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18.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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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6-19 03:2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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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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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비상상황이 이어지다가 전쟁개시 날짜가 잡힌 그날에는 미군 지휘를 받은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낸 것이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전방부대의 중화기와 차량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일제 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 장군은 저서 "군번 1번의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 (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안에 통적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
미국은 이와 같이 공격용 중화기 부대만 남기고 방어목적의 부대들은 모두 철수시켜 놓았다. 그리고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한 군진지에 맹렬한 포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남한군 당국은 백선엽 대령의 제 17연대가 1950년 6월 24일 전투를 개시하여 해주까지 북진하여 점령했다고 당시에 공식발표했었다.
미국도서 《미국과 한국전쟁》(일문판) 99쪽에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6월 24일 토요일 아침 트루먼은 고향 미주리 주에서 처, 딸과 같이 조용히 주말휴가를 지내기 위해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를 타고 워싱턴을 떠났다. 이는 뜻밖의 일이였다. 트루먼은 1945년 2월부터 그때까지 5년이 넘는 재임기간에 주말휴가를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지낸 때가 없었다.
트루먼은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결단은 내 수중에》라는 좌우명을 내걸고 쉴 새 없이 모든 일에 참견 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관록 있는 가문의 출신도 아니고 장성급을 지닌 경력도 없고 제1차세계 대전시기에겨우 포병대위로 복무한 초라한 군 경력과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탓으로 상대방이 깔볼 것이라는 선입견이 언제나 머릿속에 지배하고 있었기에 모든 일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자기의 승인이 없이 처리하는 일이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악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트루먼은 처와 딸까지 데리고 형이 경영하고 있는 자기 농장 개조문제를 토의하러 간다는 소문을 크게 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먼은 고향의 농장으로 가던 도중 프린드씨프 국제공항에 들러 확장공사의 완공 테이프를 끊고 연설 하였는데 그는 앞으로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평화의 화신처럼 생각하도록 연극을 놀았던 것이다.
대통령뿐 아니라 미 국무장관 애치슨도 한국전쟁 발발전야에 메릴랜드 근처의 자기 농장에 가 있었다. 결국 한국전쟁이 도발되기 전야에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다 자기 농장에가서 주말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트루먼이나 애치슨에게는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상황이 즉시 전달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상하기 그지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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