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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남북

문화 | 장편실화 - 인생열차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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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8-06 03:2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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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회) 
 
제 2 장
 
운명을 맞받아 어디로든지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걸어온 한생을 돌이켜보면 력사로 될것이다.
큰 사람이든 작은 사람이든 매 사람들의 한생을 음미해보면 능히 제나름의 세계를 펼쳐 하나의 장편으로 엮을수 있으리라. 하물며 뜻을 품고 한생을 강렬하게 달음질쳐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야.
지금 내앞에는 한장의 신문이 있다.
2002년 12월 20일부 《트리뷴》이다.
《트리뷴》은 자기 신문의 자랑인 비슈와나스에 대한 기사를 그의 사진과 함께 실었다. 사진은 박사메달을 앞가슴에 드리운 초상이였다. 그러고보니 그의 3대는 다 박사였다. 쌀리그 람 샤르마박사, 바드리 나트 취바박사, 비슈와나스박사…
흐르는 세월은 한때 그 신문기사의 집필자로 세상에 알려지던 이름을 오늘은 그 신문기사의 주인공으로 다시 세상에 떠올린것이였다.
세계적인 정치론평가이며 광고기자, 저명한 사회활동가로 명성을 떨치기까지의 그 인생행로가 60년전 《트리뷴》의 조수기자로부터 시작되였다는것이 어찌 그 신문의 자랑으로 되지 않을수 있으랴.
 
《인터라즈》의 명성으로, 더우기는 시대의 사상의 기수로 나라의 이름을 빛내준 비슈와나스를 《트리뷴》은 잊지 않고있었다.
그 신문기사를 읽는 나에게 비슈와나스는 말하였다.
《세상에 완전무결이란 없소.》
 
그가 그렇게 말하는것은 그 기사의 제목이 바로 《완전무결한 광고기자》였기때문이였다.
어떻게 인생을 설계하고 오늘에로 줄달음쳐왔는가고 묻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운명은 맞이하는것이 아니요. 나는 운명을 맞받아나갔을뿐이요.》
 
맞받아나간 그 운명의 흔적을 말해주듯 그의 사무실 한쪽벽면에는 세계각국에서 받은 100여개의 급수높은 훈장과 명예칭호, 학위증서들이 주런이 걸려있었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는것이지 맞이하는것이 아니다.
비슈와나스는 자기 사무실창문으로 거리에서 붐비는 교통을 내려다보면서 《인생은 자기 행로에 있는 각이한 기회들의 종합이요.》라고 철학적으로 말하였다. 자기가 바라는 모든것을 운명에 내맡기지 않고 자기의 의지로, 노력으로 쟁취해온 사람만이 할수 있는 의미심장한 말이였다.
나는 그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완전무결한 광고기자
 
 
 
76살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비슈와나스는 자기는 모든 간난신고와 투쟁하면서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고 하였다. 이 나이에 그는 자기에게 새로운 장이 펼쳐졌으며 자기자신을 갱신할수 있는 길이 다시 열리였다고 말하였다.…
 
정문앞에 메르쎄데스벤즈를 세워놓고 값비싼 안락의자가 있는 편안한 응접실도 마다하고 비슈와나스는 자기의 낡은 사무실에서 고심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나는 나에게 차례지는 모든 기회들을 안고 열심히 일하였을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성공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추구하는 거래건에는 아주 정열적이고 완고하며 자기의 모든 손님들을 쟁취한다.
사람들은 그의 직업적인 거래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기의 거래건을 포기하지 않으며 하루 24시간동안 자기의 힘으로 그것을 내밀군 하였다.》
사람들은 또한 광고업을 조직하는데서 발휘되는 그의 정열에 머리를 숙이군 한다.
그는 인디아전국광고사 리사회의 창립자이며 델리광고구락부 창건자이다. 그의 고심어린 노력이 모든것을 성공에로 이끌어왔다.
비슈와나스는 나라가 분렬된 직후 뉴델리에 살림집 하나 살만한 돈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인디아뿐아니라 세계각지의 30억루삐에 해당되는 광고업을 이끌고있다. 이것이 그의 업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그의 회사인 《인터라즈》는 1987년에 명성높은 클리오국제상을 받은 첫 광고사였다. 이 상은 광고분야에서의 오스카르상과 맞먹는다. 《인터라즈》는 또한 《림까세계기록집》에 오른 유일한 회사이다.
비슈와나스는 개인적으로 금년 4월에 국제김일성상을 수여받았다. 그보다 앞서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사회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전 쏘련정부로부터 국제친선상을 받은바도 있다.
현재 그는 도꾜에 본부를 둔 주체사상국제연구소의 리사장으로 일하고있다.
흥미있는것은 오늘 세계적인 사회활동가로 명성높은 그가 10대의 어린시절부터 라호르에 있는 신문사 《트리뷴》에서 조수기자로 사업을 시작한것이다. 당시 이 신문사의 총경영자였던 피. 엘. 쏜디는 그에게 집필과 함께 기업을 할것을 권고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이 조언을 받아들이였고 기업에 착수하였다.
《그때는 상표도 많지 못하였으며 광고들은 더우기 적었다. 오늘 우리가 볼수 있는것과는 달리 그때의 활동은 아주 명백하였다.》라고 그는 그때를 회상하였다.
그는 자기가 사업에 대하여 배우고있던 시절들을 돌이켜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는 청량음료도 국내산이였고 판잡 케스리라고 알려져있었다. 1948년까지 코카콜라는 무료로 봉사되였다. 이때 티베트눈이라고 하는 얼굴크림도 있었다. 그것이 아주 인기를 끌군 하였다. 내가 이 일을 하기 시작한지 1주일만에 나는 우리 회사를 위해 5건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나라의 분렬로 하여 그는 모든것을 다시 시작하여야 했다. 그는 뉴델리로 와서 직업을 찾아 거리를 헤매였다. 희귀하고도 희귀한 기회가 그에게 차례졌다. 그때를 회상하여 그는 말하였다.
《어느날 내가 쏘베트쎈터가까이를 거닐고있을 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말을 붙이였다. 그 사람은 〈쏘베트 땅〉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싶어하면서 그런 일을 맡아 수행할수 있는 주재국사람을 찾고있었다. 내가 그 일을 맡았다.》
 
