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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남북

문화 | -장편실화- 인생열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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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4-18 18:2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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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제 1 장

너는 어디로 가려니
사람들이여, 세계지도를 펼치고 대양들을 한번 찾아보라. 그러면 누구에게나 새삼스럽게 생각되는 대양이 있으리라.

태평양과 대서양사이에 있는 인디아양!
 
한 나라의 국호가 그대로 하나의 대양의 이름으로 명명되여있는것이다.
지구우에 그런 대양은 이 하나뿐이다. 그렇듯 인디아는 넓고넓은 나라인가.
아시아의 남부에 자리잡고있으면서 북부는 중국, 네팔, 부탄, 북서부는 파키스탄, 북동부는 먄마, 방글라데슈와 잇닿아있으며 그밖의 지역은 인디아양에 면해있는 반도의 나라 인디아!

세상사람들은 인디아를 가리켜 준대륙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령토가 넓고 인구수가 많은 나라라는 의미에 앞서 생활풍습, 기후풍토, 문화전통 등이 그 어느곳보다도 다종다양하기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세상에는 두 대륙을 차지하고있는 나라도 있고 인디아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도 있지만 그 나라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있지 않는것이다.
 
다민족국가인 이 나라에는 언어와 풍습 및 생김새가 서로 다른 민족, 종족이 자그만치 세계의 나라수와 맞먹는 200여개나 살고있으니 충분히 그렇게 불리울만도 한것이다.
민족, 종족이 많은 그만큼 이 나라에서 사용되는 언어 및 사투리는 800종이나 된다. 영어를 비롯한 외래침략자들의 언어들은 인디아 여러 언어들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일정한 수의 단어들이 들어갔을뿐 인디아의 언어들은 자기의 내적법칙에 따라 계속 발전하여왔다. 많은 현대인디아어들 벵갈어, 힌두어, 우르두어, 마라트어, 구쟈라티어 등은 풍부한 문예작품들을 가지고있다.
 
기후차가 심한 이 나라에는 동식물분포 또한 다양하고 생활수준, 문화수준이 각이한 그만큼 빈부의 차이 또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인것이다.
나라의 인구수는 오늘 13억에 이르렀고 수도에도 1 500여만의 사람들이 모여 붐비며 제나름의 각이한 생활을 펼치고있다.
비슈와나스는 자주 붐비는 이 도시를 떠나 북쪽방향으로 400키로메터정도 떨어져있는 고향마을을 찾군 한다.
그 마을이 바로 판도리비비마을이다.
 
그 마을은 단순히 그의 어린시절의 추억과 부모들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땅이 아니라 샤르마가문이 대를 이어 물려오는 광활한 령지가 펼쳐져있는 가문의 보다 큰 집이였다.
숱한 후손들이 바로 그 대지에 생의 명줄을 걸고 때로는 서로 웃고 때로는 서로 다투며 변덕많은 이 세상을 걸어가고있는것이였다. 서로 손을 잡든 싸우든 어쨌든 가문의 그 령지는 오늘도 떠나지 않고 옹기종기 몰켜선 후손들이 하나같이 매달려있는 생의 토양이였다.

세습적으로 근 200년동안이나 대대로 물려오는 그 땅은 무려 500정보에 달하였다. 그 땅을 손에 넣은 증조부는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였고 이제는 갈래갈래 늘어난 그 후손들이 모다붙어 땅을 관리하고있었다.
흐르는 세월은 그들속에서 빈번히 의견상이를 일으키군 하였다.
가물이 들어 흉작이 들 때면 더욱 그러하였다. 저마다 자기 몫을 달라느니 땅을 팔아 돈을 나누어가지자느니…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할수 없는 땅이였다.

가부장적가족제도의 법도에는 선친들이 살아있을 때에는 자손들이 재산을 가르지 못하게 되여있는것이였다. 앞으로 세대교체가 몇번 더 이루어지는 그때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비슈와나스의 세대들이 살아있는 한 조상의 유언을 어길 권리가 감히 누구에게도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고있었다.
이 땅을 500년, 아니 1000년이후에도 절대로 팔지 말라! 그리고 노나가지지도 말라! 노나가지기 시작하면 다 쪼각나고 마지막에는 없어지고만다!

