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고난의 행군 1. -농촌 아낙네로 거듭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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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9-28 18:0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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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4] . 고난의 행군 1. -농촌 아낙네로 거듭나기
김련희 북녘동포 자주시보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시절 최전연 군부대를 찾아왔다가 돌아간 길을 바라보며 환송하는 북 여군들, 이런 최전연 부대까지 부대가 있는 곳에는 관련 군인가족들이 생활하는 마을이 있는데 북은 그런 마을에서 농사를 지어 군인들을 보살피는 자력갱생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딸이 3살이던 1997년 남편이 군부대 려단군의소 군의관으로 임명받아 우리 식구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내 나이가 29살이라고는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한시도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본 적 없고 더욱이 지방에 전혀 가본 적 없는 나로서는 참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부모, 형제를 떠나 멀리 지방에서 그것도 군인가족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연약한 내가 꽤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안해로서 남편이 가는 길을 어차피 따라야 하니 나는 마음을 다잡고 가족들과 재미있게 생활하던 직장동료들의 바래움을 받으며 기차를 타고 내가 나서자란 정든 고향, 평양역을 떠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사방 산들에 둘러쌓이고 주변에 자그마한 마을이 점점이 자리 잡고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는데 처음으로 접하는 시골풍경이라 다소 신비스럽기도 하였다.
그 마을 곁에 우리 군부대가 있었고 한번 시내로 나가려면 1시간정도 차를 타고 가야했다.
평양의 온수난방아파트에서만 살다가 지방의 석탄을 때야하는 단층집에서의 모든 생활은 많이 낯설었다.
지방에 내려와 그곳 산골사람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고난의 행군“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기부터 우리 북녘에는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우선 극심한 자연재해,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계속되는 경제난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또한 북은 고난의 행군 전까지 동유럽에 트랙터 등을 대량 수출하는 등 세계 진보적 국가들과의 교역이 활발했었는데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자본주의로 복귀되면서 사회주의시장이 무너졌다.
다음으로 미국과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세계 최악의 대북경제봉쇄정책으로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없도록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우리는 호시탐탐 북을 붕괴시키려고 남쪽에 많은 핵무기와 세균무기를 끌어들이고 해마다 한미군사훈련을 진행함으로써 한반도에 항시적인 전쟁위협을 가져오는 상황 속에서 다시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길 수 없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핵위협에 대처하여 핵억제력을 키워나가야 했다. 바로 선군정치였다.
▲ 북 영화 '자강도 사람들'이란 고난의 행군 극복기를 담은 북 영화에 나온 대용식품들, 고난의 행군시절 멀을 것이 부족하자 니탄(이탄)이라는 흙까지 파내어 밀가루 등과 버무려 니탄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니탄 중에 갈대니탄만 먹어도 큰 해는 없다고 한다. 그저 허기나 달래는 음식이지 무슨 맛이 있겠는가.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식량이 부족하여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할 수 없었으며 전기가 없어 저녘마다 캄캄한 방안에서 등잔불과 함께 해야하는 등 일상생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웠다.
흥년 세월엔 뱀이 조이삭을 먹는다는 말도 있다.
사람도 먹을 게 없는데 집에서 기르는 개들도 먹을 게 없으니 강냉이 밭에 들어가 풋강냉이가 익기 전부터 먹어버리군 하였는데 그래도 얼마나 여위였는지 배가 등 뒤에 가 붙어 마치 굶주린 늑대를 보는 것 같았다.
강에는 물고기가 자취를 감추고 산에는 산짐승이 말라버렸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어린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소나무 껍질을 삶고 삶아 부드럽게 한 후 거기에 강냉이 가루를 뿌려 범벅을 하면 송기떡이 된다.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시절 정말 어려워 나물죽을 먹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있었지만 누구도 국가에 대해 불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모든 주민들은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 후대들에게는 외세의 침략이 없고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으며 그 길에서 자신의 청춘과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쳤다.
북 주민들은 ‘지금의 고난이 일시적이며 당과 수령만 믿으면 앞으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심으로 가득한 혁명적락관주의 속에 하루하루를 내 나라 부강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현 국무위원장이 고난의 행군이 끝난 후 잘 정리된 군부대를 현지지도를 하는 모습, 고난의 행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유난이 최전선 부대 현지지도를 많이 나갔다. 김련희 씨의 수기를 보니 배고프고 힘든 시절을 이겨내자며 군인들과 그 가족들을 격려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고난의 행군”의 전 기간을 지방에서 보냈다.