이렇게 되여 비슈와나스는 쏘련사람들의 잡지를 발간하는 사업에 착수하게 되였다. 구성으로부터 인쇄, 지어는 편집까지도 포함하여 거의 모든것을 그가 혼자서 감당하였다.
쏘련사람들은 그의 정열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였다.
 
1962년에 그는 첫 인디아광고회사인 《인터라즈》사무소를 모스크바에 개설하였다. 이미 런던사무소는 개설되여있었다. 비슈와나스와 그의 회사는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하였다. 오늘날 그 회사는 200건이상의 국내 및 국제거래를 감당하고있다. 그 회사는 국내외에서 각이한 손님들을 대상으로 수백회의 전람회도 조직하였다.
 
비슈와나스는 《세월은 빨리도 흐른다. 이 분야에서 목을 조이는 경쟁이 아주 많기때문에 이 경기에서 이기기가 힘들게 되였다. 누구나 다 원가이하의 할인가격을 요구하였다. 광고사를 더는 운영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였다.》라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회사업무가 잘되고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고 나는 《트리뷴》을 찾아갔다. 그것은 비슈와나스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알고있는 사람들이 오늘도 거기에 있다는 산증거로 되기때문이였다.
오늘의 《트리뷴》은 챤디가르에 있다.
그날의 피. 엘. 쏜디는 이미 없어도 그날에 찍어간 우리의 주인공의 발자취가 거기에 있고 또한 선배들의 흔적을 추억하는 후배들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이 글을 계속 써내려갈수 있었다.
 
 
1. 기자학과 광고업은 평행으로 간다
 
 
 
가장 먼 곳을 가장 가깝게 바라보는 청춘!
생이 아름다울진대 그 청춘은 또 얼마나 아름다우랴.
 
20살이였다. 비슈와나스가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로 진출하던 그 때는.
 
모두 나래를 펴고 날아갔다. 누구는 상업쎈터로, 또 누구는 주식회사로…
법학을 전공한 알따브 후쎄인은 희망대로 법관이 되였다. 학업성적이 좋았던 그는 라호르재판소에 순조롭게 들어갔다. 그는 변호사가 되였다.
 
비슈와나스는 변호사 알따브 후쎄인을 축하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여기저기로 떠나가는 젊은 가슴들은 터질듯이 끓고있었다.
나는 어디로 갈것인가?
 
