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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69,70,7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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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2-14 02:0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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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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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경 나(박완규)는 고문후유증으로 호흡장애가 심해지고 고열이 나면서 운신할 수 없게 되였다. 의무과장이라는 자가 와서 진찰했는데 급성 폐렴에 늑막염이라는 것이었다. 이자는 치료를 안 하면 사망한다고 하면서 《중환자이기에 병사에 입병시켜야 하겠으나 전향하지 않아서 안 된다. 전향만 하라. 그러면 항생제주사도 놔주고 치료도 해주겠다. 》고 하였다. 나는 격분하여 그자를 내쫓아버렸다. 결국 병 치료를 받지 못하여 사경에서 헤매다가 겨우 살아남게 되였다. 

비전향자 최재필은 오랜 기간의 감옥살이와 고문만행으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데다가 위암까지 걸렸다. 교형리들은 《전향해야 수술해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병사에 보내는 것을 거절하였다. 우리들이 《환자를 놓고 흥정하느냐, 당장 입원시켜라. 》고 하면서 강력히 들이대자 교형리들은 그를 병사에 데리고 가는척하고는 병사 2층에 있는 문둥병원에 처박아두었다. 결국 그는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운명하였다. 

비전향자 유재현도 고문의 후과로 폐병을 몹시 앓았다. 교형리들은 그에게 병을 고쳐주겠으니 《전향서》를 쓰라고 하면서 그러면 마산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해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뻗치자 교형리들은 약조차 주지 않아 결국 그는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파쇼교형리들은 사상전향공작에 가족들까지 내모는 비열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내(양정호)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있을 때 어느 날 교형리들은 나를 사상 전향시켜 보려고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끌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가 자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그야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때 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혈육의 정까지 전향공작에 이용하는 파쇼 통치배들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었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야만적인 고문후과로 사망한 비전향장기수 신인영의 경우도 교형리들이 그의 8형제를 모두 끌어내어 전향공작에 내몰았으며 그들이 잘 동원되지 않는다고 모진 고문을 가하여 동생은 허리까지 다쳐 고생하게 하였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만기출소한 후에도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거주와 직업, 생업, 여행 등에서 계속 커다란 박해를 받으면서 인권을 처참하게 유린당하였다. 실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사상과 신념을 꺾기 위하여 남조선 파쇼통치배들이 저지른 악행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극악무도한 고문학살만행과 온갖 비인간적학대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존엄을 유린하고 생명을 빼앗았으며 신체를 마구 짓밟은 남조선의 역대 파쇼통치배들의 죄행은 그 하나하나가 천추에 용납 못할 가장 야만적인 반인권범죄이다. 종교와 사상 같은 믿음을 강제적으로 폭력으로 바꾸게하는 나라가 이세상 어디에 있는가? 

 인류력사에는 신념과 정의를 지켜 싸운 유명, 무명의 영웅, 투사들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사상전향과 굴복을 강요하는 최악의 감방조선에서도 30, 40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 한생을 바치고 목숨을 내대면서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지켜 낸 우리의 비전향장기수들과 같은 불굴의 인간들은 아직 모른다. 

  홍안의 애젊은 시절에 들어 간 감옥문을 머리에 백발을 얹고 나오기까지 갖은 고문과 유혹속에서도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었고 어떤 담력과 배짱이 있었기에 한번 택한 사상, 한번 들어 선 길을 끝까지 걸어 올수 있었는가. 김선명(金善明)은 세계최장기수라는 거창한 명칭답게 4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빨갱이라는 사슬에 묶여 감옥에서 갇혀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 고 했습니다. 근본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근본이 불량하면 학식이 아무리 높더라도 사리사욕을 쫓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만큼 가문과 뼈대가 가치 있는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김선명 김정일은 뼈대 있는 항일의병 집안 출신입니다. 

