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 평양은 민족대단결의 본향입니다 -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5-01 03:25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 평양은 민족대단결의 본향입니다 - 류미영 조선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전 위원장
오는 5월 2일은 지금으로부터 68년전 김일성주석님께서 력사적인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 남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대동강의 쑥섬에서 협의회를 진행하신 뜻깊은 날입니다.
풍치수려한 섬의 한복판에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세운 통일전선탑에는 그때 어버이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쑥섬협의회에 참가하였던 저의 시아버님(최동오)을 비롯한 통일애국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를 가리지 않으시고 몸소 이름들을 나란히 써주신 그 숭고한 뜻을 새겨볼수록 민족대단결위업에 쌓아올리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불멸의 업적과 수령님들의 유훈을 받들어 이 땅우에 통일강성국가를 일떠세워가시는경애하는 원수님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과 감사의 정이 가슴에 사무쳐옵니다.
이제는 제 나이도 구십을 훨씬 넘기여 몸도 예전같지는 않지만 온 민족을 위대한 품에 안아 통일애국의 길로 이끌어주신백두산절세위인들의 그 숭고한 웅지와 넓으신 도량, 대해같은 사랑과 은덕을 정녕 잊을수 없고 후세에 남기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충동에 못이겨 이 글을 남기고저 합니다.
민족이 안길 품
해마다 5월이 오면 나는 아름다운 대동강에 한척의 배와도 같이 두둥실 떠있는 쑥섬을 찾군 합니다.
예로부터 쑥이 많고 쑥향기에 묻혀있다고 하여 쑥섬으로 불러온 섬은 올해에 지난해와는 완전히 달라진 희한한 선경을 펼쳐놓았습니다.
새해의 첫아침 천도개벽한 쑥섬에 일떠선 과학기술전당의 준공테프를 끊으시며 강성번영할 조국의 래일을 축복해주시는경애하는 원수님의 환하신 영상을 텔레비죤화면을 통해 뵈오면서 솟구쳤던 격정이 봄꽃바다에 묻힌 쑥섬에 들어서며 더욱 세차게 일어번졌습니다.
제가 평양에 삶의 닻을 내린지도 어언 30년, 강산이 변하는 10년이 세번 흐르는 새에 평양도 변하고 쑥섬도 변하였습니다.
변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온 세상 사람들이 경탄하듯이 천지개벽, 천도개벽하였습니다.
1982년 4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탄생 70돐을 맞으며 제가 남편과 함께 평양에 왔을 때 저는 만경봉에서 록음이 짙어가는 쑥섬을 처음보았습니다. 그때 쑥섬에서는 대동강량안을 잇는 다리공사가 한창이였습니다.
그후 1986년 조국에 영주한 후 남편과 함께 충성의 다리를 통해 쑥섬에 가서 1948년 5월 2일 민족의 전설적영웅이신김일성주석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4월남북련석회의 지도부성원들의 력사적인 협의회가 있었던 사적지를 깊은 감회속에 돌아보았습니다.
김일성주석님께서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석한 남조선대표들을 높이 평가하시며 련석회의에서 채택된 결정들과 공동성명에 반영된 구국강령을 실제적으로 관철할 대책에 대한 의견과 소감을 나누도록 하시고 미제의 《단선단정》조작책동을 분쇄하고 통일적민주주의중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문제, 남조선에서 반미구국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한 명철한 교시를 주신 푸른 거목의 버드나무아래 협의회장소며 남녘의 원로인사들과 휴식의 한때를 보내신 여러 사적물들을 돌아보느라니 평양길을 다녀온 시아버님(최동오)이 하시던 말씀이 귀전에 쟁쟁히 울려왔습니다.
1948년 5월 평양에서 돌아온 시아버님은 축하의 인사를 안고 찾아온 친지들앞에서 축배잔을 높이 들고 격동된 흥분을 이렇게 터놓았습니다.
《왜정때 화성의숙에서 공부를 하셨던 그 김성주학생이 바로 김일성장군님이시였소. 보천보에 불을 질러 왜놈들을 전률케 하신 그 민족의 영웅이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이시였거던.
이제는 우리 민족이 안길 품이 있어. 그분은 확실히 우리 민족의 구세주이시야!》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여 민족의 대통운이 텄다고, 민족이 안길 품이 있다고 하는 시아버님의 열띤 토로에 모두가 우렁찬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그들은 지난날 빼앗긴 나라를 찾는다고 독립의 길에 나섰건만 이역만리를 방황하며 중경거지떼로 몰리우던 어제날의 민족주의령감들, 우국심은 있어도 옳바른 령수를 만나지 못해 애국의 변두리에서 헤매이던 백발의 독립운동자들이였습니다.
