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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72,73,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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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2-26 04:3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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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다물흙  림원섭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2.
내가 수십 년간 감옥 안에서 《빨갱이》의 사상을 가진 것으로 하여 인생최악의 고초를 다 겪었다면 혈육들은 《빨갱이》아들, 《빨갱이》형님 때문에 감옥 밖에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시달림을 다 당하였다. 적들은 가족, 친척들의 애절한 하소와 전향설득으로 우리가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회정의와 인간의 양심에 비춰 볼 때 결코 나는 《죄》인일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마음은 대적관계에서도 철석이여야 하지만 혈연과의 관계에서도 냉정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그들의 전향권유를 단호히 뿌리쳤다.

 

 혈육들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나의 심장은 더더욱 뜨거워지고 이성은 더욱 냉철해 졌다.   45년 동안 감방에서 믿는 데가 없었다면 내가 감히 그렇듯 죽음을 범상하게 여기면서 적들과 뻑뻑 맞설 수 있었겠는 가 . ㅡ위대한 영도자의 품에 안겨 수령에 대한 절대적 숭배의 암반에 신념의 기둥을 세울 때만이 그 어떤 천지풍파에도 드놀거나 굽히지 않는 불굴의 투사로, 영웅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한생의 총화이다. 

 {김일성이 왕청에 있을 때 수류탄공장을 하나 지어달라는 편지를 소련에 보낸 적이 있었는데 상대측 에서는 회답조차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일성부대는 《연길폭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탄을 자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 합니다. 즉 소련은 동북혁명이나 조선혁명에 냉담하고 무관심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김일성은 조선독립을 외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우리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이룩하려고 하였습니다.}  

 광복직후 독립조선의 진로를 두고 서울장안이 어중이떠중이 정객들로 일대 혼잡판을 이루었을 때인 1946년 봄 어느 날이라고 생각되는데 평양에 올라 가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조선이 나아갈 길을 받아 안은 여운형선생이 영등포 우편국 앞마당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얼마 전에 북에 가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만나 뵙고 내려 왔다는 것을 이야기한 다음 그분께서 광복된 우리나라는 미국식이나 소련식을 따를 것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길로 나가야하며 새 조선건국사업에서 외세에 기대를 걸 것이 아니라 민족의 단합된 힘을 믿어야 한다는 것, 민족이 단합하려면 정견의 차이나 재산의 유무에 관계없이 애국애족의 기치아래 통일전선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 그러자면 일체 파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 광복된 조선이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신데 대해 감동적으로 이야기했다. 

1950년 9월 27일 서울을 떠나 전략적인 후퇴의 길에 올랐을 때였다. 철원근방에서 인민군부대에 편입 되었다. 인민군대에 몸을 잠근 나는 참으로 놀라운 현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고금동서의 어느 나라 군대 에나 상관의 명령일하에 움직이는 군률이 있고 그래서 등급에 따르는 차별이 심한 것이 군대인줄로 알았 다. 내가 보아 온 일본놈 군대가 그랬고 《국방군》이 그랬다. 

그러나 인민군대에는 상하간에 간격이나 차별이 없고 형제지간 같은 애정과 화목이 꽉 차 있었다. 상관은 하급을 혈육처럼 사랑하고 하급은 상급을 아버지나 형님처럼 따르며 존경했다. 알고 보니 김일성장군님 께서 조직영도하신 항일무장투쟁시기로부터 내려오는 관병일치의 전통, 혁명적동지애의 계승이었던 것이다. 전하명장 김일성장군님의 군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한번은 마초를 베다가 낫에 다리가 약간 긁혔는데 중대장은 큰 일이나 난것처럼 급히 달려 와 약을 바르 고 붕대로 싸매 주었다. 어찌 중대장뿐이랴. 중대의 모든 성원들이 친형제처럼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한집안처럼 화목했다. 천하명장의 슬하에서 교양육성된 인민군대의 참모습에서 나는 사랑과 믿음과 정을 주는 혈연적인 동지적 단결로 험난한 조선혁명의 혈로를 열어 오신 위대한 인간이시고 위대한 동지이신 김일성장군님의 고매한 인품을 읽었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인간적인 매혹과 절대적 숭배심에 뿌리박은 신념의 기둥이 있었기 때문에 1만 6,425일의 주림과 추위, 고독과 전향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사회주의사상을 지켜 내고 육체를 지탱해 낼 수 있은 것이 아니랴. 혈육들조차 정을 끊어 버린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끝까지 나를 고무격려해 주고 승리에 대한 신심을 안겨 준것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싸움길에 뒤떨어진 한명의 전사라도 천리만리를 되돌아 가 부축하여 대오에 세워 주며 역경에 처한 동지 마지막 한사람까지도 다 구원해 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특유한 동지애의 세계를 실감할수록 장군님과 동지애로 혼연일체를 이룬 무한한 긍지와 자랑이 가슴에 차넘쳤다. 

