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2. 첫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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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9-19 21:37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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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선 김련희 씨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2. 첫 사랑 김련희 북녘동포 ©자주시보
▲ 이앙기가 먼저 논밭에 모들을 꽂으며 앞으로 나가면 3명씩 조를 무어 교대로 그 기계 뒤를 따라가며 빈 포기들에 모를 꼽아주는 작업을 사람들이 하게 된다. 모내기는 제철 적기에 끝내야 하기 때문에 도시 사람들도 한 달씩 농촌지원활동을 나가서 이런 일을 함께 한다. ©자주시보
해마다 5월이면 전국적으로 모내기전투가 벌어진다.
대학에서도 평양시 강남군으로 농촌지원을 나가게 되었다.
우리 양복점에는 총 인원 12명중 2명이 처녀였는데 당시 21살이었던 나와 29살인 선옥언니가 가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교직원들을 20명 정도씩 3개조로 편성하였는데 한조는 60대의 박사선생님들로 꾸려진 박사팀, 또 한팀은 40~50대의 교수들로 무어진 교원팀, 다른 한조는 20대 총각들인 우리 대학 박사원생들이다. 우리 2명은 박사원 24명과 한조가 되었다.
항상 부모님의 슬하에서 생활하다가 한 달 동안 외지에 나가 생활한다니 들놀이를 가는 기분이었고 더구나 나이 있는 교수들이 아닌 박사원 총각들 24명과 한조라니 엄청 들떠 있었다.
우리는 숙소를 잡고 드디어 한 달 동안의 농촌현실체험을 시작하였다.
함께 온 선옥 언니는 식당 집에서 주인아줌마와 함께 우리조의 식사를 보장하게 되었고 작업장에는 나와 박사원 24명만이 나가게 되었다.
우리 조는 대학에서 체육교원생활을 하다가 박사논문을 쓰기위해 박사원에 들어온 26살 리 선생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해보지 않던 농촌일이여서 많이 서툴렀지만 총각들 속에 단 1명뿐인 처녀라 매일매일이 즐거웠고 신바람 났다. 모내는 기계가 먼저 논밭에 모들을 꽂으며 앞으로 나가면 3명씩 조를 무어 교대로 그 기계 뒤를 따라가며 빈 포기들에 모를 꼽아주는 작업을 할 때도 박사원생들은 서로 자기들의 조에서 함께 일하자고 싱갱이를 벌려 나는 교대하지 않고 계속 따라다니며 빈 포기를 메워 나가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 나는 책임자인 리 선생과 점차 가까워졌고 하루일이 끝나도 힘든 줄 모르고 리 선생과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 빨리 다음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 함경도 순대, 돼지 내장 껍질만 봐도 쫄깃쫄깃한 맛이 절로 느껴진다. 북은 내장을 내포라고 부른다.
휴식일에 우리는 순대를 만들어 먹기로 하였다.
식당일을 맡아하는 선옥 언니와 나, 리 선생, 이렇게 3명에서 식당집 식구들까지 포함한 30명분의 량을 보장해야 했다.
돼지 밸을 깨끗이 씻고 그 속에 쌀과 잘게 썬 배추, 돼지내장 탕친 것을 피에 섞어놓은 순대속을 한참 넣고 있노라니 시간이 어느새 자정이 넘어 선옥언니가 피곤해 하였다.
여러 번 들어가라고 했지만 미안하다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우리 마음을 몰라주는 선옥언니가 참 야속하고 안타까웠다.
마침내 우리는 떠밀다시피 하여 선옥언니를 들여보내고 리 선생과 나만 남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을 꼬박 새고 새벽 5시까지 순대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다음날 박사원 선생들이 순대를 맛있게 드시며 밤새껏 수고 많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평안도 냉면 ©
어느 날 오전에 모내기를 마치고 박사원 선생들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집에 들어오니 주인아줌마는 자기 집식구들은 점심에 국수를 먹기로 했다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국수를 한 그릇 먹어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너무 반가웠지만 우리 선생님들은 모두 밥을 먹는데 나 혼자 시원한 국수를 먹는 것이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안에서 식사 중인 선생들을 피해 부엌에서 몰래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그릇 가득한 국수를 단 두세 젓가락으로 먹어치우던 나는 마지막 한입 가득 물고 이상한 느낌이 있어 머리를 들어 방 쪽을 쳐다보았다.