시아버님은 좌중을 둘러보며 《김일성장군님께서 국운이 참으로 풍전등화같이 위태로운 때에 반공을 한 과거도 불문에 붙이시고 주의주장의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애국의 량심과 량심을 하나로 합쳐 난국을 타개하자고 분에 넘친 은정을 돌려주시였으니 그 감사한 마음 무엇이라 이를길 없소. 이제라도 넘치는 영광을 간직하고 나는 김일성장군님을 위하여 〈불사이군〉하는 충신이 되겠소. 우리 민족주의자들이 나아갈 길은 오직 하나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공산주의자들과 합작, 단결해나가는 련공의 길뿐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가하였던 저의 아버님(류동열)도 자기의 결심을 이렇게 피력하였습니다.
《의산(시아버님의 별호)의 말을 들으니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독립군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믿음을 가지고계시는데 대해 감명을 금할수 없소.
일부 사람들이 독립군출신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시비질하며 따돌리려 할 때 그분께서는 사상이 다르다고 독립군출신들을 배척하는것은 고약한짓이다, …나는 집에서 제 밥벌이나 하며 편안하게 산 사람들보다는 총을 메고 싸운 의병이나 독립군들이 더 훌륭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고 하시며 독립군출신들을 국가의 중요한 간부로 등용하시고 만경대혁명자유자녀학원에서 독립군출신의 유자녀들도 함께 공부시키고계신다는데 그 누구인들 감동하지 않을수 있겠소. 나는 이것만으로도 김일성장군님을 받들어 결초보은하겠소.》
저의 부모님들만이 아닌 자리에 모인 참가자들 누구나가 다 한결같이 김일성장군님의 위인적풍모에 대해 찬탄하며 삼천리강산을 통일천하하실 민족의 유일한 령도자는 오로지 김일성장군님 한분뿐이시라며 참다운 애국의 길, 통일의 길에 떨쳐나설것을 결의해나섰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재미교포들이 발간하는 《독립》신문에는 이런 글이 대서특필로 올랐습니다.
《캄캄한 밤같은 미제와 리승만괴뢰통치하의 남조선인민은 은연히 평양을 민족해방의 성지로 인정하게 되고 김일성장군님을광명의 상징으로 삼았다.》
무릇 정치가에게는 정치적신념이라는것이 있습니다. 정치에 뜻을 품고 나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번 굳힌 자기의 신념을 바꾼다는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정치경력을 총화하는 로년기에 자기의 정치리념을 바꾼다는것은 누구나 쉽사리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슴없이 반공으로부터 련공에로 정치리념을 바꾼것은 어버이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에 공감하고 그분을 따르는 길이야말로 참으로 민족을 위하고 나라를 구원하는 길임을 확신했기때문이 아니였겠습니까.
1948년의 민족주의원로들은 그후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련공의 길에서 참된 애국의 삶을 빛내였고 준엄했던 전쟁의 나날 민족이 안길 품,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 주저없이 서울을 버리고 평양길에 올랐습니다.
4월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 남조선의 정객들, 반공에서 련공으로, 우국에서 애국의 길로 인생전환을 한 민족주의원로들은 거의 모두가 진정한 어머니품, 평양에서 영생의 삶을 빛내였습니다.
쑥섬의 통일전선탑에 새겨진 하나하나의 이름들이 신미리애국렬사릉과 재북인사들의 묘에 그대로 빛을 뿌리고있는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평양에 새겨지는 민족대단결의 력사가 얼마나 숭고하고 뿌리깊은것인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뿐아니라 후날 평양을 찾아온 각이한 인생들도 하나와 같이 민족을 한품에 안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품, 평양에 참된 삶의 닻을 내리였습니다.
1948년 그 잊지 못할 봄날에 민족이 안길 품이 있다고 호탕하게 웨치던 부모님들의 그 뜻깊은 말을 그로부터 33년후 남편 최덕신으로부터 다시 듣게 되였을 때 그 감동은 참으로 컸습니다.
독립운동에 나선 아버지를 따라 7살때부터 이국살이를 한 몸이지만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반공의 길에 잘못 들어선 탓에 해방후에도 미국이 쥐여준 총을 꼬나들고 민족대단합이 아니라 민족분렬의 길, 반공의 길에서 치욕의 오점만을 남긴 남편이였습니다.