비슈와나스의 마음은 맑고 푸른 하늘의 흰구름처럼 둥둥 떠가고있었다.
우선 그의 앞에는 샤르마가문의 광활한 령지가 펼쳐져있었다. 지평선끝까지 물결쳐간 이랑들이 어서 오라 손저어 부르고있었다. 거기에 가면 숱한 농군들이 엎드려 절을 할것이며 한평생 그 땅을 타고앉아 가문의 주인으로 군림해있을것이였다.
라챠만 다스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마지않았다. 그것은 장차 가문을 이끌고갈 미래의 주인이 바로 비슈라고 생각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것은 비슈와나스가 가문의 장손이기때문에서만이 아니라 그가 활동적이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있다고 인정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광활한 가문의 령지가 그의 앞에 펼쳐져있어도 젊은 가슴속에 자리잡은 희망의 두루미는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날고있었다.
신식교육을 받은 그의 가슴속에 퍼덕이는 두루미는 가부장적인 봉건의 구름이 짙게 떠도는 그 땅의 어둠을 박차고 만리창공에로 그냥 날고만 있는것이였다.
희망의 눈길을 저 멀리 아득한 창공에 얹지 않는다면 결코 아름다운 날개를 펼칠수 없으리라.
령지는 현재 큰할아버지가 관리운영하고있지 않는가.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도 거기에 있지 않는가. 령지는 나 아닌 딴사람도 관리할수 있는 일이다. 또한 그 령지에는 이 세상을 실컷 돌고돌다가도 언제든지 내려와앉을수 있는것이고…
그의 힘과 열정은 누를래야 누를수 없는 샘의 분출마냥 마구 솟구쳐올랐다. 한껏 퍼덕이는 희망의 나래는 어디로든지 훨훨 날아야 했다. 운명을 맞받아 그 어디로든지!
 
대학 마지막 1년을 특별학과목으로서 기자학을 배운 그의 머리속에는 《취재》, 《보도》, 《론평》, 《출판》과 같은 어휘들로 가득차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가슴속에는 세계의 여론을 대변하고 조정해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있었다. 또한 대학기간 상업금융을 전공한 그에게 있어서 《화페류통》, 《신용체계》, 《은행기구》와 같은 경제술어들도 매우 친숙한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생각했다. 발전하는 사회에 맞게 기업체들에서 은행과 가지는 거래의 절차와 실무 그리고 경제원리들을 잘 알고 그것을 자기의 직업에 활용하면 보다 큰 능률을 낼수 있다고.
그것은 명명백백한 생활의 진리와도 같은것이였다. 그래서 그는 상업금융을 전공하였고 또 기자학을 배운것인지도 몰랐다.
 
그렇다. 인류의 발생과 때를 같이하는 가장 오랜 생활분야이며 인간사회존재의 항구적인 물질적토대인 경제의 제원리들을 모르고서야 그 무슨 일에선들 완전한 성공을 기할수 있으랴.
 
가문의 령지를 다스리는 일도 마찬가지일것이다. 토법에서 벗어나 장차 신식기술, 신식경영체계를 도입해야 더 큰 수확을 걷을수 있을것이였다.
기자활동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사회생활의 기초인 경제를 모르면 이 사회를 깊이있게 해부할수 없는것이였다.
 
그 모든것을 생각하고있는 비슈와나스였다. 그야말로 젊은 비슈와나스의 사색은 포괄적이였고 상상의 한계는 끝이 없었다.
가슴이 벌어지도록 마주오는 세월을 안고 비슈와나스는 《트리뷴》에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렸다는듯이 반가웁게 그를 맞이하며 피. 엘. 쏜디는 말하였다.
 
《기다렸네. 나는 자네에게 기대가 가네. 글에서도 그렇고 신문의 기업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그는 언제나와 같이 웃고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직업적인 기자생활, 사회활동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신문사의 발판은 이미 닦아져있은것으로 하여 그의 출현은 모두를 기쁘게 했다. 일부 약삭바른 기자들에게는 위압감을 주기도 했지만.
그는 그 누구의 눈치를 볼것도 없었고 시작부터 자기의 주견을 가지고 자기의 성격대로 운명을 맞받아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첫달로임을 어머니에게 봉투채로 내놓았다. 두르가데비는 네가 처음으로 탄 로임이기때문에 내가 일생동안 간직하고있겠다고 하면서 아들의 장래를 축복하였다.
련이어 쏟아져나오는 그의 기사들은 평민들도 읽었고 상층들도 읽었다. 그것은 그의 글들에 량심의 호소가 비껴있기때문이였다. 그의 글들은 알기 쉽게 통속적으로 씌여지면서도 사건전달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점을 제기하고있었다.
이미 대학시절에 알려졌던 비슈와나스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점점 독자들의 인기를 획득해갔다.
매일같이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또 많은 사람들과 휩쓸리면서 그는 분주한 나날을 보내였다. 또한 다른 신문들도 매일같이 보면서 그는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자기 신문이 광고소개에서도 응당 첫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쏠리게 되였다. 광고가 없으면 신문이 돈을 벌지 못한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상업금융전문가의 눈은 역시 예리한것이였다.
그는 광고주문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판쟙국립은행 총재가 어느 한 기자회견에 나오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이런 때를 비슈와나스는 기다렸던것이다.
사람과의 교제에서는 《우연의 기회》를 선택하는것이 보다 자연스러운것이다. 그것은 우연의 기회야말로 서로가 누가 먼저 찾아간 자리도 아니며 따라서 동등한 위치에서 호상 자존심이 손상당하지 않게 하기때문이다.
 