헉! 리 선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말의 뜻을 나는 이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 것 같다.
너무나 부끄러워 차마 리 선생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오후에 모내기를 하다가 잠간 휴식시간이었는데 리 선생이 나에게 알아맞히기를 하자고 하면서 지는 사람이 농촌지원 끝나고 대학에 들어가면 옥류관 냉면을 내기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련희 동무. 많이 배고파?”
가뜩이나 부끄러워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는 정말 숨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이게 웬 망신이야...
리 선생은 내가 힘들세라 항상 신경 써주었고 자상하게 일일이 나를 챙겨주었지만 어떤 때는 일을 하다가도 내가 다른 남선생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 눈을 꼿꼿하게 세웠고 한참을 나와 얘기 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철학부의 한 선생과 이야기를 하며 논 김매기를 하다나니 다른 선생들보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가고 있었다.
갑자기 리 선생이 나를 찾더니 “련희 동무는 오후부터 박사팀에 가서 일하시오”라는 것이다,
박사팀이라 하면 대학의 박사, 교수님들로 나이가 많은 선생님들로 무어진 노인조로서 크게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조직적으로 그런 조치가 취해졌겠지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박사팀에 가서 내가 이조에서 일하게 되었냐고 물으니 그 선생님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련희 동무가 여기 와서 할 일이 뭐가 있냐고 다시 가라는 것이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리 선생이 질투심에 나를 골려준 것임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 하루 종일 그와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싸움이라고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화해하군 하였다.
농촌에서의 한 달 간은 나에게 이성의 아름다운 감정의 싹을 틔워주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맺어준 참으로 소중한 나날이었다.
▲ 대동강 보트놀이 © 진보여리, http://blog.daum.net/mychosun/15857009
대학에 돌아와서도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내가 있는 청사에 자주 찾아왔고 강연회 때는 언제나 강당에서 내 옆자리에 앉군 하였다.
우리는 항상 대학정문에서 만나 함께 퇴근하였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 너무 빨리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대동교를 걸어서 건너다니군 하였고 비가 오는 날이면 퇴근시간에 우산을 가지고 우리 청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군 하였는데 꼭 우산을 한 개 가져오군 하였다.
주말이면 식당이나 영화관. 대동강 가에서 보트를 타군 하였고 함께 체육경기 구경도 많이 다녔다.
속담에 첫사랑은 깨지기 쉽고 대신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영원할 것 같던 우리의 사랑도 그만 끝을 보았지만 지금까지도 소중한 추억으로, 잊을 수 없는 아픈 상처로 깊게 자리 잡고 있다.
▲ 결혼식을 올리고 만수대언덕 동상을 찾아 인사를 하러 가는 북의 인민군 신혼부부들 ©자주시보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호케이(하키)선수와 7년 동안을 연애하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의 결혼식장에 초대되어 가서 사랑의 성공작품을 바라보느라니 왠지 마음이 허전해졌고 그 세계에 다시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리 선생과 같은 사람은 내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북쪽에 “금강산은 녀성적이고 묘향산은 남성적이다”는 말이 있다.
금강산은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하늘아래 숨김없이 다 내비치고 있지만 묘향산은 그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을 깊이 숨기고 있어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절묘하고 아름답다.
흔히 녀자는 아량이 있어야 하고 남자는 도량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여 녀자는 너그러운 이해심이 기본이고 남자는 폭과 깊이가 기본이라는 말 같다.
