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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재미 동포 아줌마, 남한에 가다 ③]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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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4-10 11:55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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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나에 대한 허위 · 왜곡 보도가 밤낮없이 흘러 나오고있다. 내 모습을하고있는 저 종북 마녀의 얘기를 그저 남의 얘기 인 것처럼 넋을 잃고 바라본다. 곧 정정 보도를 내보낼 것이라는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 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 질 수 있단 말인가.


오랫동안 외국에 살면서 나는 내가 태어난 한국이 그렇게 자랑 스러울 수 없었다. 여러 나라에서 환영받는 한류 때문도 아니요, 경이적으로 이룩한 경제 발전 때문도 아니었다. 세상에는 1 인당 국민 소득이 한국보다 더 높은 나라들도 많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그런 나라들을 모두 선진국이라 부르지 않는다. 내가 나의 모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이유는 바로 한국이 이룩한 민주주의의 발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유롭고,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를하는 언론이 있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한국의 언론이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변화의 중심에 서게됐다. 

년 11 월 22 일 2014. 오늘은 시조 카 첫 손주의 돌잔치가있는 날이다. 친정 조카의 결혼식과 함께 서울에서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 다. 그러나 갈 수가 없다. 우리 부부를 '악성 바이러스 감염자'처럼 모두들 멀리한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탈북자들과 함께 드린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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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년 11 월 23 일 한 탈북자 교회에서의 간증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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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11 월 23 일 2014, 주일이다. 한 교회로부터 예배 시간에 신앙 간증을 부탁 받았다. 상처받은 마음을 교회에 가서 치유 받길 간절히 원하며 예배에 참석했다. 이 교회의 목사님은 북한에서 고위직에있다가 남으로 온 탈북자였다. 교회 성도 중 70 ~ 80 %가 탈북자라고한다. 우리 모두는 나의 신앙 간증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남과 북이 화평 함으로 하나되는 그날을 소망하며 간절히기도했다. 마음이 한결 평온 해지고 힘이 솟는다. 

간증 내용은 평소 내가 강연 때 말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일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강연 할 때는 종교적 편향성을 피하기 위해 신앙 이야기를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교회에서 드리는 신앙 간증 예배이기 때문에 지난날 부끄럽게 살아온 내 삶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신앙 고백을 했음이 다를 뿐이다. 

나는 로마서 12 장과 누가 복음 10 장에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내 신앙 체험을 성도들과 나눈다. "서로 화목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이웃이 되라"는 말씀들을 되뇌면서 내 이웃 속에 북녘 동포들은 제외 돼 있던 지난날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털어 놓는다. 

북을 여행하면서 비로소 북녘 동포들 이야말로 내가 보듬어 안고 사랑해야 할 내 이웃 이요, 내 형제 요, 내 민족임을 고백하는 귀중한 시간이됐다.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보인다. 아마도두고 온 가족들과 고향이 생각나서 그랬 으리라. 

'종북 프레임'에 갇힌 한국 사회 

나에 대한 허위 · 왜곡 보도는 날이 갈수록도를 더해 간다. 나를 간첩으로 만드는 모양새 다."내가 북한을 지상 낙원이라고했다"는 보도에서 시작해 한층 더 나아가 "내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으며 북한의 3 대 세습을 찬양했다"는 데 이른다. 심지어는 구체적인 액수를 거론하며 "공작금을 받았을 것"이라는 발언까지 나온다 (현재 나는 이들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인 상태 다). 

도대체 이들의 아니면 말고 식의 무분별한 보도는 어떻게 나오는 걸까, 소위 언론인이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하면서 잠이나 제대로 청할 수있을는지 의문이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없는 그들 만의 사정이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되레 그들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한다. 

년 11 월 24 일 2014. 오늘은 서울 특별시 광진구 초청으로 강연이 예정 돼있다. 토크 콘서트가 아닌, 나 혼자하는 강연이다. 강연 장에 가보니 방송국 카메라들이 설치 돼있다. 내 강연 장에 언론사 카메라가 녹화하고 강연 전후 기자 회견을하는 건 처음이다. 공중파 방송국 한 곳과 종편 등 언론사들이 강연을 취재 한단다. 나는 내가 평소에하던 그대로 가감없이 강연을 마쳤다. 

강연이 끝나고 늦은 시각까지 내가 쓴 북한 기행문의 독자 분들과 식사를 겸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모국에 와서 모처럼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남한에서 깨달은 '종북'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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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미 시민 기자와 관련한 보도를 내보내고있는 TV 조선
Ⓒ TV 조선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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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보니 "신은미 주체 사상을 옹호하다"라는 내용의 뉴스가 나온다.종편을 비롯한 몇몇 언론인들은 내가 무슨 말을하든간에 뉴스로 만들어내는 비상 한 재주를 타고 났나보다. 이 뉴스를 만든 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있다. 주체 사상이 뭔지 내게 알려줄 수 있는지 말이다. 뭘 알아야 옹호도하고 찬양도 할 게 아닌가. 

이것이 말로만 듣던 종북 몰이인가. 종북이라는 말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한마디로 빨갱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쓰임도있다. 공산주의자 (또는 빨갱이)가 아닌 사람이 북에 호의적으로 비칠 수있는 (또는 사실대로) 말을 할 경우, 다른 사람이 그 발언을 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말 대신에 종북이라는 편리한 말을 쓴다. 

이런 종북 몰이의 배경에는 국가 보안법이있다. 종북의 특성 중 하나는 점점 범위가 넓어진다는 데있다. 심지어 세월 호 희생자 유족들과 함께 슬퍼하고 행동하는 사람들까지도 종북의 범위에 속한다. 

