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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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5-15 23:0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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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글쓴이: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 9월의 글입니다.
8.
재미 사학자 방선주(66)씨가 입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양민학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에 1949년 12월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 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녀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여자 41명 어린이 10명과 갓난아이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 때문에 학살되었다.
이웃 사람들의 주검 밑에서 죽은 채 엎드려 있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더구나 이와 같은 만행을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던 것으로 주한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비망록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산북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씨는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하였음을 시사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뒤에 신임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친일 매국노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군들의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민간단체에 조사를 의뢰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소행을 인민군에 뒤집어씌운 조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국군 제3연대 1.2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산동면에, 국군 제12연대 1-3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초까지 구례중앙초등학교와 구례구역 등에 각각 주둔하면서 구례군 일대 빨치산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집단 사살했다.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3월 28일부터 오대산 및 황병산 일대에서 끈질긴 공비토벌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1월 기간에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 5개 지구에 대한 ≪토벌≫ 공세를 벌리고 이지역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주민 약 4만 명을 학살하였다.
미군정 치하인 지난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통영·거제 일대에서 군경에 의해 민간인 수백 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청면과 장승포읍 주민들도 1949년 '빨치산'에 협조한 혐의로 국군 제16연대 등에의해 총살을 당했다.
좌익으로 몰린 진영의 여교사는 얼굴이 예쁜 젊은 처녀들과 함께 능욕을 당하고 암매장되었는 데 그녀는 다리까지 잘리었다. 또 충무·통영군 남녀 800여명의 학살은 헌병무관들이 부녀자 약탈의 은폐 책으로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사건이었는데 이 당시 그들은 창고에 끌려가 남녀 모두 옷을 벗긴 채 구타를 당하였다(김삼웅, 1996:169).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서 11사단 205부대는 마을 주민 60여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7명을끌어내어 대검으로 목과 유방, 심지어 음부까지 난자하여 모두 죽였다.
이번에는 19명을 일보도로 참수하였는데 김점동이 일본도에 의해 목을 두 번이나 내려쳐졌 으나 죽지 않자 "더러운 놈 모가지가 왜 이렇게 질겨"하면서 장교는 세 번째 내려쳤다(서중석, 1999:620). 창원군 북면에서도 해군첩보대대장으로 황광수 수병 등이 이곳 주민과 피난민 60명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면서 어린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일본도로 내리쳐 죽이고 부녀자들에게는 젖가슴을 칼로 자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삼웅, 1996:107-108).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아산군 신창지서주임이던 유해진은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고 부하까지 농간하게 하고 좌익 측 부녀자를 첩으로 삼았다. 이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反인륜과 패륜아 행위를 살펴보겠다. 이에는 6.25전후 가장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출신이고 이승만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김종완이 대표적이다. 그는 여수 등에서 일본도로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즐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50년 5월 6일 6.25전에 백골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일운면 구조리 앞 바다에 주민 1천명을 1시간 동안 찬물에 세워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모와 사위 등 서로 어려운 사이를 골라 서로 마주 뺨을 때리도록 하고 만약 세게 때리지 않으면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서중석, 1999:583). 이 같은 '뺨때리기'와 '말태우기'는 흔히들 자행되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제주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 놓고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태워 빙빙 돌게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하였다. 총살에 앞서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총 맞아 쓰러질때 가족들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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