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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66,67,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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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1-29 03:5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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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66.

이런 허황한 외곡선전은 그리스도교인인 나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심한 편견을 가지게 하였다. 그때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단지 기도를 드리고 단식을 하였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첫 시도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소식들과 편집물들이 나왔는데 갈수록 상황이 험악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식들에 접할수록 나의 마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였다. 

만일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굶주리고 죽어가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인들도 그런 처지에 있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 내가 그들을 도와준다면 천당으로 가고 그렇지 못하면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공화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였다. 

국경을 넘어섰을 때 나는 조선에 대한 미국의 그릇된 선전으로부터 군인들의 총에 맞아죽든가 감옥 같은 데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비법적으로 넘어서는 순간 범죄자인 나를 대하는 군인들의 태도에서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인들만이 아니라 공화국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인권을 보호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그리고 나의 건강을 몹시 걱정해주었다. 물론 부모들도 나의 건강에 대해 걱정은 한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나의 건강에 대해 부모이상으로 생각해주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정말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공화국에서 체험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은 서방에서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지난 기간 공화국에서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하여 기도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점차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였다. 사람들마다 내가 기도를 하는데 대하여 별다르게 여기거나 방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 놓고 매일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해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에게 성경책을 돌려준 것이었다. 이 하나의 사실을 놓고도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이것은 내가 평양시에 있는 봉수교회에서 진행된 례배의식에 참가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내가 예배의식에 참가해보니 거기에는 전도사도 목사도 있었다. 합창단도 있었는데 그들은 찬송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의식에 참가하여 나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봉수교회와 같은 그리스도교 예배당과 교인들이 조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지역들에서 전도가 진행되고 있으며 교인들이 성경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언제 어디서나 읽고 믿을 수 있으며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보고 들은 모든 사실을 통하여 조선에 대하여 잘못 리해하고 있었음을 절감하면서 서방의 악선전에 기만당하여 저지른 죄과를 심각히 반성하게 되였다. 공화국이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해 준다는 것과 모두가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고 당황하였으며 창피를 느끼었다. 이곳 사람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나를 사랑해 주었다. 조선의 현실을 잘못 이해한 탓으로 내가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데 대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에 진심으로 사죄한다. 내가 여기서 듣고 보고 알게 된 모든 것, 사람들 모두가 친절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12월 25일에 저지른 것과 같은 비법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이에 대해 사죄하는 바이다. 

나는 공화국정부 앞에 지은 죄를 씻기 위하여 조선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체험한 제반 사실들을 정확히 알려주어 그들이 옳은 인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조선반도에 통일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하루빨리 깃들도록 열심히 기도하겠다. 

요약하면 ①“군인들만이 아니라 공화국(북한)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줬으며 인권을 보호해줬다. 이곳 사람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나를 사랑해줬다”. ②"국경을 넘어섰을 때 나는 조선에 대한 미국의 그릇된 선전으로부터 군인들의 총에 맞아죽든가 감옥 같은데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비법적으로 넘어서는 순간 범죄자인 나를 대하는 군인들의 태도에서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③"군인들만이 아니라 공화국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인권을 보호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④"이곳 사람들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그리고 나의 건강을 몹시 걱정해주었다. 물론 부모들도 나의 건강에 대해 걱정은 한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나의 건강에 대해 부모이상으로 생각해주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정말 감사한다.". 

⑤"내가 공화국에서 체험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은 서방에서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평양시에 있는 봉수교회에서 진행된 례배 의식에 참가해보니 거기에는 전도사도 목사도 있었다. 합창단도 있었는데 그들은 찬송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⑥"나는 보고 들은 모든 사실을 통하여 조선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절감하면서 서방의 악선전에 기만당하여 저지른 죄과를 심각히 반성하게 되었다. 공화국이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해 준다는 것과 모두가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고 당황하였으며 창피를 느꼈다. 이곳 사람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나를 사랑해주었다".


67.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67.

이와 같이 말하니 어떤 사람은 북한의 연극에 속은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박은 연극을 관람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직접 주민들 속에 뛰어들어 만나고 이해 될 대까지 질문을 하고 말만 듣는 것이 아니고 표정과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보고서 본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로버트 박은 말로만 들었던 북한에 가서 북한 사람들을 직접 피부로 느낀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과 인간 이 갖는 기본적인 특성인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며 함께 생활하고 함께 얘기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로 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임을 오감을 통해서 느끼 고 깨달았습니다. 

로버트 박 자신이 서방세계에서 무엇을 듣고 자랐는지 북한 사람들은 알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하고든지 마음대로 만나서 어떤 주제를 꺼내서 얘기해 봐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해당하는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박에게 감응을 주는 얘기였으며 누가 시킨 각본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한사람을 연극이나 하는 로봇으로 굳게 믿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러시아나 중국 그 밖에 어떤 힘센 나라가 핵무기 미사일을 만들지 말라고 시키고 윽박지르고 협박 하여도 거기에 따르지 않고 핵무기도 그리고 인공위성까지도 만들지 않았습니까? 로봇처럼 누가 시키는 대로하는 남한 사람과는 다른 자유인입니다. 

