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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코리아뉴스 |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정기열교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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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17 20:0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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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탈북과 집단납치 논란이 일고 있는 북 류경식당 종업원 여성들 사진 ©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정기열교수 대담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중국 북 식당 동포처녀들 집단탈북 의혹 사건이 총선 직전 터진지 5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12명이나 되는 북 동포 처녀들을 꽁꽁 가두어놓고 목소리마저 들려주지 않고 있어 온 민족의 걱정이 더욱 커지고 있다.

주류언론에서도 이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데 반북극우언론들만 민변에 보내온 위임장은 가짜 부모가 쓴 것이라는 둥, 처녀들의 부모들이 집단구금되어 정신교육을 받고 있다는 둥, 식당 안전책임자가 처형되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마구 퍼트리고 있다.

한반도 사드배치 결정, 3대전략폭격기 괌 증강배치 등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박을 최고 수위로 끌어올리자 북도 사소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핵선제타격으로 대답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중국은 아직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남측에 경제보복조치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하여 전쟁이건 경제대란이건 무슨 사단이 곧 날 것 같다는 국민들의 우려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 전쟁위기와 경제위기를 동시에 극복할 유일한 길은 남북화해와 협력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북 여성종업원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동포애적, 인도적 견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본지의 진단이다. 그렇게만 되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하여 민변에 북녘 부모들의 위임장을 전달해준 정기열 칭화대 교수와 긴급하게 서면대담을 진행하였다. 다음은 그 대담 전문이다.

 

▲ 정기열 교수 ©자주시보

1.정기열 교수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녘에서 흔히 말하는 “71학번입니다. 동국대 불교철학과에서 1년 수학한 뒤 73년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적을 옮겨 다시 대학을 시작한 뒤 군복무까지 마치고 1980년 미국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그곳에서 쭉 살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모교 초청으로 서울에 돌아가 2학기를 가르친 뒤 우연한 기회에 2006년 봄에 중국사회과학원에 초빙되어 3년을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9년부터는 칭화대학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어 오늘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편 2000년대 말부터는 일본대학들(게이오, 릿쿄, 교토, 리츠메이칸, 도시샤대학 등)에 초빙되어 자주 일본을 오가다 2011년부터는 동경 조선대학교에도 초빙되어 오늘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53월에 뜻밖에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대학(사회과학부, 철학부, 국제관계학부 포함)에 초빙교수로 위촉되어 오늘은 북녘땅에서도 우리민족의 후대를 가르치게 되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11년부터는 매학기 중국, 일본, 북녘조국을 오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자이기 전에 평생 통일운동가입니다. 지난 시기 30년 넘게 그랬듯 앞으로도 해외동포로서 끊긴 조국의 허리를 다시 잇기 위한 자주평화통일운동에 남은 생애도 모두 바쳐 일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2. 정교수님께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3. 탈북종업원 부모들이 민변변호사들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보내주셨는데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2, 3번 질문에 함께 답하겠습니다.

지금 기억에 아마도 517일 오전일 것입니다. 다음 날 18일 종합대학 강의를 모두 마치고 19일 오전 출국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오래 아는 미국동포가 평양을 방문하였기에 저도 잠시 그분이 머물던 평양호텔로 숙소을 옮겨 그곳에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20109월 칭화대학 주선으로 국제영문인터넷매체 <The 4th Media>(4언론)를 창간하게 되면서부터 오늘까지 편집인 및 책임주필로 언론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2012년부터는 언론인 신분이 인정되어 북녘 어디서든 인터넷 사용을 허락 받아 체류 중에도 계속 언론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오전 호텔에서 언론작업 중 <자주시보>를 읽다 우연히 “12명 북녘종업원관련 기사를 접했습니다. 만약 북녘가족들의 위임장을 구할 수 있다면 <국정원>에 의해 감금상태에 있는 12명 여성종업원 모두를 밖으로 데려 내올 수 있다<민변>의 긴급호소문이 담긴 기사를 읽자마자 당시 저를 안내하던 최 선생에게 내일(18)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만약 허락되면 그분들에게 딸들을 구하기 위해 민변을 포함한 서울 여러 통일운동, 인권단체들의 구원대책 활동을 알려드리고 가족들로부터 받은 위임장을 19일 북경에 나가는 즉시 민변에 전달하겠다는 뜻을 당국에 긴급히 문의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8일 아침 안내선생을 통해 북녘당국이 적극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날 오후 3시 평양호텔 2층 면담실에서 12명 종업원 모두의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면담실에는 북녘당국에 부탁한 3명의 촬영기사들과 사진사 외에 아무도 동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발표된 당시 찍은 동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듯 먼저 천금보다 귀중한 딸자식들과 졸지에 생이별을 하고 감당키 어려운 슬픔과 근심에 가득찬 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 격려하고 현재 서울에서 진행되는 구원활동을 말씀 드린 뒤 부모님들이 면담실 현장에서 직접 작성한 위임장 원본을 모두 넘겨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12명 부모들이 위임장을 직접 작성한 사실이 논란이 되지 않도록 북녘 당국에 면담 과정과 위임장 작성 등 전 과정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담아줄 것을 사전에 부탁했고 지원을 약속 받아 다음 날 19일 아침 약속대로 평양순안공항에서 모든 영상 및 사진자료들을 정확히 전달 받았습니다.

