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30.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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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05 04:2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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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30.
1951년 5월 18일 UPI통신의 전신인 당시의 UP통신에 의하면 선상의 실험실에는 3천 여회나 범죄적인 시험이 행해져 그 결과 거제도에 감금되어 있던 12만 5천여 명의 인민군포로 중, 1400명은 중태에 빠지고 나머지 중 80퍼센트가 어떤 종류의 질병에 걸려있다 라고 보도 하였습니다.
유엔군은 세계최강 미국과 약소국 북한과의 전쟁이 아니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침략자를 응징하는 군대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유엔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이 조직한 군대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란 칭호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 전쟁에서도 가장 먼저 공을 세우려는 전쟁광 맥아더는 1950년 7월 9일, 전쟁이 터진지 이 주일밖에 안 지났는데도 워싱턴의 리지웨이 장군에게 긴급 서신을 보냈다.
A 폭탄을 맥아더에게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A 폭탄은 핵폭탄을 가리킨다. 맥아더는 북한에 이어 중국까지 점령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정권에서 소외당한 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공화당 우파들에겐 맥아더는 집권을 위한 대안 카드로 떠받들어졌다.
트루먼이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맥아더에게는 막강한 후원자가 있고 공화당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맥아더는 정치적 야심을 품어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작전국장인 찰스 볼티(Charles Bolte)에게도 맥아더는 자신의 비범한 야망을 전달하였다. 전쟁을 장악하여 북한을 점유한 다음, 중국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참모본부에서는 핵폭탄의 사용 불가 결정을 내렸다. 핵폭탄까지 사용할만한 목표가 아니고 사용 후에는 오히려 미군에게 장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침략 계획은 맥아더만 갖고 있었던 게 아니고 미 행정부의 사전 계획이었던 것이다.
워싱턴은 당시 미국이 450 기의 핵폭탄을 준비해둔 반면, 소련에게는 25기 뿐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반응에 대해 별 걱정을 안 하고 있었다. 미국이 강적이 있어서 핵폭탄을 이렇게 많이 비축해 둔 것이 아니었다. 북한만을 상대하기 위해서 비축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많이 생산해둔 이유는 핵으로 위협하여 중국을 삼키고 나아가서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속셈이었다.
미국은 치밀하고 구체적인 핵무기 사용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있었다. 셰이크다운(Shakedown) 계획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소련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그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이고 핵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핵심은 보복공격을 당할 위험 없이 소련을 완벽하게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제3차 대전이 발발한 지 6일째에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개시한다.
미국 본토와 유럽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소련의 70개 도시에 모두 133개의 핵폭탄을 투하한다. 소련의 전쟁의지를 완전히 말살함으로써 핵 보복의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한국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중국인민 의용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당시 미국은 또다시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핵무기 사용은 실행되지 않았다.
당시에 핵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 전투기를 제압하고 안전하게 실어 날라야 하지만 미국은 당시 소련의 비밀병기 미그-15기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항공기의 기술력에서 앞선 소련으로부터의 핵 보복을 받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었다.
이를 무시하고 무모한 3차 대전을 일으킬 것을 주장한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격추되거나 추락한 공군기는 미국이 1천106대로 소련 공군기의 335대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11월8일. 이날 소련 공군의 미그-15 전투기는 지금의 단둥(丹東)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미 공군 F-51기를 격추해 첫 전과를 올렸다. 또 이틀 뒤인 10일 신의주 상공에서 '하늘의 보루'라고 불리는 B-29 폭격기 1대를 격추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국은 중국인민 의용군을 파견할 때 소련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소련 공군은 미국과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을 우려해 작전 범위를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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