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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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5-20 14:33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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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대 학살
1945.9.8일부터 1950.6월 이 5년 동즉 6.25 전에 이미 약 1백만을 대 학살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행하여졌다.
9. 6.25 는 도대체 무엇인가? 글쓴이: 다물흙, 림원섭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2010년 9월 자료입니다.
9.
통영에서는 죄 없는 양민 수십 명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수장시켜 죽였고(김삼웅, 1996:108), 필자와의 면담에서 어느 육군상사는 시숙과 제수를 옷을 벗겨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덮석에 말아 굴리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전언을 해와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공스런 야수적 행위는 이미 제주에서부터 알려졌다. 처녀와 총각을 불러내어 서로 정교를 강요하였고(황상익, 2000:153 재인용),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조를 맺게 하고는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완도 경찰은 완도읍 두암리에 살던 좌익아들을 둔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찰이 그 아들을 죽이고는 아들의 간을 꺼내 할머니 입에 물리고는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였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반 미친 상태에서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였고 13년형을 받아 7-8년 복역 후 석방되었으나 몇 달 후 죽었다고 한다(김삼웅, 1996:119).
국민의 뜻은 무시하고 위와 같이 한민족에게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미국에 빌붙어서 사는 이명박은 괴뢰도당 에 지나지 않고 이명박 정권은 괴뢰정권이다. 직접 만행을 저지른 친일세력들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주범은 무기를 공급하고 지시를 내린 미군입니다. 더구나 미군은 사람을 많이 죽인 친일매국노를 높이 평가해 주고 진급을 시켜 고무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가 단지 6.25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악랄한 인권 말살주의에 물들어 있던 친일파, 곧 민족반역자들이 반공제일주의를 걸었던 미군정과 결합하여 그들의 생사를 걸고 남한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구조적으로 잉태되었다. 실제로 미군정 당시에도 Mark Gain의 Japan Diary 에 서술되어 있듯이 경찰이 유사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6.25이전에도 4.3항쟁과 여수항쟁에서 보듯이 토벌대의 이러한 만행은 다반사였다. 단지 6.25이후 보다 대규모와 빈번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신불산 공비는 여수, 순천반란사건 때의 공비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가 그 일부가 울산으로 이동 해오면서 활동이 시작됐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한 군, 경과 민간 의용대의 작전은 1949년 말∼1954 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감옥은 좌익분자로 넘치는데도 반정부 기운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반정부 집단의 배후에는 북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공비들을 지원하는 북한과 그리고 북한을 지원 하는 중공까지 점령 할 수 있는 기회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전쟁만이 모든 것을 해소할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고 마국은 전쟁을 하기위한 시나리오를 착착 준비했습니다.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한국전쟁 전 1949년 6월에 좌익계 인물들을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의 단체이다. 흔히 보도연맹으로 지칭한다.
한국정부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감시할 목적이었다. 1950년 초에 집계된 회원 수는 30만 명이 넘는다. 보도연맹에는 전향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은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이를 보도연맹 사건이라 한다.
보도연맹은 북한이나 추종세력들이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 활동을 취할 수 있는 항시적 사회 불안 요인 이었다. 이런 우려로 인하여 한국 전쟁 발발과 때를 맞춰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 있었다. 한국 전쟁은 미국민 특히 군산복합체 집단들의 요구에 의하여 대륙 탈환을 목표 삼아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대륙 진군의 전진 기지가 되는 한반도를 완전히 평정 하고 평온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개시되자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시행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고, 인민군에게 점령된 서울에서는 보도연맹원의 희생이 없었으며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은 경남과 경북 일부 지역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살해 형태로는 경찰이 트럭을 이용하여 창고 등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을 외딴 곳으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게하고 총살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는 전투가 전혀 있지 않은 제주도에서도 25일 당일에 검거되어 218명이 해병대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미군 군사고문관 롤린스 에머리히(Rollins S. Emmerich-1986년 사망)는 부산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 3,500명을 모두 사살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또 미 공군 정보장교였던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1981년 사망)도 50년 7월 1일 경기도 수원에서 1,800명이 집단 처형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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