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28.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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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28 23:4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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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요크 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강의하면서 킬램 시니어 펠로십 등 많은 학문적 영예를 안았던 ‘스티븐 엔디콧’과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미육군 지휘 및 일반 참모 대학, 미 공군사관학교, 미 공군 공중전대학 등의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토론토의 요크 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해거먼’ 의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이란 책에는 미국은 일본 전범과의 비밀거래를 통해 세균전 실험 정보를 얻었고 결국 초기 한국전쟁에서 이 무기를 실험,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들은 미국, 중국, 북한, 캐나다, 호주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비밀문서 등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해 주장의 신빙성을 높였다. 그간 생물학전을 부인해 온 미국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며 미국의 생물학전 프로그램이 순수하게 방어 및 보복 성격에 머무른 게 아니라 공격무기로 개발되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1951년 12월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러빗은 생물학무기를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최단시간 내에 실질적인 준비 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몇 주 뒤 공군 참모총장 호이트 반덴버그는 그 같은 능력이 '신속하게 실현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53년 9월 6일 일요일, 마지막 남은 미군 전쟁 포로를 실은 트럭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던 그날 아침, 베이징 라디오 방송은 한국에서 생물학전에 참가한 것을 시인한 미 공군 장교 25명의 이름을 발표했다. 판문점에서 38선을 넘은 첫 번째 지프차에는 이 25명 중 3명의 대령인 앤드루 에반스, 워커 마후린 그리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프랭크 슈와블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 송환된 뒤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는 위협아래 자신들이 종전 자백을 철회했다.
52년 3월의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의 보고서는 미군에 의해 세균전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했다. 협회의 조사단은 북한 곳곳에서 페스트, 콜레라, 티프스, 출혈열, 일본 뇌염등의 균을 가진 특별한 벼룩과 파리,썩은 생선, 거미등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할 곳에 집단으로 뭉쳐 있었다. 이 곤충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미군 비행기가 아주 낮게 선회하는 것이 목격되곤 했던 것이 확인됐다.
이러한 내용은 52년 6-8월 사이 작성된 국제과학조사단의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의 세균전 사실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 보고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세균무기제조 지도자이시이 시로와 미국의 관계에 관심을 나타냈다.
부르스 커밍스는 "미국은 일본인과 나찌 세균전문가를 고용하였고, 제네바 협정으로 사용금지된 신경가스 사린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이를 부인하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샀다"고 적고 있다. 이시이 시로는 마루타, 즉 인간생체실험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731부대의 수많은 생체 실험 데이터들은 전쟁 종결 후 미국이 입수했다. 731부대에서 활동했던 실험자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731부대의 수장 이시이 박사는 후에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하였다.
1951년 5월 6일 남포시에 4차례에 걸쳐 맹폭격을 감행하면서 독가스탄을 퍼부어 그 부근인민들을 포함하여 1379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1951년 7월 6일과 9월 1일 원산지구와 황해도 여러 지대들에최루성 및 질식성 독가스탄을 투하하여 수십 명의 중독자와 희생자를 내게 하였다.
1952년 2월 27일부터 4월 9일까지 기간에 공화국북반부의 여러 지역에 33차례에 걸쳐 독가스탄을 뿌렸다. 1952년 9월 간리지역과 연안지방에 주로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독을 묻힌 100원짜리 가짜 돈과 삐라를대량 뿌렸으며 1952년 5월 18일에는 대동군에 독을 묻힌 조개를 낙하하였다.
휴전협정은 포로송환문제 때문에 2년 가까이 지연되었다. 이 지연 때문에 전쟁은 무의미하게 계속되어 남측이 13만, 북측이 25만 가까이 사상자를 내는 반인도주의적 결과를 내었으며, 남북주민의 전쟁참화와 고통은 더 심화되었다. 또 결과적으로 국군포로나 인민군포로의 이산가족문제를 대거 남겼다.
이의 근본적 요인은 미국이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한 제네바협정 전쟁이 끝나면 전쟁포로는 지체 없이 석방되고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는 자동송환원칙을 위반하고 자유송환원칙을 요구한 때문이다. 49 년의제네바협정도 공정한 자유의지의 확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고려되어 자유송환 대신 자동송환원칙이 채택되었다.
미국은 이 자유송환원칙을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하고서 겨우 두 달 만에 뒤 짚는 행위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고, 북한에 수용되어 있는 미군포로의 송환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변호사출신인 애치슨 국무장관도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대대적인 폭격과 무장도발 강화로 이를 관철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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