이것이 증조부의 재산상속유언이였다. 샤르마가문에 어길수 없는 철칙으로 내려오는 이 법을 아직은 누구도 선뜻 허물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가문을 대대로 보존하라고 그런 유언을 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상의 그 어명을 과연 흐르는 세월이 언제까지나 지켜주려는지.

증조부는 가정의 화목과 단결을 위해 그런 유언을 남기였으련만 왜서인지 세월이 갈수록 가문에는 그 땅으로 하여 금이 가고있는것이였다.
흐르는 세월이 점점 비슈와나스의 가슴에 육감적으로 던져주는것은 세습적으로 물려받은 그 땅이 언제가서는 몫몫으로 나누어지게 될것이라는 예감이였다. 세대가 바뀌고바뀌면서 가문의 보다 큰 집은 족보에나 남아있겠는지 현실적으로는 생활단위로 쪼개져나갈것이라는 예감이 강했다.

부르죠아혁명이 일어난지도 벌써 몇세기가 흘러가지 않았던가.

19세기 

아버지의 이름은 바드리 나트 취바였다.
비슈와나스의 증조부 리쉬 샤르마를 그저 취바라고 불렀기때문에 아버지는 성을 취바로 쓰고있었다.
바드리 나트 취바는 의사였다. 그는 당시 호쉬아프르구역의 남쪽지역에서 유일하게 대학공부를 한 자격의사였다. 그때는 구역적으로 대학졸업생을 꼽을 정도였다.
구역에는 2 000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동, 서, 남, 북으로 갈라 한개 지역을 500개의 마을로 하고있었다. 판도리는 구역의 남쪽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여기에 역시 500개의 마을이 있었다.
바드리 나트 취바는 이 지역 사람들의 병을 돌보는 의사였다. 이 지역에서 그의 이름은 취바박사로 통하고있었다. 그는 일찌기 박사학위를 받았던것이다.
취바박사는 말을 타고 다니였으며 때로는 걸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쉬임없이 다니였다. 병이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찾고있었던것이다. 어떤 날은 20~30키로메터씩 걸어다니며 치료하군 하였다.
 
직업적인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친절함이 온몸에 배여있는 취바박사를 사람들은 따르며 존경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조건없이 무상치료를 베푸는 그의 이름은 주정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였다.
그리하여 당시 주장관이였던 영국인이 주정부의 이름으로 건물을 해결해주었으며 얼마간의 약품까지 보장받도록 대책을 취해주었다. 그것이 전인디아땅을 통치하던 영국인들이 저들의 《보호적인 시책》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그것으로 하여 사람들은 더욱더 바드리 나트 취바를 《신》처럼 모시였으며 그는 더 많은 시간을 환자들에게 바칠수 있게 되였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바드리 나트 취바는 아들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며칠만에 집에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그는 어린 아들이 그 기간에 배운것들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검열하였으며 또한 과제를 주기도 하였다.
어린 비슈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엄한 《책》이였다. 아들은 오직 그 《책》대로만 하여야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을 떠나있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그에 대한 양육과 교육교양은 주로 어머니가 하였다.

어머니 두르가데비는 명문가문의 출신이였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은 지극하였다.
두르가데비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나쁜 버릇이 붙으면 고치기 어렵다고 하면서 태여나는 자식들을 모두 대바르고 훌륭하게 잘 키우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두르가데비는 처녀때 고등학교를 나오고 2년제교원양성교육을 받은 자격교원이였다. 그는 가정교육과 정규교육을 잘 받은 녀성이였다. 그의 친정아버지가 프린슬리주의 교육상이였던것이다.
프린슬리주는 판도리마을에서 150키로메터 떨어진 두르가데비의 친정집이 있는 곳이였다.

당시 인디아에는 500개의 주가 있었는데 매 주들마다에는 마하라자(위대한 왕이라는 뜻.)들이 틀고앉아 통치하고있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영국인들이였다.
두르가데비의 아버지는 프린슬리주에서 그 마하라자의 고문이면서 교육을 담당하고있었던것이다.