부대주변의 농장마을 집에 가보면 하얀 쌀은 눈에 보이지 않고 노란 강냉이쌀(옥쌀)이 드문드문 있고 대부분 산나물이나 감자를 썰어넣어 만든 잡곡나물밥이었다.
어떤 집은 감자 2알로 한 끼를 때우기도 하였고 손님이 오면 제일 난처해해서 일부러 식사 때를 피해 방문하군 하였다.
우리 부대에서는 군인들에게 3끼 밥이 다 차례졌지만 아침, 점심식사를 하고 저녁때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인들이 자신에게 차례진 밥을 줴기밥(주먹밥)으로 만들어 부대 주변 마을 어린이가 있는 집들에 가져다 주군하였다.
그러면 그 집 아주머니들이 다시 부대로 찾아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우리보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먹어야 한다며 항의하군 하였다.
하지만 군인들은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 집 문 앞에 몰래 놓고 도망가군 하였다.
우리 어른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만은 절대로 굶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군인가족들의 생활도 넉넉지 않았다.
국가에서 군인들에게 고기와 부식물을 넉넉하게 공급해 주지 못해 우리 군인가족들은 자신들의 가정살림보다 군인들의 식생활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했다.
우리는 군인들에게 고기를 충분히 먹이기 위해 한 해에 고기생산을 80㎏ 수행해야 했다.
▲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 후 새로 개건한 인민군 군부대 축사를 현지지도 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련희 씨의 수기를 보면 고난의 행군 당시에는 이런 현대적인 축사나 변변한 사료가 없어 군인가족들이 풀을 뜯고 먹이감을 모아 이런 가축을 길러 군인들을 먹였다고 한다.
군인가족들이 집에서 돼지나 염소, 토끼, 오리, 게사니(거위), 개, 등을 길러야 하는데 사료를 대주지 못해 한 가족당 200평의 밭을 나누어주어 그 밭에서 농사를 짓고 집짐승을 길러 부대군인들이 먹을 고기를 보장하게 하였다.
군관인 남편과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혼자서 하면서 200평의 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고 집짐승을 길러 한해 80㎏ 고기생산을 해야 하며 부대 군인들이 집 생각을 할세라 명절마다 집에서 갖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부대에 나가 군인들의 식탁도 차려주는 일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이 총 30여 가구 정도였는데 모든 가족들이 하루 종일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집에 있는 돼지에게 끼니를 끓여주어야 했고 틈나는 대로 토끼풀을 한 바구니씩 뜯어와야 했다.
평양에서 부모님 곁에서 고이 자란 나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힘겨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소하고 어려운 농사일이었지만 국가에서 우리 군인가족들을 믿고 군인들의 생활을 맡겨주셨는데 남들에게 질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야심차게 농사일을 배워갔고 짐승도 길렀다.
하지만 처음부터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손에 호미자루 한번 쥐어보지 못한 나에게 200평의 밭이 까마득해 보였고 남들이 몇 고랑을 김맬 때 겨우 한 고랑도 채 못나가는 정도였다.
손에는 물집이 생겨 아렸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퉁퉁부었으며 저도 모르게 설음으로 눈물이 쏟아졌고 부모님이 그리웠다.
우리 부대 군인가족들은 평양에서 와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로 힘들어 하는 내 마음을 알고 자신들의 밭일을 다 끝내고는 모두가 내 밭에 모여와 함께 웃고 떠들며 흥겹게 일손을 도와주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세라 친언니심정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정말 군인가족들이야 말로 군인들을 위한 일이라면 네일 내일이 따로 없는 큰 한 가족이었다.
봄부터 여름에는 뙤약볕에 지칠 정도로 힘들었지만 가을에 한해 농작물을 수확할때는 참으로 흐뭇했다.
강냉이, 완두콩, 팥, 감자, 고구마, 제법 농사군이 다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해보지 않던 육체적 부담을 이겨내지 못하고 평양에서부터 앓고 있던 간경화로 그만 쓰러져 군의소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해 있는 기간 부대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우리 집의 짐승들과 밭일을 도맡아 해주었고 우리 딸도 자신들의 집에 데려다 외롭지 않게 잘 돌봐주었다.