묘향산처럼 웅심깊고 도량있는 사람을 한번 만나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어느 외국소설을 보니 70살 되는 할머니가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이 “처녀 때 좋아했던 첫 사랑 남자가 있었는데 죽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만나볼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나도 그 말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 성장과정
김련희 북녘동포 ⓒ 자주시보
[편집자 주: 병치료 차 중국 친척집에 나왔다가 탈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그저 한국에 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탈북자 대열에 들어섰다가 아니다 싶어 한국에 들어온 날 바로 북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해오고 있는 김련희 씨가 장문의 수기, '따뜻한 내나라'를 본지에 보내왔다. 그는 수기에서 오직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다시 만나 단란하게 살고 싶은 자신의 소박한 소원을 하루 빨리 남측 당국에서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사실 수기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고난의 행군 시절 북에서 매우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런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온 가족들이 그래서 더욱 그립다는 것이다. 특히 생활을 자세히 그린 김련희 씨의 글을 통해 남과 북 차이점과 공통점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 이후 통일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인 상호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자세를 갖추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다.
사실 이 수기에 담긴 시절 북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기 때문에 특별히 북을 찬양할래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안법에 저촉될 만한 내용은 최대한 다듬어서 소개한 점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란다.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일부는 북의 어법을 살렸고 다른 것들은 남측에 맞게 다듬었다.]
1. 성장과정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평양에서 아버지 (김세환), 어머니(조원희)의, 1남 2녀 중 장녀로 1969년 11월 21일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대동강 텔레비죤수상기공장 부문당비서로, 어머니는 평양시 동대원구역병원 의사로 일하셨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세분만이 계시던 집에 첫 손녀가 태어난 것은 온 가정의 큰 경사였고 기쁨이었다. 불면 날아갈세라, 놓치면 잃을세라,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고 행복 속에 평양시 동대원구역 삼마동에서 나의 첫 삶은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단층주택였는데 본채는 방2칸과 부엌으로 되어있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우리 3형제가 살고 본채에 잇닿인 사랑채에서는 할머니가 계셨다. 집주변에 60평(북녘 평방수) 정도의 텃밭이 있어 할머니는 항상 여러 가지 작물과 남새를 가꾸는 일을 제일 좋아하셨다. 이른 아침에 부엌문을 열고 밖을 나서면 나보다 더 높은 키를 자랑하며 무성하게 뻗은 오이넝쿨에 매달려 있는 파아란 오이들이 아침이슬을 함뿍 담고 나를 제일 먼저 맞아주었다.
그 사이를 지나면 상추, 가지, 고추, 도마도, 찰강냉이가 분열행진을 하둣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있었고 요것들이 바람에 흔들릴까봐 걱정스러운지 그 둘레에는 왕당콩넝쿨이 든든하게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특히 상추와 오이 가꾸기를 즐겨했는데 그것은 제일 좋아하는 야채이기 때문이다.
왕당콩이 건강에 제일 좋다며 텃밭에서 수확한 콩을 넣어 해주시던 밤같이 구수한 밥맛은 지금까지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밥그릇이 들어오면 먼저 왕당콩을 골라먹고 당콩을 안 좋아하는 동생이 끄집어 내놓은 콩까지 내가 다 모아 먹군 하였다. 막내 녀동생이 키가 제일 작은데 할머니는 막내가 왕당콩을 싫어해서 키가 작다고 항상 꾸지람하군 하셨다.
우리집 마당 한옆에는 몇십년은 넘었을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우아한 잎새를 드리우고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그 높은 가지에 해마다 겨울이면 많은 명태들이 쇠줄을 입에 물고 가지런히 매달려 있었다. 겨울 내내 여러 차례 눈비를 맞으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 명태들은 제김에 꼿꼿하게 말라버린다. 그러면 우리 3형제는 심심하면 버드나무에 기어올라가 명태를 하나씩 챙기고 망치로 여러 번 두드려 먼저 눈알을 파먹고 다음 몸통을 뜯어먹군 하였다. 그 맛 또한 별맛이여서 어린 시절 우리 남매가 제일 즐겨 먹던 간식거리였다.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 할머니로부터 해방 전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시다 일제놈들에게 학살당하신 할아버지에 대한 투쟁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민족주의 량세봉사령과 함께 투쟁하시다가 1941년 일제놈들에게 붙잡혀 희생되셨고 할머니는 그분들과 생사를 함께 하며 밥도 해드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아들 3남매 중 팔로군에 가있는 두 아들은 중국에 두고 당시 9살이었던 막내인 나의 아버지만 데리고 조선으로 나오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직장생활 하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서 우리 3형제 손자들을 무척이나 사랑해 주셨는데 그래도 맏손녀인 나를 제일 예뻐해 주셨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대군인들이시다. 아버지는 무용으로. 어머니는 독창가수로 “전국군무자축전”에 참가하여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정다감 하면서도 섬세하고 철저하며 강하신분이셨다. 담배는 안 피우셨으나 술은 즐기셨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술에 취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고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아버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을까 하고 생각해보군 한다. 아버지는 직총(직업총동맹)에서 진행되는 전국로동자예술축전 집행을 책임지고 참가자들을 인솔하고 백두산도 여러 번 다녀오셨다.
