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 역사

본문 바로가기
역사

역사 | 33.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13 04:10 댓글0건

본문

33.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33.
항일의 명장 김일성이 이끄는 인민군은 인민의 군대라는 말처럼 인민을 보호하였고 양민을 학살한 흉악한 유엔군과는 대조되었습니다. 27일 오전 11시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에 다다르자 서울시민들은 급하게 가족의 손을 부여잡고 전쟁의 포화를 피해 부랴부랴 대도시인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민군이 서울근교까지 내려왔던 6월28일 새벽 2시30분경 어둠속에서 국군 공병대에 의해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습니다. 미군은 이승만 괴뢰를 이미 6월27일 새벽2시에 특별 열차 편으로 서울에서 대전으로 피신 시켰다. 그리고서 피난민들은 내려가지 못하게 다리를 끊어 뒤따르던 민간인들을 다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이승만과 제 놈들의 명령을 수행한 한국군 대령에게 잘못을 돌렸습니다. 실상을 모르는 한국인 중에는 “자기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이런 것을 보면 이승만은 전범이다.”라고 허수아비에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하지만 진범은 허수아비 이승만도 사형당한 최창식 대령도 아닙니다. 다리를 폭파한 시간 다리위에는 500명~800명의 피난민들이 있었습니다. 다리가 폭파 됐으나 피난민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폭파된 사실을 모르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서 계속 앞으로 밀려서 설사 어둠 속에서라도 폭파된 사실을 아는 피난민이 있다할지라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떠밀려 계속 한강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계속 밀려들어 밤사이 수 천 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강물은 핏물 이 되어 오랫동안 서울 한복판을 흘렀습니다. 한강은 한민족과 함께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미군이 다리 를 끊어 피난을 못 가게 해놓았는데도 친일매국노 일당은 다시 돌아와서 ‘부역자 처리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다리가 끊겨 피난을 못가서 인민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라며 무차별적으로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국군에 협조한 사람을, 그리고 국군의 점령지에서는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을 죽였다고 하지만 부역자처벌법이란 법까지 만들어서 보복살인 한 집단은 친일 매국노 일당의 반정부 범죄 집단이며, 대한민국이란 간판을 붙인 대한 괴뢰집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미군과 친일매국노는 선량한 우리 민족을 죽이는 살인자입니다. 인민군 치하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없었고 소수의 친일매국노들을 처단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군이 아닌 북한인민군을 해방군으로 불러야 옳지 않겠습니까? 부모형제를 죽인 흉악한 미군과 매국노로부터 우리민중을 해방시켜준 인민군이 해방군이었습니다.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흘만인 6월 28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시켰다. 이날은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미제의 침략도구인 유엔은 남의 나라 내전에 간섭하는 짓을 하였다. 남한군이 반격하여 서울을 탈환할 수도 있는 상태임에도 굳이 중국 대륙침략을 위해 유엔군을 파병하였다. 

애당초 인민군은 부산까지 남진하지 않고 서울만 점령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는데 유엔의 불법 개입 결정으로 확전이 불가피해지자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내렸던 것이다. 유엔군의 모자로 바꿔 쓴 미군과의 첫 전투는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 있었다. 

6월 27일 한강이남 전선을 직접 시찰한 맥아더가 29일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고 30일 트루먼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일본에 주둔해 있던 스미스 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하여 3일 오산에 투입되고 5일 죽미령에서 벌인 6시간의 전투에서 406명의 부대원 중 181명이 전사 및 실종하고 72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유엔군은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운 남조선을 구한 것이 아니고 직접 불법적으로 남의 내전에 뛰어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이 되자 미국은 우리국민을 다스리라고 친일 반역 매국노에게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이런 친일매국 지배세력은 북한이 남한 국민을 죽이기 위해서 핵을 만들었다고 지껄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민족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바칠 각오로 항일 투쟁의 한 길을 걸어 온 애국자인데 애국자가 자기 민족을 죽인다고 매국노의 입으로, 김일성도 가짜라고 사기 친 썩은 내나는 더러운 입으로 또 사기칩니다. 

- 입만 벌어지면 거짓말이 70년을 이여지고 있다. 보라 오늘을 -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불법 부정으로 뽑아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또 대법원을 보라! 저것들이 법공부를 한자들 인지를 - 또 다 키운 17살짜리 아들 딸들이 꿈을 안고 세월호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 여행을 가는데 그 자식들의 선생님란 같이 304명을 수장해서 대 학살을 해놓고 거짓말을 식은죽 먹듯이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친일, 친미 사대 매국 역적들을 보라! 그 인간쓰레기들이 바로 가짜 청와대고, 새누리당이고, 법무부, 국방부 조중동이다. 그것이 다 보안법이라는 것으로 - 미상전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림씀. 

1952년까지 미국이 전개한 야만적 공중 폭격전쟁으로 한반도의 북부와 중부는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도시의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부서져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주민들은 오갈 데가 없이 부서진 집 속에 토굴 비슷하게 파놓고 살아가는데 마치 원시인들 같았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빈민 소굴이요 난민 소굴이었다. 


식량도 동이 날대로 나버렸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집조차도 없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하나 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백만의 주민이 희생되고 , 살아남은 사람들은 굴속 생활로 생명을 이어갔으며 석기시대란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평양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은 1951년 1월 3일에 행해졌다. 폭격은 3일 밤에 시작되어 그 이튿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비행기는 15분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처음에는 소이탄, 다음에는 네이팜탄, 고성능폭탄, 그리고는 다시 더 많은 양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다. 

이러한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조직적인 구조작업은 불가능했다. 때때로 우리들은 시한폭탄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한번은 시한폭탄이 10분 간격으로 연속 폭발하였는데 이 폭탄들은 1주일 전에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공습에 희생되거나 다친 이웃, 친지, 가족을 구조 하기에 정신없는 동안 이 시한폭탄은 다시 이 구조대를 살상. 파괴하는 것이다.

 

공습과 포격에 의해 죽고 부상당한 무고한 시민들을 구조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미국의 행위에 대해 대부분 서방의 언론들은, 특히 미국의 유피통신 (UPI통신의 전신) 을 필두 로 해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외면하거나 왜곡된 당국의 발표를 복제해 내는데 그쳤다. 

이와 같이 극악무도한 범죄자 미국은 6.25 한국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국을 구해주고 지켜준 천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 하였습니다. 즉, 전범자 스스로가 북한을 전범자로 지목하며 한국국민을 속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은 중국대륙을 수복하여 장제스(장개석) 괴뢰를 세우려는 야망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첫페이지  |   코레아뉴스  |   성명서  |   통일정세  |   세계뉴스  |   기고

Copyright ⓒ 2014-2024 33.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