지난 전쟁때에는 남조선괴뢰군의 몇 안되는 장성으로 손에 동족의 피를 묻혔고 전후에는 괴뢰외무부장관으로 미국의 《두개 조선》조작책동에 동분서주했던 남편이였기에 미국과 박정희의 버림을 받고 정처없는 타향길에 오르면서도 평양길을 두려워했던것입니다.
그러던 남편이 1981년 선친의 묘소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평양을 다녀와서 하는 첫말이 《우리에게도 집이 있소. 생의 닻을 내릴 보금자리가 있단 말이요.》라고 했을 때 저는 수십년전 평양길을 다녀온 시아버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와 같은 감격으로 온밤 남편의 이야기를 격정속에 들었습니다.
《여보, 나는 이번에 평양에 가서 김일성주석님을 만나뵈왔소. 주석님께서는 의산 최동오선생이 별세하기 얼마전에 〈덕신이 못된 놈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있지만 언젠가는 정신을 차리고 옳은 길로 들어설것이다.〉고 하였는데 최선생을 만나니 의산선생을 다시 만나는 심정이라고 하시며 죄많은 이놈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였소.
여보, 우리 주석님께서 계시는 평양, 선친들이 있는 우리 집으로 가기요.》
이렇게 되여 저는 이듬해인 1982년 어버이수령님의 탄생 70돐을 맞으며 처음으로 평양에 오게 되였습니다.
감격도 새로운 1982년 5월 3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금수산태양궁전(당시 금수산의사당)에서 저희 부부를 접견해주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평양에 와서 인생의 마무리를 한 선친들에 대하여 감회깊이 회고해주시다가 점심시간도 되였는데 식사나 하며 계속 이야기하자고 하시면서 식사실로 이끄시였습니다.
량옆에 우리 내외를 앉히신 수령님께서 먼저 잔을 드시고 선생과 부인의 건강을 위하여 이 잔을 들자고 하시면서 《우리 서로 연설을 하지 맙시다.》라고 하실 때 저는 감개무량해서 어찌할바를 몰랐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잔을 비우지 못하는 저에게 이 술은 백두산에 있는 들쭉을 가지고 만든것인데 도수가 맥주보다도 약하므로 조국에 왔다가 유명한 백두산들쭉술이라도 마셔보는것이 좋다고 따뜻이 권하시였습니다.
량친부모들로부터도 받아보지 못한 그 사랑에 저는 생전 처음 술잔을 단숨에 비웠습니다. 참으로 한가족이 둘러앉은 기분이였습니다.
그날 수령님께서는 우리 조국과 민족의 력사에 대하여, 조국통일에 대하여, 번영할 민족의 래일에 대하여 오랜 시간 귀중한 말씀을 많이 해주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 우리 부부가 조국에 영주하였을 때 또다시 반갑게 만나주시고 그분의 전사로서 《동무》라는 호칭으로 불리웠으면 하는 남편의 소청도 기꺼이 받아주시여 최덕신동무, 우리 함께 통일위업을 성취하는 길에서 생사를 같이합시다라고 뜨겁게 교시하시였으며 그에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임도 맡겨주시였습니다.
저의 남편은 1986년 9월 조국에서의 영주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번만 만나뵈오면 먼 과거에 품었던 소망과 오늘과 래일의 념원까지 다 헤아려보시고 일순에 가슴이 확 트이고 눈앞이 환하게 앞길을 명시해주시며 사랑과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김일성주석님은 참으로 저와 같이 반공을 하던 사람까지도 탓하지 아니 하시고 민족의 일원으로 꼭같이 포옹해주시는 자애로운분이십니다.》
저의 남편만이 아니라 각이한 인생의 길을 걸어온 수많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렇듯 지난날의 어지러운 잘못까지도 스스로 뉘우치고 련공애국의 길을 택한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곡절많은 자기의 생활체험을 통해 이 세상 그 어디를 보아도 우리 수령님 같으신분이 없으며 오직 수령님의품에 안길 때에만 민족의 운명이 구원되고 자신의 삶도 빛내일수 있다는 진리를 찾았기때문입니다.
민족을 위하는 애국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가 누구이든, 지난날 무슨 일을 했든 탓하지 않으시고 한품에 안아 민족대단결의 길에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의 품에서 저의 선친들이 그러했듯이 저희 부부도 참된 생의 걸음을 크게 내짚을수 있었습니다.