이렇게 서로를 위하고 남의 아픔을 항상 자신의 아픔으로 감수하고 한사람이라도 뒤떨어질세라 손잡아 이끌어주는 친혈육같은 가족들이 곁에 있기에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나 고난이 온다해도 무섭지 않고 이러한 가족들과 우리 군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다른 가족들은 한해에 돼지를 두 마리씩 길러내는 집도 있는데 우리 집 돼지는 야속하리 만큼 무게가 나가지 않았다. 한해에 돼지 한 마리 50㎏, 개 한 마리 10㎏, 토끼 10마리 30㎏, 이정도 밖에 더는 능력이 안 되는것 같다. 어떤 가족은 한해에 1톤의 고기생산을 해서 부대 군인들의 식생활에 큰 기여를 해서 높이 평가 받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너무 부끄럽지만 내가 군인들의 친누이가 되어 진정으로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계속>
[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3. 결혼이야기 |
그리운 첫 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뒤에 하고 나는 다시는 이성과의 사랑을 하지 않노라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부모님은 내가 정말로 시집을 안가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계속 선보라고 재촉하였다.
여러 명의 맞선 자리가 들어왔지만 나는 보지도 않고 키가 작다, 몸이 약하다, 못생겼다, 하면서 퇴짜를 놓군 하였다.
보다 못해 녀동생이 우리 집에는 남자들이 선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검사를 하려 오는 것 같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이 요구하는 사람과 약혼식을 하게 되었다.
약혼식은 우리집에서 량부모님들과 친척, 친지분들이 모여 비교적 큰 행사가 돼버렀다.
시부모님들이 해외출장이 있어 한 달 안에 결혼날짜를 잡았지만 약혼식이 있은 지 일주일만에 해외로 떠나셔서 우리는 시부모님을 모시지 못하고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 평양의 경흥지구
▲ 북의 결혼식 © 자주시보
결혼식은 보통강구역에 있는 경흥관에서 진행되었다.
중심앞쪽에 놓인 상에는 신랑, 신부가 앉고 그 량옆으로 놓인 상에는 친척, 친지들과 직장동료들이 앉아 음식을 먹으며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신랑, 신부를 축하해 준다.
결혼식을 끝내고 우리는 만수대 동상과 만수대예술극장, 개선문, 인민문화궁전에서 결혼기념사진을 찍었다.
▲ 인민문화궁전의 내부 모습, 이런 대형 회의실과 작은 회의실, 공연장, 전시, 식당 등 종합적인 문화봉사건물이다.
▲ 인민문화궁전은 우리민족의 멋을 잘 살린 뛰어난 건물이다. 김련희 북녘동포는 건물이 아름다워 그 앞에서 결혼식 기념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는 북 젊은이들이 많은 것 같다. © 통일뉴스 사진제공
인민문화궁전은 평양시 중구역 보통강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식 건물로 1985년 제9차 남북적십자회담과 제2차(1990년), 제3차(1991년) 남북고위급회담 때 회담장소로 이용된 곳이다.
흔히 연애기간을 상대방 파악단계라고 한다.
우리는 제대로 한 번 말도 해보지 못하고 상대를 전혀 모르는 채로 결혼하다나니 살면서야 비로소 조금씩 상대를 알아갔던 것 같다.
결혼식이 있은 지 여러 날이 지나도 결혼사진은 물론 남편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직장의 친구들이 너무 궁금하여 남편의 사진을 좀 보여달라고 조르군 하였다.
“내 남편 사진 볼 필요는 없어. 그냥 삶은 고구마를 벽에 던져 봐, 꼭 그 모습일거야.”
나는 친구들의 성화에 견딜 수 없어 이렇게 웃음으로 넘기군 하였다.
남편은 쾌활하고 인정이 많아 남의 아픔과 어려움을 보면 자기 것을 모두 아끼지 않고 바치는 성격이여서 주변사람들이 다들 좋아하였고 친구가 많았다.
단 술을 즐기고 담배를 많이 피워 우리 아버지에게 점수를 잃었다.
결혼한 지 1년만에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딸이 평양산원에서 태어났다.
산전산후 휴일제는 총 150일로써 산전 60일, 산후 90일로 되어 있으며 이 기간에는 출근할 때와 똑같이 식량을 하루 700그램 공급되고, 월급도 정상 지급된다.
다른 지방들에도 산원들이 있지만 평양에는 세상에 이름난 평양산원이 있다.
