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63,64,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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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1-19 23:1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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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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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의 주력 앞머리가 매복권 안에 깊숙이 들어설 때 군도를 찬 마에다 중대장이 골짜기에 들어섰다.
마에다가 한그루 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추자 부하장교들이 모여들었다. 마에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지시를 줄 때 ‘토벌대의 주력부대가 전부 매복권 안에 들어섰다.
이때 김일성 장군은 사격신호를 내리었다. 아군진지에서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여러 문의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슈류탄이 적진으로 연해연방 날아갔다. 김정숙, 김선 등 녀전사들도 뒤질세라 묘준사격을 들이댔다. 함화(적들의 기를 꺽어놓고 투항을 부추기기 위한 전투중의 선전선동)가 효과를 보아 매복권에서 벗어난 신선대 놈들은 싸울 념을 않고 출행랑을 놓았다.
적진이 수라장을 이룰 때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였다. 아군 전사들은 멸적의 함성높이 남북 량측에서 적진을 향해 돌입하였다. 중상을 당하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군도를 휘두르던 마에다는 황천객이 되고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놈들은 무리로 죽어나자빠졌다. 녀전사들은 “우리는 승리했다!”하고 소리치며 기뻐하였다.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었다. 이날 전투에서 제 2방면군은 김일성 장군의 지휘 하에 적 70여명을 소멸하고 30여명을 투항시키고 ‘신선대’ 놈들은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싸움터를 수색하니 전리품이 기관총 6대를 망라하여 100여 자루의 보총과 권총, 무전기1대, 탄알 수만 발이었다.
김일성부대를 소멸하겠다고 기고만장하던 마에다 토벌대가 도리어 유인매복전에 걸려 졸지에 풍비박산 났다. 먼발치에 있던 정안군 300여명은 달려들 엄두도 못 내고 눈먼 총질만 할 뿐이었다. 김일성 장군은 로획한 기관총 6대를 전부 걸어놓고 정안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퍼붓도록 하였다.
정안군 놈들은 어둠을 타고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적들은 여러 날이 지나고 항일연군이 확실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서야 비로소 마에다의 시체를 삼도구로 옮겨갔다. 다른 시체들은 머리만 베어 몇 대의 마차에 싣고 갔다.
홍기하 전투가 있던 날 저녁 제2방면군부대는 산속으로 전이하여 여러 곳에 우등불(모닥불)을 피웠다. 밀가루로 뜨떡국(수제비로 보임)을 하여 포로들을 대접하였는데 포로 거개가 조선인 경찰이었다. 아군은 포로들 속에서 “보라 전장에서 불쌍하게 죽은 것은 조선 경찰이다.
일본 놈이 죽은 것은 불과 몇이 되지 않는다. 이제 더는 개 목숨을 팔지 말라!”, “항일련군을 따를 사람은 나서라”고 하면서 정면교육을 들이댔다. 포로들이 부모처자 생각해서 나서지 못하겠다고 하니 아군은 그들을 잘 대접하여 길까지 알려주어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일성부대는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국군이나 미군은 포로를 어떻게 대합니까? 다 알다시피 옷을 발가벗겨 놓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충견들은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북한을 보고 개처럼 짖어댑니다.
홍기하 전투 위력은 대단했다. 꽁무니를 뺐던 정안군 놈들과 포로들의 입을 통해 그 위력은 백배, 천배로 번져갔다. 김일성 장군 부대는 하늘이 보낸 부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반공에 악질적인 김일로까지도 항일련군의 덕분에 겨우 개 목숨을 부지하고는 항일련군이라면 진두에 나서기를 꺼리었다.
마에다 부대가 쫄딱 녹았다는 소문은 날개라도 돋친 듯 두만강을 날아넘어 조선 땅에도 쫙 퍼졌다. 김일성부대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싸울수록 본때스레 적들을 족치고 있다는 소식은 국내 사람들에게 최대의 힘과 위안이었다. -이상 연변역사연구소 리광인 부장 진술- 북에서는 1945년 말에서 46년 초 보안국 시절,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은 전부 숙청당하거나 월남하였습니다.
좌익이나 우익은 어느 나라나 있는 것이지만 매국노는 제거해야 될 대상입니다. 좌익이 매국노를 숙청하므로 매국노가 좌익에 대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애국자 국가유공자의 가면을 쓴 친일 매국노가 가르쳐 주는 대로 좌익은 흉악하다는 선전을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북한과는 대화나 접촉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폐쇄적인 사회 속에서 친일파들의 악선전만 듣고 자라 머릿속에 진리처럼 들어앉았습니다. 한국전쟁과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에서 흉악한 쪽은 어디였습니까? 우익 인사 중에도 애국지사가 많습니다.