. 정교수님은 북한에 가시는 것이 자유로운지와 북한 주민을 만나시는게 자유로운지 여부 및 그 이유는 무언인지요?

, 자유롭습니다. 통일문제를 붙들고 30년 가까이 수도 없이 북녘을 찾았고 방문할 때마다 북녘동포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1987년에 취득한 미국시민권덕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참고가 될까 싶어 한두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기막힌 아이러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이 도대체 뭐길래 미국동포는 그것 하나 갖고 있다고 마음대로 북녘을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분단 시기 70년 내내 남녘동포들에게 북녘땅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동포들은 시민권 하나 갖고 있다고 북녘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분단현실이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분단현실이 정녕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남녘은 194598일 첫 시작부터 미국오작품”(Made in USA)으로 70년 내내 워싱턴의 완벽한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를 받는 땅이라는 세상의 오래된 지적이 틀리지 않다 생각합니다. 지역 농촌이라는 경북 성주군민들마저도 최근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드사태가 온 세상 특히 가까운 이웃나라들(중국, 러시아)에게조차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실 곧 남녘땅은 70년 내내 결국 미국식민지였구나!”라는 손가락질을 이젠 피하기 어렵게 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보탬이 될까 싶어 참고 삼아 좀 더 말씀드립니다.미국에 첫발을 디딘지 7년 뒤 미국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때가 1987년입니다. ‘조국통일운동 차원에서 시민권 얻을 자격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청하자고 결의한 대로 당시 <재미한청련> 회원들은 다수가 목적의식적으로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금단의 땅이었던 북녘을 마음 먹은대로 방문하기 시작하게 됐던 배경입니다. 그때 농담으로 로마시민권이라 부르던 미국시민권 덕에 저희들은 박정희전두환군사독재정권 시절 재일동포들이 숱하게 경험한 끔찍스런 조작간첩사건같은 탄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19897월 임수경 당시 전대협대표가 참가한 국제평화대행진(분단선돌파사건) 사업을 시작으로 이후 수십 차례 남북해외가 주축이 된 크고 작은 국제행사들을 조직하고 그 일들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었지만 아직 조작간첩사건에 엮이어 남녘땅 어딘가에 묶여있지 않은 채 오늘도 북녘조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늘 길게 말씀드리는 바로 그 미국시민권 덕입니다. 앞에서 미국시민권 덕에 북녘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70년의 분단현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외세가 우리민족에 강제한 분단선돌파를 목적으로 남북해외통일운동역량과 국제연대운동을 접목시켜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라는 구호를 내걸고 분단 이후 처음 시도한 평화행진 사업을 북녘에 제안키 위해 평양을 처음 찾았던 1989322일부터 오늘까지 북녘을 방문한 총 횟수는 벌써 이미 몇 해 전 100차례가 넘었다고 합니다. 횟수가 50차례 넘었던 어느 때부턴가 저는 횟수 세는 작업을 아예 포기했는데 작년 2015년 북녘 <해외동포사업국>에 계신 어느 분이 알려주어 그런 줄 알았습니다.