▲ 조선은 여성들의 건강과 신생아들을 위한 보건의료 정책의 기지로 평양산원을 꼽고 있다. ©이정섭 기자
▲ 평양산원 1층 출입구에는 동백꽃 등 우리의 아름다운 꽃을 보석으로 수를 놓아 그린그림이 깔려있다. 나라의 왕인 아이들이 처음 엄마품에 안겨 걸어나가는 길에 보석주단을 깔아주고 싶어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염원이 반영된 보석화라고 한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동생을 낳다가 눈을 감았던 어머니의 한맺힌 경험이 있어 여성들이 안전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평양산원을 건설하는 데 많은 정성을 쏟았으며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평양산원에만은 미역 등 모든 물품이 정상적으로 공급될 수 있게 여러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 평양산원에서 415번째 세쌍둥이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 [중국시민 제공]
1980년 7월에 개건되어 대동강구역에 위치한 평양산원은 아시아 최대의 산부인과 병원이다.
병원시설은 13층인 본관건물과 5개의 부속건물로 구성되어 있고 산과, 부인과, 구강과, 안과,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소생과, 동의부인과, 갓난애기과, 등의 전문과와 기능진단과, 실험검사과, 물리치료실 등이 설치되어 있다.
여성전용병원을 고려하여 내부는 동백꽃, 도라지꽃 등의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산모들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현관홀에는 100여 톤의 홍옥, 청옥, 황옥을 비롯한 천연보석주단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평양의 초산부들은 의무적으로 평양산원에서 애기를 낳도록 되어있는데 그것은 초산부 해산이 제일 어렵기 때문이다. 지방에 사는 임신부들도 산전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면 평양산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게 된다. 산모는 아기가 정상이면 일주일만에 퇴원하고 제왕절개수술을 한 산모는 두주만에 퇴원한다.
산모는 퇴원할 때까지 간호사들이 산후조리를 해주며 위생과 관련하여 가족, 친척들이 오면 병실에 올라가지 못하고 1층에 있는 텔레비죤 면회실에서 애기와 산모를 텔레비죤 화면을 보며 면회할 수 있다.
지방의 그 어느 곳에서라도 세쌍둥이 임신이 확인되면 비행기를 보내 산모를 평양산원으로 후송해 장기적으로 관찰 받게 된다.
세쌍둥이가 출산하면 개인당 전담의사와 간호사가 배정되어 4㎏ 될 때까지 맡아 키운다.
▲ 북에서 세쌍둥이에게 선물하는 은장도와 금반지 © 자주시보, ktv 화면갈무리
출생한 아기가 남자면 은장도를, 여자면 금반지를 국가가 선물한다.
나는 평양산원에서 제왕절개술로 아기를 낳고 2주만에 퇴원하려다가 갑자기 아기가 열이 있어 한 달 동안 산원에 입원해 있었다.
우리 병실산모 3명중 한 명은 지방에서 올라온 산모였는데 그의 말을 듣고 배터지게 웃던 일이 생각난다.
그 산모는 꼭 평양산원에서 아기를 낳는 것이 꿈이어서 해산하기 한 달 전에 평양에 있는 먼 친척 벌 되는 집에 올라와서 매일같이 운동을 하고 무거운 것을 들었다 놓았다를 여러 번 하면서 빨리 해산하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징조가 보이는 것 같아 그길로 산원 정문 앞에서 왔다갔다하다가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무턱대고 산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꿈을 실현학수 있었다고 자랑하는 것이었다.
진통이 오는 산모는 그가 누구이든 어느 지역에 살건 무조건 산원에서 책임지게 되어있다.
우리 평양산모들은 아기만 데리고 퇴원하지만 지방에서 온 산모는 퇴원할 때 국가로부터 철따라 아기옷과 아기담요, 포단을 선물로 받는다.
내가 한 달만에 산원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에 첫 손녀여서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딸은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의 최대 관심과 사랑 속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나는 산후 90일이 지나 아기를 업고 5개월 만에 첫 출근을 하였다.
여성들이 자녀걱정 없이 직장에 다닐 수 있도록 모든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작업반별로 탁아소, 유치원이 운영되고 있다.
우리 대학에도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어 아기를 업고 출근하면 먼저 탁아소에 들려 아기를 맡기고 자기 청사로 들어간다.
산후휴가를 마치고 출근하는 여성들은 모유를 먹이는 시기인 생후 8개월 정도까지는 두 시간에 한번씩 30분 동안 탁아소에 와서 자녀에게 모유를 먹이고 돌봐줄 수 있다.