민족을 지켜주는 품
오늘날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이나 단합과 단결을 제창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민족의 단합과 단결은 바란다고 하여 저절로 이루어지는것은 아닙니다.
민족의 단합과 단결은 각이한 계급과 계층을 애국애족의 공통된 리념으로 묶어세울수 있는 위대한 사상, 민족의 존엄과 안전을 굳건하게 지켜갈수 있는 불패의 힘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단합, 억년 드놀지 않는 단결로 될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인 1996년 11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판문점을 찾으시여 민족의 화합과 대단결로 조국을 통일할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통일유훈을 기어이 관철하실 드팀없는 의지를 내외에 엄숙히 천명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수령님께서는 나라가 분렬된 첫 시기부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민족의 분렬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불면불휴의 로고를 다하시였다고 하시면서 북과 남이 합의하고 민족앞에 엄숙히 선언한 조국통일3대원칙과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은 조국통일의 3대기둥, 3대헌장이라고 명철하게 밝혀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일성 1994. 7. 7.》이라고 새겨진 판문점의 친필비앞에서 다지신 그 맹세대로 원쑤들이 조선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떠벌이며 《3. 3. 3붕괴》요, 《연착륙》이요 뭐요 하면서 쾌재를 올리던 엄혹했던 그 시기에 《위대한 수령김일성동지의 조국통일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와 같은 조국통일로작들을 몸소 발표하시고 수령님대와 꼭같이 민족대단결의 대하가 이 땅우에 도도히 굽이치게 하여주시였습니다.
지금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1998년 4월 18일 력사적인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자련석회의 50돐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서한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이룩하자》를 보내주시였던 때의 감격을 잊을수 없습니다.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세상에 류례없는 고난의 행군을 승리적으로 이끄시느라 그토록 분망하신 속에서도 어버이수령님의민족대단결사상을 더욱 심화발전시키신 민족대단결5대방침을 제시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는 남조선의 집권상층이나 여당과 야당인사들, 대자본가, 군장성들도 민족공동의 리익을 귀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그들과도 민족대단결의 기치밑에 단합할것이라고 하신 교시를 저는 그 누구보다 커다란 감격속에 접하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의 민족대단결5대방침을 받아안고 온 토론회장이 우렁찬 박수로 진감할 때 저의 마음은 50년전 4월남북련석회의장에 들어선것만 같았습니다.
통일애국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과거의 모든것을 불문곡직하시고 민족대단결의 한길에 내세워주시려는 위대한장군님의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과 넓으신 도량은 위대한 수령님 그대로이시였습니다.
사상과 리념, 주의주장을 초월하여 현재 애국의 소지가 추호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포섭하여 기꺼이 한길로 손잡고 나아가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민족대단결의 위대한 경륜은 2년후 삼천리강토에 자주통일의 열망이 활화산처럼 타번진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6. 15자주통일시대를 안아왔습니다.
북남수뇌분들의 력사적인 2000년 평양상봉때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으로부터 저희 부부가 받아안은 크나큰 사랑과 은정은 정녕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을수 없습니다.
온 겨레와 전 세계가 격정과 환희에 넘쳐있던 그때 조국통일사에 일대 사변으로 되는 평양상봉행사에 저도 참가하였으면 하는 외람된 소망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 늙은이의 마음속소원을 헤아려주신분은 우리 장군님이시였습니다.
력사적인 평양상봉이 한창 진행되고있던 시기 저는 한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장군님께서 저의 남편에 대해 추억해주시면서 북남수뇌상봉은 조국통일과 민족의 대단결을 위한 전민족적인 사업인것만큼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참가시켜야 한다는 믿음을 베풀어주시였다는 가슴뜨거운 사연을 받아안게 되였습니다.
남편이 위대한 수령님들의 대해같은 은덕에 천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지 10여년세월이 지났건만 남편뿐아니라 저까지 민족통일운동사의 한복판에 다시 불러주신 어버이장군님의 그 사랑, 그 은정이 너무 고마와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저는 력사적인 평양상봉기간 목란관을 비롯하여 위대한 장군님을 모신 영광의 자리에 민족적사변의 목격자로서뿐아니라 당당한 한 성원으로 참가하는 최상최대의 행운을 지니게 되였습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지니신 이렇듯 숭고한 민족대단결의 웅지와 하늘같은 덕망에 끌려 지난날 각이한 정치행로를 걸어왔던 남조선의 정계인사들과 오래동안 반공화국선전의 나팔수로 되여왔던 언론인들은 물론 대기업가들과 종교인들, 이전 군장성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이 6. 15자주통일시대에 련북통일애국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습니다.