 사실 동지를 위한 일에 한몸을 내댄다는것은 결코 누구나 할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일국의 영도자가 평범한 전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그토록 헌신적인 로고와 심혈을 바친다는 이야기는 고금동서에 없었다.  세계최장기수라고 불리우는 나로 말하면 물론 한생의 거의 전부를 철창 속에서 최악의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국앞에, 민족앞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인간으로서의 의리와 신념을 지킨 것 밖에 그 무슨 생의 흔적을 남긴 것이 있는가.
 

 73.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3.
의리는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이다. 아무리 죽을 고비에 들었다 한들 다 꺼져 가던 민족과 겨레의 운명을 구원해 주시고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아오던 무지렁이인생들을 나라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내세워 주신 민족재생의 은인, 인민의 어버이에 대한 충의를 저버린다면 무슨 인간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량심과 의리와 지조를 지켰을뿐인데 곁에 둔 자식보다 멀리서 고생하는 자식을 더 생각하는 어버이심정으로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역사적인 북남최고위급 회담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문제를 상정시켜 북남공동선언문 조항에 박아 넣도록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이 억척같은 신념의 기둥이 내 가슴에 서 있는 한 나는 45년 세계최장기수로 두 번 다시 산다 해도 그 어떤 주저나 동요도 없이 수난의 그 길을 웃음 속에, 긍지 속에 걸어 갈 것이다.  

옥살이 중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다.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이 대개 휴전 후 공작원으로 남파된 데 반하여 김선명은 전쟁 중 잡힌 군인이라는 점에서 리인모와 유사한 경우였다. 김선명은 자신이 조선인민군 제31사단 정찰부대 소속이었다고 밝혔으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526군부대라는 간첩부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간첩죄가 적용되어 전쟁 포로가 아니라고 억지 주장하였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른 송환 대상 비전향 장기수로 선정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양심수인 김선명을 주인공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다큐멘터리 《송환》과 극영화 《선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내삶이 닻을 내린 곳》이라는 장편영화와 〈신념과 의리를 지킨 45년〉이라는 단편영화가 만들어졌다. 북조선의 소설 《조국의 아들》 역시 김선명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고 문익환 목사는 1993년에 김선명을 주제로 한 〈43년 김선명 할아버지께 바치는 시〉를 발표했다. 다음은 문익환 목사의 시 중 일부이다.

얼마나 긴 세월이었습니까 
김선명 총각 할아버지 
43년이나 당신을 가둬둔 조국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입니까 

(중략) 
김선명 총각 할아버지 
끝도 안 보이는 당신의 그 기다림은 무엇이었습니까 
43년은 얼마나 긴 싸움이었습니까 
몽둥이 찜질이야 기절해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온몸 바늘로 찔러대는 쓰림과 싸우며 버텨내신 
그 신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후략) {북한이 사분오열 되어 있었더라면 김선명은 북한 땅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김선명은 민족을 단합시킬 옳은 지도자를 모신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지가 임종에 한 탄식대로 나라에 위인을 모시지 못하다보니 우리 선조들은 역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어도 사색당쟁으로 기울어지는 국운도 바로 잡지 못했고 종당에는 망국의 비운도 막지 못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척양척왜의 총검을 잡았으나 허무한 희생만을 남겼고 의병도, 독립군도 모닥불처럼 사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의병들이 지도자가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무수히 죽는 것을 경험한 조선민중은 특히 전쟁에서는 훌륭한 지도자를 갈망 하였습니다. 

 걸출한 영도자를 모시지 못하면 죽을 각오도 무의미하고 헌신적인 애국충의도 허무하다는 것이 할아버지 대부터 우리 가문이 새겨 놓은 가훈이라면 위대한 수령의 영도를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일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혈육도 남남사이가 되고 진하게 이어 져 오던 혈연도 매정하게 잘라 버리는 이기적 인간으로 된다는 것이 나의 대에 와서 우리 가문이 보여 준 생활의 진리이다.
 