이유식을 먹는 1년 정도까지는 오전, 오후 각각 한 번씩 탁아소에 간다.
딸이 얼마나 보채고 울보였는지 보육원선생님들이 우리 딸의 별명을 “꽃다발“이라고 지어주었다. 하루 종일 꽃다발처럼 안고 있어야 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튼 일하다가 탁아소에 가서 딸의 젖 먹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다.
▲ 해외 사이트에서 소개한 북의 탁아소, 울고 있는 한 아이를 안고 또 다른 아이의 미끄럼을 태워주는 보육원 교사의 모습에서 정성스러우면서도 경험많은 노련함이 느껴진다. 시설은 오래되어 보이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최근엔 전국에 탁아소 유치원 개건, 신축 열풍이 불고 있어 현대적인 시설을 잘 갖추어가고 있다고 한다.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대학탁아소에서는 아기들에게 여러 가지 예방접종이 있었는데 애기의 예방주사는 빠짐없이 맞게 하면서도 동 진료소에서 어른들에게 놓아주는 예방주사는 제일 맞기 싫었다.
한번은 출근하기 전에 매 집마다 진료소에서 쪽지가 전달되었는데 오늘 집에 있는 주민들은 낮에 진료소에 와서 주사를 맞고 직장에 나가는 주민들은 저녘 퇴근길에 진료소에 들려 예방주사를 맞으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주사를 맞기 싫어 일부러 저녁에 늦게 퇴근하면서 진료소에 들리지 않고 곧바로 우리 아파트로 들어갔는데 바로 현관 안에 담당의사 선생이 위생가방을 들고 서있는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담당선생에게 잡혀 예방주사를 맞고야 집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예방의학, 무상치료제이다.
누구나 태어나면 담당의사선생이 지정되며 성장하는 전 기간을 담당선생이 책임지고 치료한다.
의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담당세대들을 돌아다니며 주간에 별 이상은 없는지 일일이 체크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저녁에 모든 주민들이 퇴근하면 인민반 회의에서 위생강연을 함으로써 바뀌는 계절마다 건강에 각별히 주의하도록 부탁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간이 안 좋아 남들보다 병원신세를 많이 진 것 같다.
담당선생님과 부모님도 나의 건강 때문에 좋다는 약과 민간료법도 써보았고 료양도 3번이나 가서 여러가지 치료도 받았다.
▲ 북의 온천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북 주민들 ©
나는 애기를 업고 출근하기가 불편하여 우리 아파트 바로 옆인 김책공업종합대학 양복점으로 직장을 옮겼다.
퇴근할 때 대학정문을 나서면 바로 우리 아파트정문이여서 직장동료들이 무슨 출퇴근 하는 기문이 나겠냐고 우스갯소리로 나를 놀리군 했다.
이 대학에서도 매해 4.15가 되면 교직원학생들의 예술공연이 진행되군 하였다.
각 부서들에서 준비한 종목들을 전부 평가하여 당선된 작품들이 최종 대학경축공연에 참가하게 된다.
우리 부서에서도 중창, 독창, 대화시, 기악중주, 등을 준비했는데 나는 독창을 제외한 모든 종목에 다 참가했으니 아무종목이나 당선되어도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다.
우리 부서는 중창이 당선이 되어 대학 경축공연에 참가하게 되었다.
▲ 2014년 3월 1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관람하는 가운데 진행된 조선인민군 제1차 예술선전대경연의 한 장면이다. 북은 인민군대만이 아니라 모든 직장에 다 문화예술소조가 있어 경연을 자주 조직한다. ©자주민보
우리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의 요구대로 모든 분야에서 학습을 정상적으로 하는 것과 함께 자기 분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를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한다.
모든 기관, 기업소마다 새해 신년사가 나오면 자자구구 그 심오한 내용을 습득하고 매주 토요일마다 학습을 진행하여 상반년도 학습총화, 년간학습총화를 통해 우리당의 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함으로써 그 어떤 부르죠아 날라리풍도 침습하지 못하게 자신을 준비한다.
해마다 전국적인 문답식학습경연도 진행되는데 각 기관들에서 예선에 합격된 단체들이 모여 결승을 다투게 된다.
이렇게 사상사업뿐 아니라 맡은 전문분야에서도 2년에 한 번씩 자기분야의 기술기능자격시험에 응시하여 자신의 기술기능수준을 계속 높여나가며 매주 1회 기술학습시간을 가지고 서로의 좋은 경험과 기능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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