온 삼천리강토가 감동의 환희로 끓어번지던 력사적인 평양상봉의 나날은 민족의 태양을 따라 7천만겨레가 사상과 리념,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넘어 서로 화해하고 단합하면 능히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통일훈풍이 북과 남을 뜨겁게 달구던 그해 8월 저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또다시 돌려주신 크나큰 은정을 받아안고 제1차 북남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 북측 단장으로 서울에 나가 수십년동안 한시도 잊은적 없었던 사랑하는 혈육들과 감격적으로 상봉하였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3박4일이라는 짧은 나날을 보내였지만 위대한 장군님께 남녘동포들이 진귀한 꽃바구니를 삼가 엮어올리고 각종 귀하고 뜻깊은 선물들과 감사의 편지를 앞을 다투어 드리는것을 목격하면서 민족의 구심점을 우러르는 남녘인민들의 마음, 평양으로 흐르는 흠모열풍을 직접 체험할수 있었습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펼쳐주신 6. 15통일시대의 벅찬 흐름을 타고 하늘과 땅, 바다로 민족의 화해와 단합, 협력과 교류의 물결이 뜨겁게 굽이쳤습니다.
온 겨레가 6. 15시대 조국통일운동의 주인으로 당당히 나선 반면에 외세에 추종하는 반통일세력들이 설자리를 잃고 력사의 기슭으로 거품처럼 밀려나는 놀라운 사변들이 일어났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6. 15통일시대와 더불어 민족대단결의 용용한 대하를 이루어내시였을뿐아니라 그것을 선군으로 굳건히 지켜주시였습니다.
불철주야의 선군길을 끊임없이 이어가시며 북과 남의 겨레들이 평양과 금강산, 서울과 제주도 등 삼천리강산의 방방곡곡을 오가며 통일잔치를 성대히 진행하도록 해주시고 외세의 침략과 도전속에서도 민족대단결의 화원을 가꾸어오시였습니다.
선군이 있었기에 우리 공화국의 국력이 비상히 강화되고 민족통일의 활로, 민족대단결의 대통로가 더욱 힘차게 뻗어나갈수 있었습니다.
하기에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2013년 선군절에 즈음하여 발표하신 로작에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선군혁명령도로 우리 민족끼리의 6. 15통일시대를 열어놓으시고 조국통일과 민족공동의 번영을 위한 고귀한 밑천을 마련하시였다고 하시였습니다.
저는 오늘도 확신합니다.
평양의 하늘가에 6. 15자주통일시대, 민족대단결의 우렁찬 함성이 터져오르게 하시고 선군의 위력으로 민족의 존엄과 운명, 대단결을 굳건히 지켜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불멸의 업적은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금문자로 영원히 아로새겨질것이라고.
민족의 미래가 꽃펴나는 품
민족의 대단결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통일강성국가건설을 위한 우리 민족의 지향이며 민족의 뭉친 힘에 희망찬 통일번영의 미래가 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을 너무도 뜻밖에 잃고 비운에 잠겼던 우리 민족이 경애하는 원수님의 손길에 이끌려 그처럼 무서운 힘으로 떨쳐일어나 자랑찬 선군승리의 개가를 울리며 불패의 핵강국, 자주의 백두산대국으로 세계를 주도해나가는 오늘의 눈부신 현실에서 저는 다시금 절감하고있습니다.
저 하늘의 태양이 영원하듯이 백두산민족의 단결의 구심점도 영원합니다.
김일성민족, 김정일조선의 또 한분의 태양으로 솟아오르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 탄생 100돐경축 열병식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나라의 통일을 원하고 민족의 평화번영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손잡고 나갈것이며 조국통일의 력사적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책임적이고도 인내성있는 노력을 기울일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하시였습니다.
세계의 한복판에 높이 솟아오르시여 온 누리를 세차게 진감시키신 그이의 연설에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민족대단결사상을 변함없이 받들어 가시려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절대불변의 신념과 의지,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이 땅우에 기어이 부강하고 번영하는 통일강성국가를 일떠세우시려는 한없이 넓고 깊고 뜨거운 위인적풍모를 크나큰 흥분과 격동속에 가슴깊이 절감하였습니다.