김선명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서 출생했다. 만석꾼인 김선명의 집안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나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보면서 자신이 사는 세상이 평등이 없는 사회임을 깨닫게 되었다. 

1995년 출소할 때까지 45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이 기록은 세계 최장기수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라 있다.  TV 에서 어느 외국인이 <김선명을 석방하라>라는 노래를 부렀는데 제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김선명 이라는 이름 뿐이었으나 그 외국인은 열심히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김선명은 세계 시민 여론의 힘에 의해서 석방 된 것입니다. 

6·25전쟁 중 9.28수복때 월북해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다가 51년 10월유엔군의 포로가 된 그는 무기수가 됐다. 한편, 김선명이 인민군에 입대한 사이 아버지와 누이 두 명은 국군에게 보복 살해되었고, 다른 형제들은 연좌제로 고통을 받아 김선명과 연락을 끊었다.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드물게 총각이었던 김선명은 북조선으로 송환된 뒤 결혼하여 평양에서 살고 있다. 

김선명씨는 같은 한반도에 태어나 자랐음에도 오직 머리속에 "빨갱이물"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탄압을 받고 형제들도 자신에게 까지 야만적인 탄압이 가해질까 무서워 외면 하였던 한많은 40여년의 반도남쪽 생활을 걷고 떠났습니다. 

70.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0.
그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쳐 지는 대전교도소 
너는 무서운 
야수의 주둥이가 
자주와 통일을 위한 
이 땅의 양심들을 
무차별로 삼켜 
몇 십 년이더냐 

199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그날로부터 반세기 되는 날이었다. 

 통일을 위해 심장을 불태우던 사람들을 수없이 빨아 들여 청춘을 빼앗고 목숨을 삼켜 버린 대전교도소의 뻘겋게 녹 쓴 철문이 무겁게 열리며 나는 《세계최장기수》라는 옥살이기록을 안고 감옥 밖으로 나왔다 .  스 여섯 살 홍안의 청춘을 45년간 철창 속에 가두고 짓 조기고 얼쿠고 굶기다가 끝내 토해 버리고야 마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45년 세계최장기 옥살이, 그것은 한마디로 죽음과의 결사대결에서 사회주의 신념이 승리한 45년,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절대불변의 신념이 나의 운명을 구원해 준 45년이었다.
 

 조선인민군 정찰부대에서 복무하던 나는 1951년 10월 15일 철원근방에서 정찰임무 수행 중 불행하게도 미국 놈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미군정보기관에 끌려갔다가 남조선육군특무대에 넘겨 진 나는 1952년 2월경 서대문육군형무소를 거쳐 마포형무소로, 1953년 4월경에는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나는 터무니없는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군법회의라는 데서는 정확한 심리도 없이 《앞줄 누구누구이하 사형, 뒤줄 누구누구이하 무기》하는 식의 날치기 단심재판을 하는 판국이었다. 이렇게 되어 대구형무소에서 근 1년간 사형수생활을 하던 나는 1954년 2월 27일 서류심사에서 무기형을 확정 받았다. 기아와 혹한, 고독의 지옥에서 참기 어려운 전향고문을 당해야 하는 무기수옥살이가 시작되었다. 

 전향강요의 첫 시련은 1957년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형무소 작업과장이란 자가 나타나서 《전향자술서》를 안 쓰면 모두 《불취업》처분을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불취업》이란 형무소 안에 설치한 공장에서 하던 일을 못하게 하는 일종의 벌이었다.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다소나마 주림을 달랠 수 있고 고독감도 덜 수 있었던 재소자들에게 있어서 《불취업》은 사형선고 다음 가는 중벌이 아닐 수 없었다. 그자는 자술서를 안 쓰고 《불취업》처벌을 받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놈들이 요구하는 어떤 형태의 문서장이든 전향강요의 한 형태이므로 우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기로 했다.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뒤따라 모두가 손을 들었다. 