주위에 북한에 다녀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이 북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얼마 안 되지만 성의로 받으라고 꽤 많은 북한 돈을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북한 사람은 괜찮습니다. 저희는 필요 없습니다. 국가에서 다 해줍니다. 하면서 사양하였고 그 분은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받으라고 하면서 진심으로 주고 싶었으나 받지 않고 그 북한 사람이 주실 필요 없다고 받은 걸로 하겠다고 오히려 열심히 설득하려고 애를 쓰고 끝내 안 받더랍니다. 

그 북한 사람이 짜증을 낼 정도로 넣어두라고 여러 차례 권하여도 화를 내거나 언짢아하지 않았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북한 사람은 남한 사람이 북한에 관해서 어떤 선전을 들어 왔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노비정부로부터 무려 10억 원의 지원을 받은 뮤지컬 ‘요덕 스토리’ 같은 비방선전물을 많이 봐서 로버트 박 같은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이인모 선생에 이어서 2차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이 2000.9.2. 에 있었다. 비전향 장기수들과 민가협 등 시민단체 회원들은 "남으로 다시 올 테니 건강해라" "북으로 찾아가 뵙겠습니다." 라며 서로의 건강을 당부했다. 93살의 노모 고봉희 씨를 두고 북으로 가는 신인영(71) 씨는 "어머니, 다시 오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눈물을 흘렸다. 

비전향장기수들은 북한의 가족들을 북한공산당이 해칠까봐 전향을 안 한다고 기생세력들은 사기를 쳐 와서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또 속은 것입니다. 북한에 2차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63명중 20명만 북한 출신이고 나머지 43명은 남한 출신입니다. 

남한 출신 중에서는 대구 경북출신이 9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43명의 남한 출신 중 북한에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12명이나 됩니다. 통일조국 염원을 안고 수십 년을 감옥에서 살면서도 자기 정치 신념과 양심을 지켜온 분들입니다. 

 그 12명은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오직 양심에 따라 기약 없는 줄 알면서도 옳은 길을 걸어온 분들입니다. 12명은 남한에만 가족이 있지만 가족에게 피해를 줄까봐 연락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군사괴뢰 정권하에서 비전향장기수를 모두 전향시키기 위해 고문을 하였다. 모진 고문에서도 죽으면 죽었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깡패를 고용한 괴뢰정권은 결국 양심수들을 고문하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사실이 세계 시민사회에 알려져 유엔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식민지괴뢰정부에 장기 양심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죽으면 죽었지 오직 옳다고 생각되는 한길밖에 모르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비전향 장기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1961년 6월 내(김석형)가 《중앙정보부》에 끌려 다니며 취조 받을 때 해방 전 일제식민지통치 시기 나를 고문한적 있는 김병길이라는 자와 맞닥뜨리게 되였다. 전기고문기술자로 소문난 이자는 《요놈의 새끼, 잘 만났다. 어디 뜨거운 맛을 봐라》고 지껄이면서 전깃줄 한 선은 나의 손에 묶고 다른 한 선은 발에 묶어놓은 다음 전기를 투입하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심한 경련으로 몸부림쳤다. 그래도 내가 전향하지 않자 이자는 잔인한 웃음을 띠우며 《씨까지 말려야 알겠는가》고 하면서 이번에는 전깃줄의 한 선을 나의 오른손에 연결하고 다른 한 선은 국부에 연결하여 전기를 다시 투입하였다. 나는 전신에서 불씨가 튀여 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68.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68.
나(우용각) 역시 철창 속에 갇혀있을 때 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였다. 대전《교도소》와 광주《교도소》, 전주《교도소》 등에 끌려 다니면서 나는 파쇼 교형리(사형을 집행하는 간수)들에 의하여 《통닭구이고문》과 《물고문》 그리고 방바닥에 쓰러뜨리고 온몸을 여러 겹으로 꼰 밧줄로 콩 타작하듯 내리치는 《타작고문》, 손발을 등 뒤로 결박하고 목고채를 목덜미에 끼워 넣고 비트는 고문 등 별의별 고문을 다 당하였다. 

그로 하여 무릎관절과 어깨뼈가 탈골되고 왼쪽옆구리갈비뼈가 전부 부러졌으며 목뼈까지 크게 상한데다가 늑막염에 걸려 온몸이 만신창이 되어버렸다. 그때 나에 대해 악착하게 고문을 들이대던 대전《교도소》의 《전향공작전담반》 반장 유종흠과 《교

회관》 라석규, 《교화사》 신하균 그리고 광주《교도소》의 《전향공작전담반》 반장 문승호, 《교화사》 리규연, 최한주 등 파쇼교형리들의 잔인하고 험상스러운 몰골은 지금도 저승사자처럼 눈앞에 스산하게 떠오르곤 한다. 

살인악마들의 야수적인 고문의 어혈로 공화국의 품에 안겨 행복한 삶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 비전향장기수 신인영은 생전에 자기가 당한 고문만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전향하겠어? 안하겠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세상이 두 쪽 나도 전향을 안 하니 포기해라>. 그러자 떡봉이 셋이 달라붙어 나를 밧줄로 묶고는 얼굴에 물수건을 덮었다. 