김일성은 우익이라도 민족을 위해 독립 운동한 분들을 애국자로 우대 하였습니다. 친일 매국노들은 우익 인사도 아니고 바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도려내야 될 인간들입니다. 남한은 북한과는 달리 친일매국 세력들이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 북한 김일성은 일본군 및 친일 세력과는 적대 관계였으므로 악질 친일세력들은 지금까지 누리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대부분 남하하였고 적극적인 친일을 하지 않은 친일파만 남게 되었으며 그런 사람은 같은 민족으로서 처벌보다는 관용을 베풀어 포용하였습니다.
64.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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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수립 직후인 3월 7일 친일파 척결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친일파, 민족반역자 에 대한 규정’이 발표되기 하루 전 시행된 토지개혁도 지주계급 타파가 목적이어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은 계급투쟁이란 면에서 맥을 같이하고 있다.
북한은 “복잡한 계급투쟁의 환경 속에서 일제에게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복무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 그리고 일제의 강박에 의해 피동적으로 복무한 자들을 정확히 갈라서 처리하기 위해 채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의적으로 일제에 협조한 사람 외에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다. 남한에서 친일파 경력자로 분류된 무용가 최승희도 당시 처벌 없이 60년대까지 활동한 기록이 있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북한이 친일파 청산 심사과정에서 고위 간부가 아닌 공장 기술자나 예술인은 재심의를 거쳐 처벌하지 않았다”며 “친일파로 규정된 사람은 소련으로 가거나 노동현장에서 혁명화 과정을 겪었지만 북한 지역에 친일파로 분류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처벌 대상은 월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정적은 세력을 잃고 말았다.
남한의 기생세력들은 김일성을 가짜라고 지껄이다가 중상비방임이 드러나니 이번엔 김일성 부하가 친일파라는 소리를 해댑니다. 다음엔 또 뭐라고 모함을 할런지 끊임없이 모략을 만들어 내니 외세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 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겠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제국주의 시절에도 악명 높았던 반공법 즉, 국가보안법은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보다도 공산주의를 더 싫어했습니다. 히틀러에게 권력을 안겨준 건 서방 은행가들과 대기업들이었습니다. 히틀러가 공산주의를 파괴하고 근로자를 통제하는데 열광하였기 때문에 서방 은행가들과 대기업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올리버 스톤’이 말했습니다.
국가 보안법을 철폐해서 한국을 전복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선전이 아닌 바르고 정직한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과 여전히 대치중에 있는 한국의 안보 현실을 고려하여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제약해야한다고 합니다.
변견들은 북한과 대치중이라는 특수한 군사안보적 상황이기 때문에 기본권을 제한해도 합법이다 는 식으로 말을 하지만 반역자이며 매국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하면 별로 특수한 것도 아닙니다. 반역자, 매국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 대한민국밖에 없는 불법무법의 상태입니다.
견공들은 이와 같이 특수상황이기 때문에 제약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우리민중이 요구했던 대로 제 놈들만 사라지면 특수상황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로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자유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누려야할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밥숟가락 떠먹이듯이 특정 한 계층이나 국가가 지정한 사상만 머릿속에 담고서 생각 하라고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안보를 구실로 바르고 정직하게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입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됩니다. 거짓과 위선만 난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과 여전히 대치중에 있는데 대치하고 있는 목적이 미국의 식민지를 지키려는 것으로서 침략자에 기생하여 살면서 부모형제를 적이라며 적대시 하는 짓입니다. 현재 65만 한국군은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철통같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군이 자기 일가친척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것도 침략입니까?
침략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는 것 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은 남한이 남의 나라입니까? 같은 날짜에 나온 신문들도 서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 남조선 신문입니다. 2010.03.02일 조선일보는 북한의 100달러 위폐 '수퍼노트' 여전히 유통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2/2010030201180.html)
같은 날짜 경향신문은 미 국무부 보고서 “북, 슈퍼노트 제조 불분명” 이라고 기사를 썼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3021818065&code=910303)
65.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65.
북한도 우리국토라고 하면서 국가기밀을 다루지 않는 일반인이 자기나라 북한에 갔다 오면 다녀 온 것만으로도 왜 죄가 되는가? 인위적인 철의 장막을 치고 폐쇄적인 국가로 만들어서 북한에 가보지 못하게 하고 가난해서 딸을 100원에 팔았다는 등 거짓 선전을 해서 속이려는 짓입니다.