74.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74.
내가 45년 옥살이를 하고 대전교도소를 나서는 날 문밖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성의를 다해 우리의 옥바라지를 해주고 석방투쟁을 벌여온 《민가협》성원들, 운동권의 청년학생들과 각계인사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남쪽태생으로서 친인척인 많은 나에게는 일점 혈육도 빛을 보이지 않았다. 형언할수 없는 착잡한 심경을 안고 일단 집으로 가기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먼저 출소한 동지들이 살고 있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락성대 《만남의 집》을 찾아 갔다.  《민가협》성원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수 있었다. 

천만뜻밖에도 형제들이 나와 만나기를 거부해서 마중도 안 나왔으며 내가 그들의 집에 가는것도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이 아들을 기다려 죽지 못한다는 94살의 어머니도 만날 수 없다는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동생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형과의 의절을 선포했던것이다. 벌써 내가 출소하기 20년전인 1976년에 동생 선일이는 내가 1950년 8월 2일에 죽은것으로 사망신고서를 내고 나를 호적에서 지워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지 석달후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조차도 통지가 없었고 묘를 어디에 썼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선희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자고 했으나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선일이가 형이 장례식에 오면 자기는 거기에 안 가겠다는 최후통첩을 해왔기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억이 막히는 일이였다. 출소 며칠후 극적으로 만났던 어머니의 주름 패인 얼굴이 떠올랐다. 로환으로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저녁밥술을 놓은 다음 대문까지 걸어 나가서는 생급스럽게 《선명이 왔다 갔지?》라고 큰소리로 물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신상이 심상치 않아서 림종이 박두했다는 예감이 든 동생내외는 급기야 《민가협》에 알려 나와 만나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건강을 핑계대면서 상봉시간을 재촉하는 제수때문에 45년만에 처음이자 일생에 마지막이였던 어머니와의 만남은 고작 25분으로 끝났다.  나라가 독립되지 못하고 국민이 미국이란 주인을 섬기는 노비신세로 전락하였으니 어찌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친일친미 매국노의 폭력이 가해질까봐 형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아들이라도 마음 편히 만나지도 못하니 이런 기막힌 망국노의 한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야속하면서도 정겨운 시선으로 이 아들을 바라보는 물기어린 어머니의 눈빛에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시는 그 작고도 따뜻한 손길에서 변함없이 뜨거운 어머니의 사랑이 나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세상에 기막힌 일도 다 있구나. 선명아, 네가 이렇게 나왔는데 너와 동생들, 제수들과 조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밥이라도 한 끼 나누는 걸 내가 보았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어머니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구나. 용서해라, 아들아… 이것이 어머니모습에서, 그 선한 눈빛에서 내가 읽은 모성애의 서정시였고 내가 들은 그 옛날과 다름없는 어머니의 자장가였다. 

 제수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며 부축해 일으키려고 하자 어머니는 그를 마다하며 나에게 안기겠다고 하였다. 내가 어머니를 안아 자동차에 앉혀 드리는데 어머니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장손아, 집은 네가 갈 곳이 못 되는 것 같구나.》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귀로 눈물이 주르르 굴러 내렸다.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어머니손등에 점점이 떨어 졌다.

(나라의 남쪽반쪽이 미 식민지로 되어 노예처럼 상전의 눈초리가 무서워 김선명의 가족은 부모자식도 흩어져야 했습니다.)  어머니손등을 적신 나의 눈물은 핏줄을 나눈 혈육들의 집은 비록 갈 데가 못 되어도 나에게는 한생을 맡아 주는 웅심 깊고 뜨겁고 영원한 어버이 품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위로의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지옥에서 45년간 삶을 지탱해 온 아들을 만난 기쁨보다는 한배에 품어 키운 자식들 사이의 의리가 상하는 가슴 저미는 통한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나는 결코 동생들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생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죄도 아니고 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죄를 따진다면 미제와 남조선사회제도에 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혈육의 가슴에도 서슴없이 칼을 박고 인정과 의리도 도덕도 무참히 짓밟는 남조선사회가 그들로 하여금 40여년 만에 사지에서 풀려 나온 형에게도 등을 돌려 대게 했던 것이다. 

내가 죽음을 각오했기에 신념을 지켜 냈다면 그들은 혈연을 단절하는 것으로 자기를 살리려 했다. 나는 믿는 데가 있어야 죽을 각오도 하고 육체적으로는 죽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영생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면 나의 동생들은 이것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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