미국여권을 가진 덕에 남녘에서 감옥에 가는 대신 그러나 저는 모두 3차례 서울에서 강제퇴거되거나 입국금지자가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 신은미 선생이 서울에서 겪은 것과 같은 경험이었죠. 그 과정 오늘까지 저는 모두 3차례 도합 16년 남녘조국에는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강제퇴거’ ‘강제추방첫 경험은 19888월이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출정식>13명 국제반전평화인사들을 조직해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종로경찰서 외사과에서 안기부 덕수궁 지하안가로 넘겨져 “3일 내리 잠 안재우는일종의 고문이었던 밤샘취조뒤 당시 밖에서 모두 걱정했던 조작간첩사건대신 여권에 “5년 강제퇴거란 낙인만 찍힌 채 강제추방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뒤 두번 더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전쟁 시기 미국군대에 의해 희생된 수백 만 민간인학살만행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전 민족적 차원에서 조직된 <남북해외전민특위>20005월 결성되었을 때 당시 저는 사무총장에 피선되면서 전민특위 첫 사업으로 다음 해 2001년 미국에서 국제민간법정을 설치할 것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20016월 남과 북(비자발급이 거부되어 영상으로)에서 참가한 전쟁 시기 민간인학살만행 생존자들, 피해자 가족들 6-70, 그분들을 지원하는 남녘과 해외의 수백 명 통일운동가들 그리고 케네디/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 역임 뒤 평생을 마치 죄를 씻듯 국제반전평화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램지 클라크 변호사(당시 재판에서 수석검사 역을 맡아 자신의 조국을 전범국가로 기소) 등 모두 26개 나라들에서 참가한 세계양심들과 함께 전민특위는 뉴욕, 워싱턴에서 전쟁 뒤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코리아국제전범재판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전범재판 직후인 7월 초 저는 전민특위 사업 차 남녘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에 갔으나 공항에서 뜻밖에 입국금지자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강제추방된 뒤 이후 5년을 또 다시 남녘땅에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10년 뒤 저는 그와 똑같은 경험을 또 다시 또 하게 됩니다. 2010326일 발생한 천안함침몰사건약 한달 뒤부터 <통일뉴스>에 사건 관련한 글을 연재하던 중 20105천안함 관련 글을 계속 쓰면 …이란 단서가 붙은 일종의 통보성 위협을 북경 주재 국정원 참사로부터 전달 받은 뒤 그때로부터 또 다시 6년 남녘에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입국여부도 확인할 겸 가족결혼식 참가를 위해 2013년 서울입국을 다시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김포공항에서 입국금지자라 들어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또 다시 강제추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통일운동 관련 개인사의 일부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태어나 자란 남녘땅에선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이 가 되어 1984년부터 감시조사대상, 수배, 미행, 도청, 강제퇴거, 강제추방, 입국금지를 거듭하며 산지가 근 30년이 되는 반면 1989년 처음 방문했던 북녘에선 거꾸로 통일운동한 것이 최고최상의 공로가 되어 방문 때마다 진심으로 맞아주는 동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만나는 모든 북녘동포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과 믿음, 존경을 끝없이 받아 안으면 산지가 근 30년이 됩니다.

어디를 원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통일문제 관련 남과 북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다른 비극적 분단현실을 새삼 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북을 자유롭게 오가며북녘동포들과 자유롭게 만나대화도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길게 개인사까지 더해서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분단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탈북종업원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는 과정에서 부모들과 어떻게 연락을 하게 되었는지요?

앞의 1, 2 질문에 대한 답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 탈북종업원 부모들은 어디에서 만나 위임장을 받으셨는지요?

역시 위 1, 2에서 충분히 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 위임장을 받기까지 몇 차례나 만나셨는지요?

12명 여성종업원들의 모든 부모들과 당시 탈출에 성공한 동료종업원 7명을 53일 평양 국제기자회견장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을 직접 만난 것은 가족들 위임장을 민변에 보내기 위해 스스로 이 일에 뛰어 들었던 518일 평양호텔 면담실에서였습니다.

. 현재도 탈북종업원 부모들이나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실 수 있는지요?

오늘 자주시보 서면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저는 종합대학 강의 차 1주일 전부터 북녘에 와 있습니다. 이번 체류 기간에도 822일 떠나기 전 12명 종업원들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이미 이곳 당국에 문의하고 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만나 뵙고 가게 되면 이후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 허강일(지배인)의 부모나 가족도 만나셨나요? 허강일은 신혼으로 부인이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떠한지요?

아닙니다. 허강일의 부모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의 부모와 가족은 아마 평생 얼굴을 들고 살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얼굴을 살고 살 수 있겠습니까? 허는 아마 죽어서도 자신이 지은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그가 알기는 하는지 정녕 의심스럽습니다. 12명 나어린 딸들을 가족과 생이별시킨 천추에 용서못할 범죄를 그는 아마 평생 가도 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2집단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종업원 얼굴사진은 그들을 하루 빨리 구해내기 위해서인지 북녘당국이 먼저 나서 온 세상에 알리고 소개하는데 반해 허의 사진은 단 한번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 무슨 배경에서 그리 된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가 비록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고 자기의 조국은 물론 제 아내마저 버리고 도망간 천하 몹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얼굴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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