용산에 점령기를 꽂고 친일파와 손잡은 1945년 미군정 따라하기냐. 그들은 매국으로 얻은 부와 권력을 지키려는 탐욕스런 기회주의적 역적들이다. 더 이상 이 무뢰한들이 역사를 망치게 놔두면 안 되겠다. 역사를 잃은 나 또한 미래는 없겠다.눈멀고 귀멀고 입만 벌리면 거짓말만 내뱉는 마리오네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나라정신 팔아치우는 검은 음모의 혼탁한 진흙탕 속을 허우적대고 있는 꼭두각시. 닌자처럼 숨어들어 우리 역사를 해치는 썩은 바다의 나라 밀정들. 그 실체가 선명한 그림자로 보인다. 꼭두각시 그림자가, 바로, 욱일기의 형태로!”

류기정 작 ‘구축Ⅲ-형영상동’(71125cm FRP+나무+혼합)“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는 갈 길이 아직 멀고도 먼데 이마저도 대놓고 방해하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민족문화의 역사를 지우고, 민중항쟁의 역사를 지우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고... 과연 제정신이 박혀있는 대한민국 국민인가.용산점령군 흉내 내며 뉴라이트와 손잡고 역사를 파괴하는 자들, 용산에 점령기를 꽂고 친일파와 손잡은 1945년 미군정 따라하기냐. 그들은 매국으로 얻은 부와 권력을 지키려는 탐욕스런 기회주의적 역적들이다. 더 이상 이 무뢰한들이 역사를 망치게 놔두면 안 되겠다. 역사를 잃은 나 또한 미래는 없겠다.눈멀고 귀멀고 입만 벌리면 거짓말만 내뱉는 마리오네트. 동맹이라는 미명하에 나라정신 팔아치우는 검은 음모의 혼탁한 진흙탕 속을 허우적대고 있는 꼭두각시. 닌자처럼 숨어들어 우리 역사를 해치는 썩은 바다의 나라 밀정들. 그 실체가 선명한 그림자로 보인다. 꼭두각시 그림자가, 바로, 욱일기의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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