  《불취업》에 들어가면서부터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죄수옷섶에 꽁보리밥 한 덩이를 받아 안고 양말 빨고 난 물 같은 소금국 반 국자를 고무신짝에 받아먹는 살인적인 급식조건에다 10명도 빠듯이 들어 갈 방에 20여 명씩 번호순서로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감방 안은 찌물쿠는 더위와 악취로 질식할 지경이었다. 전향강요와 그에 따르는 살인고문은 중요 정치적 사변들이 있을 때마다 더욱 살기를 띠군 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후 군사파쇼도당은 《사상범》들을 한데 모아 놓고 《특별관리》를 한다면서 여러 지방 교도소들에 분산 수감되어 있던 비전향장기수들을 대전형무소 특별사로 집결시켰다가 7.4남북공동성명발표 이후에는 다시 대전, 대구, 광주, 전주 등지의 교도소로 분산 배치하였으며 교도소 별로 《전향공작반》을 조직했다. 인류형법사에 《한국의 사상전향테러》로 악명을 떨친 1972년부터의 전향공작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공작반놈들은 《한국》의 교도소들에는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빨갱이》가 한명도 있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빨갱이》들을 돌려 세우라, 전향공작과정에 생기는 인명사고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안는다는 것이 《청와대》의 《특별지령》이라고 하면서 죽던가, 전향하여 살든가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라고 공공연히 위협하였다. 낮에는 복도를 돌아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밤에는 한명씩 불러내다 잔인무도한 고문을 들이댔다. 감방바닥과 복도가 온통 피로 칠갑을 했고 처절한 비명소리에 육중한 감옥건물마저 몸부림치는 듯 했다. 고문으로 숨지는 사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등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다.


71.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1.
신념을 안고 정치적 생명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신념을 버리고 육체적 생명을 부지하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이었다. 

죽더라도 김일성장군님께서 안겨 주신 정치적 생명과 체험을 통해 심장에 새겨 안은 최고사령관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결단코 버려서는 안 된다, 내가 감옥에 끌려 올 때 살기를 바랐던가, 죽음을 각오한 이상 맞받아 나가자, 죽더라도 피 값은 받아 내야 한다, 이렇게 결사의 각오를 굳히니 순간이나마 갈마들었던 공포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음은 오히려 담담해 졌다. 

 드디어 나의 신념을 검증 받는 시각이 왔다.  1974년 6월 어느 날이었다. 《3596번-》  나를 부르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그래 전향을 안 하고 끝까지 뻗댈 작정인가? 인생이 뭐고 부귀영화가 뭔지 알고나 있어?》 《난 인생이요, 부귀영화요 하는 따위는 모른다.》 《무식쟁이, 그걸 모르니 뻗댈 수밖에.》 

 《그렇다. 나는 너희들의 <이론>따위에는 무식하다. 그 따위 것을 알아서 뭘 해.》

존엄 높은 조선로동당원이 적들의 반동이론을 알아서는 무엇 하겠는가. 더욱이 적들과 단독으로 대결하는 마당에서 말씨름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놈들의 궤변에 말려들어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좋다》, 《나쁘다》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쟁이》로 계속 뻗쳐 댔다. 

 《내 인생철학을 한 강의 해줘야 할 가 보군.》  《가만 한 가지 묻자. 불이 왜 뜨거운지 아는가?》  《어, 그거야…》 《모를 테지》 《뜨거우니까 뜨겁지 왜 뜨겁겠어, 난 철학이고 이론이고 그런 건 몰라. 그저 옳은 것은 옳기 때문에 옳은 거지. 난 김일성장군님과 공화국이 절대적으로 옳고 좋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하는 거다. 옳은걸 나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전향 안 하는 거구.》 
 