민족의 하늘, 운명의 태양이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온 겨레를 품어안으시고 민족대단결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고계십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5년전 12월, 민족대국상의 나날 어버이장군님의 령전을 찾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리희호녀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일행, 문형진 세계평화련합 회장에게 각별한 은정을 베푸시였습니다.
온 나라 인민들이 때식마저 잊고 피눈물을 씹어삼키던 그때 원수님께서는 조의방문으로 평양에 온 해외동포들을 위해 목란관에서 위로연도 차려주시였습니다.
위로를 받으셔야 할 상주께서 오히려 조객들을 위해 민족적향취가 풍기는 조선음식을 맛보도록 몸소 식사차림표까지 하나하나 보아주시고 세심한 사랑을 부어주신 그 뜨거운 인정미는 실로 만인을 감복시키였습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한번 믿음을 주고 손잡아 통일애국의 길에 내세워주신 사람이라면 끝까지 변함없는 믿음과 정을 주고계십니다.
반통일세력의 동족대결과 전쟁책동으로 북남관계가 파국에 처한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위대한 장군님과 6. 15시대의 력사를 함께 했던 이전 남조선《대통령》과 기업가의 유고와 관련하여 그 유가족들에게 화환과 조전, 구두친서를 보내주신 경애하는원수님의 전설같은 동포애의 정과 숭고한 민족애는 이 땅우에 민족대단결의 대하가 변함없이 흐르게 하는 근본원천입니다.
민족의 구성원들을 통일애국의 한길로 이끌어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애국애족의 품은 정녕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가장 위대한 품입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을 김일성, 김정일조선의 찬란한 태양으로 높이 모신것은 우리 민족의 더없는 행운이고 영광입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조미핵대결전의 최후승리를 위한 선군혁명령도로 그 바쁘신 속에서도 지난 2월 아흔다섯번째 생일을 맞는 저에게 은정어린 생일상을 또다시 보내주시였습니다.
저는 원수님의 대해같은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일념으로 어버이수령님의 탄생일인 4월 15일에 즈음하여 새로 일떠서는 려명거리건설장에 저의 지성어린 마음을 고였습니다.
려명거리, 그 이름만 불러보아도 위대한 수령님들의 자애로운 영상이 어려오고 민족대단결의 어제와 오늘, 래일이 하나로 응축되여 안겨옵니다.
우리 원수님께서 제가 남편과 함께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오러 여러차례에 걸쳐 달려갔던 못 잊을 거리, 우리 겨레가 영생의 모습으로 계시는 위대한 수령님들을 찾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굽이쳐오는 거리, 우리 장군님께서 룡남산마루에서 조선아 너를 빛내리라는 굳은 결심을 다지신 바로 이 거리에서 조선혁명의 려명이 밝아온다는 뜻에서 《려명거리》라고 축복해주실 때 저는 누구보다 깊은 감회에 잠겨 찬란한 통일강성국가의 려명을 그려보았습니다.
려명, 이 말속에는 내외의 반통일세력들이 제아무리 발악해도 밝아오는 조선혁명의 려명,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그처럼 바라신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의 려명을 막지 못한다는 력사의 철리가 깃들어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새겨볼수록 이 두 글자속에는 인공지구위성제작 및 발사국, 핵보유국의 지위에 당당히 올라선 김일성, 김정일조선을 세상에 둘도 없는 인민의 락원으로 전변시켜 세계에서 선참으로 강성국가의 려명을 맞이하게 하시려는 우리 원수님의 불변의 신념과 강인담대한 배짱, 강철의 의지가 맥박치고있습니다.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시여 우리 민족의 미래는 밝고 창창합니다.
머지않아 세계는 우리 원수님께서 이 땅우에 펼쳐주시는 천하강국, 진정한 한울나라를 목격하게 될것입니다.
* *
《인내천》을 종지로 하는 천도교에 입문한 이 녀인은 인간사랑을 사람의 근본미덕으로 믿으며 근 한세기를 살아왔습니다.
참된 삶에 대한 갈망으로 60여년을 보내고 평양에서 복된 삶의 30년을 살아오면서 깊이 느낀바는 백두산절세위인들의 민족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야말로 사람우에 사람이 없고 사람밑에 사람이 없는 인상무인, 인하무인의 참세상을 가꾸는 고귀한 밑뿌리라는것입니다.
경애하는 원수님을 구세제민의 한울님으로 높이 모신 평양은 진정 민족의 영원한 성지, 민족대단결의 본향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