나는 깨달았다. 한국 사회가 종북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문제가 된 조계사 통일 콘서트에 출연 한 국회의원은 텔레비전에 나와 "조계사에 볼일이있어서 갔다가 우연히 들렀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이 말이 종북 프레임에 걸려 들지 않으려 고 안간힘을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나서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참석해 격려를 해주는 게보기 좋은 일 아니었을 까. 통일의 꽃이라 불리는 그 국회의원에게 통일은 그의 정치적 자산 (정치 자금)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훌륭한 자산을 훌훌 털어 버리려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누구도 "너 종북이지?"라는 질문에 "그래, 나 종북이다"라고 반박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자신은 종북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지만 오히려 종북의 올가미에 더 깊게 걸려 들기 만 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검열을한다. 진보를 자처하는 인사들조차 통합 진보당 해산 결정을두고 "나는 그 당에 절대 반대하지만"이라는 전제를 깔고 나서야 "정당 해산 심판은 잘못됐다"라고 첨언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나는 내가 북에서보고 느낀 것을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러니 종북 몰이를하는 이들에게 나보다 더 좋은 먹잇감은 없었을 지 모른다. 

종북으로 모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종북이 뭐냐'고 물어보고 싶다. 내가 본 북한과 북녘 동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 모국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 · 협력 나아가 통일을, 그것도 평범한 민간인이 원하고 이야기하면 종북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종북 이야말로 멋진 별명 아닌가. 

"그래, 난 통일을 염원하고 북녘 동포들을 사랑하는 '종북'이다!" 

조국에 있지만 갈 곳이 없다 

예정대로라면 나는 2014 년 11 월 26 일 서울을 떠나 중국 심양을 거쳐 평양으로 가게 돼 있었다. 그러나 에볼라로 인한 북한의 외국인 관광객 입국 금지 조치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있다. 나는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고 겨울 북한 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의 다음 일정은 12 월 6 일부 터인데 그 사이 무엇을 한단 말인가. 아무데도 갈 곳이없는 남편과 나는 타이완과 말레이시아에있는 친구들을 찾아 여행이라도하고 돌아 올까 생각해 봤으나 지금은 여행을 할 기분이 전혀 아니다. 

대신 우리는 기분 전환을 위해 숙소를 바꾸기로했다. 호텔에서 나와 한 대학 안에있는 외국인 교수 전용 숙소로 거처를 옮겼다. 남편이 다니던 대학이다. 돌아가신 시아버님도이 대학 교수 셨다. 

방이 세 개 있고 부엌이있는 아파트 같은 곳. 가정집 분위기가 나서 호텔보다 훨씬 좋다. 게다가 이곳은, 남편이 미국에 오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옛집이 있던 곳으로부터 몇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남편의 옛집은 현재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나도이 대학 근처에있는 대학을 다녀서인지 친근감이 배가된다. 남편과 나는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한동안 우울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정했다 ...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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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미 시민 기자가 지난해 12 월 2 일 서울 중구 프레스 센터에서 열린 '통일 토크 콘서트 종북 몰이'입장 발표 기자 회견장에서 발언하고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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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토크 콘서트에 대한 허위 · 왜곡 보도가 그 수위를 높이고 있던 중 새 정치 민주 연합의 한 국회의원으로부터 연락이왔다. 년 12 월 4 일 2014 년 국회 서 통일 토크쇼를 열자는 제안이다. 그 토크쇼에는 여러 국회의원들도 함께한다고했다. 

나와 가톨릭 신부님 한 분 그리고 우리를 초청 한 국회의원, 이렇게 세 사람이 토​​크쇼를 진행할 예정이라고한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초청 한 국회의원 실로부터 연락이왔다. 부득이 토크쇼 장소를 국회에서 서울 동교동에있는 김대중 도서관으로 변경한다는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있는 듯했다. 

종편을 비롯한 여러 방송국은 정부가 신은미 씨의 재입국을 금지 할 것이라는 내용의 뉴스를 연일 내 보냈다. 이 뉴스는 나로 하여금 내 어린 시절을 회상 케했다. 그리고 출국을 결정 토록 만든 계기가됐다. 

나는 민간 외교 사절단 인 리틀 엔젤스의 단원으로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공연 때문이었다.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공연에 나가면 몇 개월 씩이나 해외에 머물러야했다.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 "코리아! 코리아!"를 연발하는 청중들의 함성을들을 때면 나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그간의 피로를 잊곤했다. 

우리는 정규 공연 외에도 그 나라의 왕궁이나 대통령 궁에 가서 단 몇 사람만을위한 공연을 수 차례 반복하기도했다. 아마 리틀 엔젤스 단원들만큼 수많은 세계 지도자들과 만나 악수를하고, 만찬을 함께한 이들도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장개석 총통, 엘리자베스 여왕, 닉슨 대통령, 인디 라 간디 수상,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멜다,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었던 태국의 왕 등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어린 내가 가장 기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만찬은 박정희 대통령 께서 베풀어 주시는 귀국 후 청와대 만찬이었다. 이 모든 것이 국위 선양을, 조국을 위해하는 일 이었으므로,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외국의 왕이나 대통령과하는 만찬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께서 베풀어 주시는 만찬이 제일 감격스러운 초청이자 만남이었다. 

이렇듯 사랑한 나의 조국이 나의 재입국을 불허 할 것이라는 뉴스를 듣고 나는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나를 원하지 않는 곳에 계속 머무른다는 것은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조국을 생각한다'라는 글을 페이스 북에 올리면서 김대중 도서관에서의 토크쇼를 마지막으로 출국하겠다는 결정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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