놈들은 《빨갱이》의 악질인 자를 발가 내겠다며 달려 들었다. 옆에 섰던 놈의 가죽장갑을 낀 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귀뿌리로 날아들었다. 전향을 하지 않는 한 피 터지도록 맞을 것은 뻔한데 나 죽었소 하고 두들겨 맞기만 하겠는가, 네 주걱이 하나면 내 주먹은 두개다! 나는 날아오는 그놈의 주먹을 피하며 날래게 달려들어 그놈의 사타구니 것을 움켜잡아 채며 늘어 졌다. 급소를 잡힌 놈은 사색이 되여 거친 숨을 톺아 쳤다.  《죽여 버리겠어. 어느 놈이든 한 놈 고자 만들고야 말거야.》  나는 힘을 다해 머리로 그놈의 배를 밀어 받으며 급소부위를 기운껏 잡아 당겼다. 《아이구, 나 죽는다. 사람 살려라-》 

 그놈이 얼마나 고함을 지르는지 간수들이 다급히 달려 왔다. 놈들은 달라붙어 내 손가락을 잡아 푸느라고 악을 썼다. 그러나 나는 사생결단의 악이었고 놈들은 곁 놈을 구원하기 위한 간접적인 발악이었다. 그러니 내 손을 풀 수 없을 수밖에. 

 급소를 잡힌 놈은 놓아 주면 다시는 폭력행사를 안하겠다고 숨 넘어 가는 소리로 빌었다. 그제서야 나는 손을 풀었다. 손을 풀자 간수놈들이 발로 내 면상을 걷어찼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 몸을 휘청거리는 사이에 목덜미에 둔중한 몽둥이강타가 떨어 졌다. 얼마나 맞았는지 나는 의식을 잃었다. 깨여 보니 온몸이 멍이 들고 쑤셔 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통쾌했다. 아무래도 죽도록 얻어맞을 건데 먼저 손을 써서 한 놈 혼찌검을 내주고 항복을 받아 내니 아픔이 덜한 것 같았다.

 쇠를 숫돌에 갈면 날이 서듯이 놈들이 고문장에 불러낼수록 나는 놈들 몇 배로 펄펄 뛰곤 했다. 놈들이 내 멱살을 움켜쥐면 나는 그놈의 멱을 비틀어 잡고 숨을 못 쉬게 했다. 손발을 묶을 기미를 보이면 선손을 써서 골받이를 하고 물어뜯는 등 결사의 자세로 놈들과 맞서 싸웠다. 

어떤 방법으로든 매번 놈들에게 주먹 값을 치러 주고 본때를 보였더니 놈들은 점차 무지막지하게 다루지 못했다. 나의 가까이에 접근하기를 주저했고 언제 날아 들지 모를 나의 손과 발, 머리를 경계했다. 적들에게 그 어떤 자비심을 바라거나 비굴하게 놀면 놈들은 더욱 포학해지고 기승을 부린다. 적들과는 오직 맞불질을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붕괴를 기화로 놈들의 전향공작은 집요한 회유기만술책으로 넘어 갔다. 어느 하루 나는 교무과 전담반으로 불려 갔다. 교화사라는 놈들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보여 주며 《보라. 당신이 아무리 사상이요, 신념이요 하면서 버텨도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있어.》하는 식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쏘련이 어떻소, 루마니아가 어떻고 고르바초프가 어떻고 하고 지껄여 대던 교화사놈은 《어떤가. 생각을 달리할 때가 되잖았어?》하면서 나의 대답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소련이요, 동유럽이요 하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밖에 몰라. 장군님밖에 모른단 말이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공화국은 끄떡하지 않는다.》 《지독한 놈, 악종 같은 놈.》 놈들은 악에 받쳐 날뛰었지만 더는 어쩌지 못하고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 철의 심장일지라도 혈육을 통한 적들의 전향심리전은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살인적인 고문일변도로 전향거부의지를 꺾을 수 없게 되자 적들은 부모친척들을 이용하는 회유책동을 병행하였다.  1989년 봄 삼촌을 통한 전향설유, 그해 겨울 제수를 통한 전향설복은 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허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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