기자회견후 비슈와나스는 그 은행총재와 자연스럽게 마주서면서 자기 소개를 하였다. 그러자 은행총재는 신문을 봐서 당신이름을 이미 알고있다고 하는것이였다.
비슈와나스는 몇마디 그 은행에 대하여 례찬하였다. 그 은행은 인디아에 100개의 지부를 가지고있는 큰 은행이였다. 그 은행은 당시에도 컸고 지금도 큰 은행으로 존재하고있다.
 
이런저런 말을 하던 끝에 비슈와나스는 웃으며 말하였다.
《총재선생님, 판쟙국립은행이 우리 신문에 광고를 주면 저는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비슈와나스는 이미 이 은행이 《트리뷴》과 관계가 좋지 않기때문에 자기 광고를 싣지 않고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이 총재는 즉석에서 말하는것이였다.
《물론 그 신문이 큰 신문이긴 하지만 지난 시기 그 신문이 우리 은행에 대해, 또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기사를 썼기때문에 나는 광고를 주지 않아.》
 
예견했던바였다. 아주 로숙하고 숙련된 총재가 금방 20대에 들어선 젊은 기자에게 닫아맸던 존엄의 문을 쉽게 열어줄리는 만무한것이였다. 하지만 절절히 말하는 젊은 기자의 목소리에는 진정이 어려있었다.
《지난 일로 하여 어른들이 계속 등을 돌려댈것은 없다고 봅니다. 총재선생님도 기업인인데 서로 화해하고 우리 신문에 광고를 실으면 모두가 좋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비슈와나스의 그 말에는 신문에서 보아온 그의 기사에서처럼 나이보다는 큰 호흡이 흐르고있는것이였다. 하지만 총재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자존심이 꿈틀거리고있었다.
《아니, 나는 싣지 않아.》
 
끝까지 존엄과 체면을 지키려는듯 이 한마디를 내뱉고 총재는 가버렸다.
그로부터 며칠후 그 은행총재가 참석하는 행사장에 비슈와나스는 우연인듯 또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총재에게 깍듯이 인사만을 할뿐이였다. 이번에는 총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마도 이 순간을 비슈와나스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다렸던지.
 
《비슈와나스, 네가 권고한것을 내가 심중하게 생각하고 신문사와 화해하는것이 좋겠다고 결심했소.》
 
순간 비슈와나스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올리였다. 예견대로였다. 기업가의 심리는 달리 될수 없는것이였다.
《감사합니다. 총재선생님! 그럼 제가 래일 찾아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이렇게 되여 비슈와나스는 다음날에 은행총재를 찾아가 만날수 있었으며 많은 광고주문을 받아안게 되였다.
 
피. 엘. 쏜디는 매우 기뻐하였다. 처음으로 광고주문을 받아가지고온 비슈와나스에게 그는 말하였다.
《넌 기자활동하면서 광고주문까지 받아왔구나. 네 로임을 10프로 올려주겠다.》
 
그때부터 비슈와나스는 추가적로임을 받으며 광고수집의 길에 나섰다.
그렇다. 기자학과 광고업은 평행으로 간다.
자본사회에서 광고업은 기자활동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수 있다.그것은 그 사회의 신문사들에서는 글을 쓰고 편집하는 편집국 못지 않게 판매와 광고모집을 전업으로 하는 영업국이 중시되고있기때문이다.
다시말하여 그 사회에서 광고업은 기자로서 동시에 할 일이였다.
상업금융학을 전공한 비슈와나스는 이것을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감수하고있었으며 따라서 실천에 옮기였던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광고수집의 초행길은 후날 그를 세계적인 《광고왕》으로 떠받들어올리였다.
신문사가 비슈와나스에게 매혹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말보다 글을 더 잘 썼으며 생각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그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주위의 눈길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의 존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자기의 위치를 더욱 뚜렷이 해나갔다.
언제나 실천적인 인간은 남보다 앞서나가기마련이다.
 
그때를 회상하여 비슈와나스는 언제인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일거삼득을 했소. 공부도 했고 돈도 벌었고 현실도 알았소. 나는 이 3가지를 다하였소. 이것이 나의 광고업자로서의 첫시작이요.》
 
그는 물질적부를 창조해야 했다. 그 물질적부를 언제까지 부모에게 의거할수는 없는것이였다. 모든것을 자기의 손으로 얻을수 있을 때만이 이 세상을 혼자서도 끝까지 뚫고나갈수 있는것이다.
비슈와나스는 젊은 나이에 너무도 많은것을 판단했으며 또한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개척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물질문명을 자랑하던 나라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것을 보며 인간의 존엄, 민족의 존엄이 어디에 있는가를 심장으로 절감하게 되기까지에는 비슈와나스의 앞길에,인류의 앞길에 아직 많은 세월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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