어머니는 제대 후 신의주의학대학을 나오고 병원의사로 일하시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구역의 초청을 받아 방송차를 타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시군 하셨다 어릴 때 방송차를 함께 타고 다니며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듣던 생각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중에서도 초소의 꾀꼴새, 평북연변가, 도라지, 고사리, 등의 노래가 기억에 생생하다.
어머니는 나를 딸로, 때로는 친구로 다정히 대해주셨고 무슨 일이 생겨도 아버지보다 맏딸인 나와 함께 의논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셨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만성간염으로 가정에 가장 큰 걱정거리여서 부모님은 간에 좋다는 소의 눈알을 포함한 소고기, 산청을 나에게 자주 먹여주셨고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이렇게 온 가정의 따뜻한 사랑 속에 우리 3남매는 유달리 서로 우애가 깊었고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자랐다.
▲ 소학교 입학식-7 ©민족통신
▲ 소학교 입학식-7 상급학생들이 환영하는 모습 ©민족통신
나는 1976년 9월 1일 7살에 드디어 소(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어린 때를 벗은 당당한 학생이 되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국가로부터 공급받은 예쁜 교복을 입고 학교 첫 등교를 했던 그때의 날아갈듯 기쁜 마음은 지금도 심장을 다시 높뛰게 한다.
우리는 소학교 입학할 때부터 고등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2년에 한번 씩 국가로부터 교복을 무상으로 공급받는다.
여자 소학교로써 학급인원은 총 25명이였는데 모두 우리 집 동네에 사는 애들이라 함께 소꿉놀이 하며 지내던 가까운 친구들이였다.
하루는 오전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음악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더니 우리들에게 손뼉을 쳐보아라, 소리를 내 보아라, 하시더니 나를 포함한 12명의 친구들을 음악소조실로 데리고 가셨다. 나머지 친구들은 체육선생님과 미술선생님이 들어오셔서 각기 자신들의 소조로 데러갔다. 이렇게 학교에 입학하면 각 분야 선생님들이 매 학급마다 돌면서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골라 소조에서 재능을 키워주신다. 선생님들에게 선발되지 못한 애들은 그들의 선택에 맡겨 본인들이 가고 싶다는 소조에 가게 된다.
이렇게 모든 학생들은 오전에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각자 소조들에 가서 과외활동을 한다. 우리가 들어간 음악소조실은 삼면이 악기로 꽉 차있었는데 처음 보는 이상하게 생긴 악기들도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해보고 싶은 악기를 하나씩 골라보라고 하셨다. 나는 한쪽 옆에 듬직하게 있는 드럼이 좋아보여 그것을 하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그 악기는 경음악 기악중주를 할 때 기본 중심이여서 좀 예쁜 애가 했으면 좋겠다 라며 나에게 바이올린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쁜아이 측에 끼울 수 없는 그야말로 정말 안전하게 생긴 얼굴이다. 우리 3남매 중에서도 내가 제일 못생겨서 늘 예쁜 동생들의 미모가 부러웠다.
이렇게 하여 나는 소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고, 우리는 자신들이 선택한 악기를 하나씩 배정받고 매일 오후마다 음악소조실에 가서 악기연습을 하였다.