비슈와나스의 아버지켠은 대체로 땅을 가지고 친족끼리 경작하며 과학연구활동에 종사했다면 어머니켠은 거의다가 정치활동에 참가하며 행정관료들을 하고있었다. 그런 혈통을 이어받아서인지 두르가데비도 100살을 넘긴 생애의 말년까지 신문을 많이 보며 국내외의 사건들과 정당들의 관계에 대해 자식들에게 말해주군 하였다고 한다.
결혼후 두르가데비는 판도리마을에서 교육활동에 모든것을 다 바쳐갔다.

판도리에는 소학교(5년제)가 하나뿐이여서 마을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 갈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물론 돈이 문제였지만 돈있는 사람들도 학교의 수용능력이 모자라 자식들을 학교에 다 보낼수가 없는 형편이였다.
두르가데비는 마을중심에 알맞춤한 건물을 하나 짓고 농민학교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리고 거기의 주인이 되여 농민자녀들에 대한 소학교교육을 시작하였다. 학년별에 따르는 교재들과 비품을 프린슬리주에 가서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를 자선가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웃들을 위해, 농군들을 위해 할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의무라고 생각하였을뿐이다.

두르가데비는 아이들을 가르치는외에는 언제나 말없이 조용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는 온 마을사람들이 이야기하였다.

비슈와나스가 그 농민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자 두르가데비의 명망은 더욱 높아졌다. 자식에게 주는 훌륭한 어머니의 교육교양이 농민학교의 모든 아이들에게 다 나누어지는것이였다.

농군들은 감지덕지해하였다.
예로부터 밥은 아무곳에서 먹을지언정 교육만은 교양있는 집에서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재물이나 권력보다도 진리와 도덕을 더 중히 여기는 정신으로 아이들을 교양하는 두르가데비의 말은 그야말로 《신》의 가르침과도 같았다.
두르가데비는 마을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비슈와나스는 농민들의 아이들과 함께 어머니에게서 배우며 소학교시절을 보냈다. 연줄연줄 태여나는 그의 동생들도 그렇게 배우며 자랐다.
마을에는 몇몇 안되는 토호들과 고리대들도 있었다. 그런 집의 땅을 부치며 연명해가는 소작농들의 집은 가난하였다. 대개가 그들은 한칸짜리 집에서 살고있었다. 낡은 양철판들을 무어 웃설미를 한 집들이다보니 우기에는 그 지붕으로부터 물이 흘러떨어지고 무더운 여름날이면 더운김이 확확 풍기며 추운 계절에는 차디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들은 그런 집에서 애들을 데리고 살며 가축을 치고 면양과 염소를 길렀다. 수백년동안 땅없는 농군들은 이렇게 살고있는것이였다.
그들은 한줄기 땅덩어리에 매달려 운명의 노예가 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였다.
이것이 봉건의 질곡이 짙게 드리운 20세기 전반기 인디아농촌의 모습이였다.
비슈와나스는 이 모든것을 보며 자랐다.

