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14.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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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06 13:0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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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글쓴이: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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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적인 공격을 하도록 이승만과 일당들에게 단숨에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통일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이 시나리오에 따른 전쟁발발을 시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승만은 말 그대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줄로 알았다. 미국이 이승만 괴뢰를 어떻게 철저히 속였는지는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개시된지 3일만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함락되면서 리승만의 집무실을 비롯한 남조선《정부》와 군부의 기밀실에서 극비자료들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압수되게 되었다. 1950년6월20일 면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덜레스가 이남의 외무부장관에게 이북 침공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리승만《정부》는 극비문건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인민군대한테 압수당하였다.
그것은 당시 리승만이 미군을 믿고 허장성세하여 북침전쟁을 개시하면 파죽지세로 북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의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얼마나 급했으면 기밀문서를 책상위에 그냥 놓아둔 채로 방안열쇠도 잠그지 못하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민군대는 6.25 한국전쟁도발과 관련되는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을 몽땅 압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쟁역사에 드문 일이였다. 인민군대가 서울에서 압수한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에는 6.25전쟁도발과 관련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북한정부는 미국의 사주 하에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을 자료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아무리 비방중상 하여도 도발자는 남한군입니다.
어리석은 이승만은 속아서 미군이 처 올라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시나리오는 그게 아니었다. 북의 38을 넘은 남침반격이 있자 계획적으로 후퇴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50년에 들어서서 비상상황은 여러 번 발령됐다. 특히 적이 쳐들어 온 6월 들어서는 초순부터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적이 남침을 시작한 25일의 전날인 24일에 갑자기 비상이 풀렸다.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의 수는 군의 복무규정과 육본의 요구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아 있던 장병마저 긴장감이 풀어져있는 상태였다는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내린 평가다.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미국과 남한군은 북한군의 사정은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대한민국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미국은 괴뢰군에게 이와 같은 계획적인 사전조치를 취함으로써 제대로 대항을 못하게 하고 후퇴하도록 명령까지 내렸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에 방어선을 치도록 하여 많은 인민군을 남쪽 끝에 묶어두고 인천 상륙을 함으로써 남으로 유인한 다수의 인민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23일 밤10시부터 중화기를 동원하여 무수히 많은 포탄 세례를 퍼붓는 공격에만 집중하였고 정작 중요한 방어에는 얼마나 준비를 안 했는가를 알 수 있다. 24일에는 38선을 넘어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공격하였었다. 또한 다음의 사실들을 통하여 국군이 장비가 없어 총 한발 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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