1980년 9월 1일, 드디어 4년간의 소학교과정을 졸업하고 평양랭천고등중학교 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유치원 높은 반부터 소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 이렇게 11년제 의무무료교육제도이다. 7살에 소학교에 입학하여 17살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군대나 대학, 사회현장에 나가게 된다.
나는 소학교에서 배운 바이올린을 고등중학교에 가서도 꾸준히 연습하여 음악소조 언니들과 함께 전국학생예술축전이나 유치원종합반주를 비롯한 전국공연들에 관현악이나 경음악기악중주로 참가하였다.
해마다 진행되는 학생소년들의 설맞이공연과 4.15축전 때마다 종합반주는 늘 우리학교가 맡아 놓고 하군 하였다. 모든 소조원들은 본인이 악기를 준비할 필요가 없고 학교에 입학해서 배정받은 악기를 졸업할 때까지 정히 쓴다.
체육소조에 들어간 다른 친구들은 배구, 농구, 축구종목으로 나뉘어져 훈련하였는데 전국적인 체육경기에 자주 나가군 하였다. 우리학과목의 체육수업에는 수영시간이 있는데 전국의 모든 학교들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학교수영장에서 일주일에 2번 정도 수영을 하게 된다.
또한 녀학생실습과목이 있는데 녀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매 학교마다에 꾸려져있는 녀학생실습 료리실에서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재봉실에서는 재봉기의 구조와 원리, 옷 설계, 재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료리시간에는 모두가 하얀 머리수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하게 되는데 집에서도 해 본적 없는 맛있는 음식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즐거움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5명씩 조를 이루어 료리를 하는데 수업이 끝나면 매 조에서 만든 음식들을 품평회하고 선생님의 평가도 받는다.
재봉실에는 가운데에 넓고 큰 재단상이 놓여있고 그 둘레에 벽을 마주하고 십여대의 재봉기가 놓여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재봉코 형성원리를 배울 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다. 제손으로 설계를 해서 자기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다는 것이 어린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해주었고 간단한 속옷을 만들어 완성했을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번은 코바느질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학급동무들이 장난을 치다가 한 친구가 넘어지면서 그만 손에 쥐고 있던 코바늘이 자신의 다리 종아리에 꽃히게 되었다. 우리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자 선생님이 달려와 그 친구를 업고 학교꼬마병원으로 뛰어가셨다. 친구는 며칠 후에야 학교에 다시 등교할 수 있었다. 지금도 코바늘을 보면 그때의 일이 먼저 생각나군 한다.
남학생들은 자동차실습실과 목공실에서 자동차구조와 원리, 운전방법, 그리고 목공기초를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 예체능 교육도 하지만 기본은 학습제일주의이다. 과목별로 담임선생님들의 주관 아래 자주 시험을 보며, 전교적으로도 학기말시험, 학년말시험을 본다.
나는 공부도 별로 잘하지 못했는데 수업자세도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수학시간을 제일 좋아 했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적어놓고 자체로 풀어보라고 시간을 주면 빨리 풀어버리고 옆의 친구들과 장난을 치거나 뒤로 돌아앉아 잡담을 하군 하였다. 보다 못해 선생님이 칠판에 다른 어려운 문제를 적어놓고는 나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와서 풀어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제시된 문제를 순간에 풀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더니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련희학생은 공부를 좀 하는 학생들 중에 제일 건방져요” 라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너무 부끄러워 얼마동안은 그 선생님을 피해다녔지만 그 대신 수업자세가 좋아졌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더욱 폭넓게 학습하기 위해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마다 한 학급씩 평양학생소년궁전의 과외소조에 한 달씩 교대로 다니면서 더 많은 지식을 배우게 된다.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은 1963년 9월에 건립되었고 10층의 탑식건물과 5층의 본관건물로 되어있다. 과학기술, 예능, 체육, 농업부분의 재봉반, 자수반, 외국어실습실, 기악반, 공작반, 서예반, 운동반, 무용반, 연극반, 가야금반 등의 소조실과 활동실 200여개를 비롯하여 총 500여개의 방이 있고 10층 건물옥상에는 천문대가 설치되어있다. 소년궁전 안에는 1100석 규모의 극장, 수용능력 500명의 체육관이 있다.