비오는 날 우산없이 진창길을 걷는 농군들이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농군들의 그 모습은 그의 뇌리에 가난한 인디아의 농촌의 모습으로 깊이깊이 새겨졌다. 그는 한생토록 자기 나라의 그 가난한 농촌의 모습이 가셔질 날은 언제일가 생각하였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디아농민들은 소가 늙어죽을 때까지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며 《우대》해주어야 하는 고달픈 생활까지 걸머지고있었다.
인디아와 같이 말못하는 짐승인 소를 우대하는 나라는 없다. 하기에 인디아는 세계에서 소마리수가 제일 많은 나라로도 유명하다.
그러면 그들이 소를 우대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뒤떨어진 농업국가였던 인디아에서 소가 힘든 일을 대신해주기때문인가.
아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부림소로 리용하면서도 명절때나 혹은 일상적으로 소를 잡아 맛있는 고기와 가죽을 얻고있지만 이 나라에서만은 종교적악습때문에 소를 잡지 못하게 되여있는것이다.
인디아주민의 대다수가 힌두교를 믿고있는데 그들은 자기가 죽으면 령혼이 동물로 된다고 생각하면서 소를 신성한 동물로 믿고있는것이다.
힌두교도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지어 그들은 뱀이나 벌레들까지도 죽이는것을 꺼려한다. 그러므로 데칸높은벌과 같은 숲속에는 독사들이 욱실거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있는 형편이였다.
지어는 공업도시들에서도 우대받는 소들때문에 사람들이 자유로 이 통행할수 없으며 자동차나 뻐스들이 조심히 다녀야 했다. 소가 농작물을 해치는 경우에도 그들은 소를 죽이지 못하고 보호하였다.
참으로 가난과 종교적악습으로 인디아농민들이 2중3중으로 걸머지는 부담은 컸다.
두르가데비는 이처럼 가난하고 우매한 농군들의 아이들도 차별없이 배워주었다. 머리가 총명한 아이들에게는 특별히 관심을 돌려 집에 데려다 재우고 먹이면서 공부를 시키기도 하였다.
무엇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르가데비의 타고난 미덕은 이웃들을 도와주는것이였다.
선량한 녀성의 가슴에는 남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
가난한 집 자식들을 돌봐주는 어머니의 의협심은 어린 비슈와나스의 가슴에도 깊이 흘러들었으며 그것은 그의 성장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두르가데비는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였다. 그의 소리없는 웃음은 가문을 화목케 하고 농사를 흥하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두르가데비를 존경하였다. 간혹 친척들끼리 의견상이가 생기면 모두 그를 찾군 하였다. 사리를 밝혀 조용조용 말하는 그의 설복에 리해 못할 사람이 없었다. 그의 온화하고 조용한 몸가짐, 자애에 넘치는 맑은 눈초리 그리고 마치 기도를 올리는듯한 겸허한 의견과 친절성, 이러한 모든것이 커다란 힘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샤르마가문의 가장인 라챠만 다스도 그를 좋아하였다.
샤르마가문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몇몇 안되는 토호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이였다. 그들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들이 가장 어려울 때마다 저들에게가 아니라 두르가데비를 찾아가기때문이였다. 그때마다 그는 농군들이 바쁜 고개를 넘어서도록 도와주군 하였다. 그러면 토호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은 마치도 저희들의 주머니에서 무엇이 나가기나 하는듯이 시기했다.
두르가데비는 주정부와의 관계도 좋게 가지며 사업을 잘해나갔다. 주장관을 비롯한 주의 관리들이 마을에 내려오면 그들을 대접했고 그 기회에 마을에서 도시와 련결하는 도로수리문제 등 제기되는것들을 설득력있게 제기하여 풀군 하였다.
이 모든것을 보며 어린 비슈와나스는 이 세상에서 자기 어머니가 제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저도모르게 가슴속에 자리잡게 되였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첫 학교는 어머니이다. 그들의 눈에 비낀 어머니의 모습은 곧 이 세상인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긍지가 높아갈수록 어린 비슈와나스의 가슴속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우월감과 배짱이 소리없이 깃들고 싹트기 시작하였다.
어린시절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미구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요인의 하나로 되는것이다.

그의 가정엔 사랑과 존경이 흘렀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것이였다. 그것이면 되였다. 부모와 자식간에 그것이 흐르면 그 가정의 앞날에는 어두운 그늘이 비끼지 않을것이기때문이다.
두르가데비의 젊은 시절은 농민자녀교육에 다 바쳐지며 흘러갔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이 마을에서는 누구나 두르가데비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였다.
마을에는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그리스도교 등 여러 교파들이 있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두르가데비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게 되였다. 늙은이, 젊은이 할것없이 그리고 농민학교를 나온 사람들도 그를 어머니라고 즐겨불렀다.

두르가데비는 온 마을의 어머니가 되였으며 그는 곧 이 마을의 상징으로 되였다.
언제 어느때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모르나 사람들속에서는 이 마을이 점차 《비비(어머니)마을》로 불리워지기 시작하였다. 두르가데비가 운영하던 학교도 《비비학교》, 바드리 나트 취바가 운영하던 병원도 《비비병원》…

그리하여 오늘은 정식 그 옛날의 판도리가 판도리비비로 지도에 표기되여 어머니마을이 인디아땅에 전설같이 생겨난것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아마 그래서 나온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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