실제로 북한에 다녀온 어느 변호사는 TV 에서 내가 다시 눈 뜨고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소감을 말하였습 니다. 이분은 천애의 《고아》로 당당히 변호사에 합격하여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평생 반공 밖 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한의 부모가 전쟁 때 북으로 끌려간 아들을 이산가족 상봉 때 만났습니다.
아들이 부모형제 없는 북한에서 고생하는 줄 알았는데 김일성의 보살핌으로 직장에서 높은 직책의 일을 맡아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면서 북한에서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남에서 올라간 가족들은 모처럼 온가족을 만나 좋아서 가족끼리 화기애애하게 한동안 얘기하다가 남에서 올라 간 어머니가 너무 좋아서 우리 아들을 이렇게 길러주고 높은 직책도 맡겨 주신 김일성 부자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려야하지 않겠냐며 얘기하니까 나머지 가족들도 맞다 면서 전 가족이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에 절을 하는 장면이 TV 에 나왔었습니다.
이사람 뿐만 아닙니다. 모두들 북한에서 잘 사는 모습이 TV에 비쳐 지니까 작년 2009년 상봉 때는 TV 중계를 안 했습니다. 북한 선전 이라는 것입니다. 남한의 허위 선전은 방송에 나가야 하고 북한의 정직한 선전은 국민이 보면 안 되는 것입니까?
보모는 자기 자식이 어디가 아픈지 고민이 있는지 거짓인지 진심인지 아무리 오래 떨어져 살았어도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고생을 하고 살았는지 행복하게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감시가 없이 자유스럽게 가족들끼리 모여 얘기하는데도
자기가 믿고 있는 것 외에는 모두 불신 한다면 마약을 먹은 거와 같은 정신병적인 상태입니다. 3.1운동 때 33인의 민족대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라고 독립선언을 하였으나. 한반도 남쪽은 지금까지도 100년 동안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해방자, 친구의 탈을 쓴 침략자 살인자인 미국과 그리고 미국에 기생하는 인간기생충들이 부모 형제도 몰라보게 하는 마약을 세뇌교육을 통해 주입한 것입니다. 건강해 지려고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노력을해도 기생충이 있으면 건강해 지지 못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생충을 배제하지 않으면 평화교류하고 민족화해하고 노력해도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해방 후 많은 항일애국지사들은 조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고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반정부 빨치산 투쟁에 참가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자신보다는 민족을 위해 싸운 항일애국지사의 눈에는 북한이 정당하게 보이고 왜놈 앞잡이 노릇을 한 인간의 눈에는 남한이 정당하게 보입니다.
유엔에서는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군사정권에서는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3월에 유엔의 권고를 수용하여 이인모 노인을 북으로 송환하였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1917년 8월 24일 현 양강도에서 화전농의 가정에서 출생, 일제강점기 시절 반일운동 에 참가하였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인민군 종군기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1952년 1월 종군기자 활동 도중 체포, 34년간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시다가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최초로 북송 되었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지난 80년대 말 월간 ‘말’지를 통해 자신의 수기를 발표하였고 이것이 온 민족에게 큰 반향을 불러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공론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북송 당시 극도로 쇠약한 몸이었으나 이후 사람들에게 의지의 화신으로 불리면서 10년이 넘게 건강하게 사시면서 통일을 위한 밑거름을 남기셨습니다.
자신이 신봉하는 사상을 바꾸지 않았다고 하여 남한의 괴뢰 군사정권은 이인모 선생의 감방에 뱀을 집어넣는 뱀 고문 등 모진 고문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부당한 압력을 받을수록 불량한 인간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고 합니다. 마치 미국이 북한을 핵으로 위협할수록 북한 인민들은 배고파도 참고 인내하여 핵무기와 인공위성을 만들었듯이 부당한 압력에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남한은 북한을 반국가단체 폭력집단이라고 선전하지만 이렇게 기자를 감옥에 가두는 국제 규범이나 법도 필요 없는 폭력배인 남한 당국이 반국가 폭력 단체인 것입니다. 재미동포 출신의 북한 인권운동가로 올해 29살인 로버트 박 씨는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기 위해 2009년 성탄절 중국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義血靑年 로버트 박이 국경을 넘어 북한에 들어 간지 43일 만인 2010.2.6. 북한에서 석방돼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비 법적으로 입국하게 된 동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상을 훼손시키려는 서방의 그릇된 선전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데 있다.
《비밀나라의 아이들》, 《서울행열차》를 비롯한 서방의 영화들과 출판보도물들은 조선에 있지도 않는 《인권침해행위》와 《대학살》 그리고 조선그리스도 교인들의 《혹심한 고통》 등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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