소학교, 중학교학생들의 과외활동을 기본으로 하며 공훈교원, 공훈예술가, 공훈체육인 등의 능력있는 지도교원들이 학생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며 이곳에서 과외활동을 지도받는 학생 수는 하루 평균 1만여 명에 이른다.
학생소년궁전은 1961년 개성에 건립된 개성학생소년궁전이 최초이다. 이후 각지에 140여 곳의 소년궁전 및 소년회관이 건립되었다. 우리 학급은 한 달 동안 평양학생소년궁전 화학소조에 다니게 되었는데 학교화학실험실보다 엄청나게 크고 멋졌다. 학교에서는 보지 못했던 희환한 실험기구들과 설비들이 우리들의 정신을 쏙 뽑아 놓았다. 내가 제일 기억에 남는 재미있는 시간은 내손으로 세수비누와 성냥가치를 만들고 기뻐했던 순간인 것 같다. 휴식시간이면 학급동무들과 소년궁전의 매 층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군하였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집에 가져와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아주 좋아 하셨다.
▲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자주시보
▲ 새롭게 개건 완성 된 만경대학생소년 궁전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
▲ 2013년 설맞이 공연을 하고 있는 만수대학생궁전 소조원들 ©
나는 고등중학교 3학년 시절 1983년 1월 1일 전국학생소년들의 설맞이 공연에 참가하였다. 해마다 설날이면 전국에서 뽑혀온 학생들과 재일조총련학생들의 기악과 노래, 춤과 동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종목들이 무대에 오르군 하였다,
12월 평양체육관에 설맞이공연 연습을 다닐 때 선생님은 감기에 걸릴세라 매 학생들의 목에 짓찧은 마늘을 넣은 페니실린병을 매달아 주고 소금물로 함수를 시켜주시군 하셨다.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도 많았는데 그들은 저녘에 하루연습이 끝나면 행사버스를 타고 평양시 봉화산려관에서 숙식하였다.
우리 평양랭천고등중학교 음악선생님은 이름 있는 전문가이셨고 우리학교 음악소조원들은 평양에서 진행되는 모든 예술축전들에 빠질 수 없는 능력있는 집단이었다.
해마다 진행되는 학생소년들의 설맞이공연과 4.15축전, 때마다 종합반주는 우리학교가 맡아놓고 하군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학교를 마지막까지 다니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우리집이 국가로부터 더 크고 좋은 새집을 배정받아 1985년 평양시 동대원구역 삼마동 단층주택에서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 새로 지은 현대적인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 미래과학자거리 아파트 살림집 내부 ©자주시보
새집은 큰 거실과 방3칸, 부엌, 위생실, 창고로 되어 있었고 매 방마다 고급가구들이 들어있었다. 거실에는 신발장이 놓여있었고, 방들마다 양복장, 이불장, 편수책상, 팔걸이의자, 부엌에는 찬장과 식탁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차례진 것들이었다.
우리는 국가로부터 돈 한 푼 내지 않고 살림에 필요한 고급가구들이 들어있는 새집을 배정받는다. 우리 아파트 정면에는 평양고려호텔과 윤이상음악당이 있고 왼쪽에는 평양역전,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에는 평양대극장이 바라보이고 뒤쪽에는 대동강이 흐른다.
우리 집은 20층짜리 아파트 14층인데 3개의 인민반으로 나누어져 있고 한 층에 4세대씩으로 옆집들과 친척같은 조용하고 화목한 분위기속에서 재미있게 생활하였다.
처음으로 해보는 아파트생활은 모르는 것도 많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어린나이에 첨 타보는 승강기여서 필요 없이 일부러 구실을 만들어 하루에도 몇 번을 승강기를 타고 아파트를 오르내렸다. 단층에 살 때는 아침에 자신들이 편한 시간에 자기 집 앞에만 청소하면 그만이었는데 아파트에서는 매일 아침출근시간 전에 인민반 주민들이 함께 아파트주변을 깨끗이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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