<야 고추가루 탔어?>. <탔어> 숨이 꺽꺽 막혀 내가 몸을 움직이자 한 놈이 내 얼굴을 치며 소리쳤다. <가만있어 빨리 고춧가루 물을 부어!>. 세상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의 하나가 코와 입을 통해 고추 가루를 탄 물이 그냥 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그저 붓는 대로 물이 들어가는 것이다. 

<커억, 쿨럭!>. <계속 부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나를 붙잡고 계속 물을 붓는다. 의식이 혼미해지고 어느새 기절한다. 그놈들이 다시 발로 배를 걷어찬다. 물을 다 게우면 또다시 고추 가루물을 부어댄다. 》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고문만행에 살인강도질을 일삼다가 잡혀온 폭력범들까지 동원하였다. 

내(조창손)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있을 때인 1973년 여름 어느 날 폭력배들이 《특별사동》 의 복도를 지나가다가 나를 향해 《야, 11방, 전향 안 해?》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나? 나는 전향 안한다. 》하고 말하자 폭력배들은 《뭐, 너 여기 나와, 이런 쌍놈의 새끼가 다 있어. 》하고 지껄이면서 나를 끌어내어 지하고문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천정에 거꾸로 매달고 《물고문》, 《불고문》 등을 가하면서 무려 8시간동안이나 몽둥이로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발로 차고 짓밟아댔다. 그리하여 나는 머리가 터지고 턱이 삐어지고 입이 째진 처참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반죽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파쇼악당들의 야만적인 고문만행으로 수많은 비전향자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하였다. 대전《교도소》에 있던 비전향자 리선우도 아침 일찍 끌려 나가 캄캄한 밤이 되여 시체가 되여 돌아왔는데 그의 온몸은 고문으로 시꺼멓게 멍들어있었다. 교형리들은 비인간적고문과 학대에 단식으로 항거하는 비전향자들에 대해서는 《강제급식》이라는 고문도 들이대었다. 

《강제급식》은 간수 여럿이 달려들어 단식하는 사람을 콩크리트 바닥에 쓰러뜨려놓고는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고무호스로 펄펄 끓는 뜨물 같은 멀건 죽물이나 굵은 소금이 채 풀리지 않은 차디찬 소금물을 마구 목구멍으로 들이미는 고문이었다. 이 무지막지한 《강제급식》고문으로 음식물이 식도가 아니라 기관지나 기도로 들어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1980년 7월 나(리종)를 비롯한 청주《보안감호소》에 감금된 우리 비전향자들은 야만적인 고문학살만행에 항거하여 집단항의단식을 한 적이 있었다. 집단단식에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우리는 《강제급식》고문장으로 끌려갔다. 《강제급식》고문장은 우리 먼저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배설물과 구토물로 질벅하였다. 

그 질펀한 바닥에 꿇어 앉히다가 나는 주춤하고 말았다. 왼쪽 콩크리트바닥에 김용성이 포승에 꽁꽁 묶인 채로 비스듬히 쓰러져 운명해 가고 있는것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그의 동공은 이미 확산되어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고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날 《강제급식》고문만행으로 김용성, 변형만 두 비전향자가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파쇼악당들이 우리들에게 가한 야수적인 고문만행을 꼽자면 끝이 없다. 비전향자 리용운과 황필구처럼 야수적인 고문과 비인간적인 학대에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인간이기를 그만둔 이 야수들의 잔악무도한 고문만행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비전향자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교형리들은 우리 비전향자들을 무참히 고문학살하고는 저들의 비인간적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그것을 《자살》로 꾸며놓기도 하였다. 대전《교도소》의 《최석기, 박융서 고문치사사건》은 그 하나의 실례이다.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1974년 4월 최석기가 사상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처참하게 때려죽이고는 목을 매여 《자살》한 것처럼 처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간수 김진태, 깡패 이돈욱 등은 비전향자 박융서를 몽둥이로 때리고 바늘묶음으로 온몸을 찌르고 나중에는 인두로 지지면서 모진 고문을 가하던 끝에 잔인하게 살해하고는 그의 배와 목을 유리로 마구 난도질 쳐놓고 《자살》로 꾸며놓는 치 떨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파쇼악당들은 고문과 학살로 비전향자들을 굴복시킬 수 없게 되자 고문 끝에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강제로 《전향》의 손도장을 찍게 하거나 고문으로 학살당한 사람을 《전향자》로 만드는 모략도 거리낌 없이 감행하였다. 

당시 광주《교도소》뿐 아니라 대전, 전주를 비롯하여 남조선각지에 널려진 《교도소》 들에서도 이러한 방법으로 《정치범전향 실적 올리기》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 강제전향책동으로 하여 적지 않은 비전향자들이 《전향자》의 루명을 쓰게 되였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전향》 이라는 구실로 오늘까지 공화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파쇼교형리들은 우리들을 사상 전향시키기 위하여 회유기만책동에도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들은 야수적인 고문만행의 후과로 중병을 만나 생사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비전향자들에게 전향을 하면 약도 주고 치료도 해주겠다고 하면서 얼림 수를 썼으며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죽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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