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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어느 한 재미동포 반공포로의 귀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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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8-06 10:1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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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재미동포 '반공포로'의 귀향 이야기

프레스아리랑  | 입력 : 2020/08/06 [08:33]

 

다음은 6.25전쟁시 한국군의 포로가 되고난 후에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시민이 된 한 반공포로가 수십년만에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향인 북의 공화국을 방문한 경험을 미국내 한 지인들에게 진솔하게 글로 써서 보낸 것이다. 라스베가스에 거주하는 재미동포인 한동상 선생이 자신의 이북방문을 회고하며 최근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추천에 따라 여기에 소개한다.

 

 

Subject: 려명에 소개된 한 전쟁노병의 글 

'위대한 사랑의 품속에 우리 전쟁노병 산다'를 보고

전쟁노병들을 이렇게 대우해주는 나라이니 지금도 강위력한 군일밖에 없지요.  목숨바쳐 싸운 이들에 대한 감사도 가족들에겐 큰 위로가 되지요

 

오 박사님  감사합니다.    

신부  동지에게

 

박사님의 말대로 전쟁노병들은 당연히 국가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국가의 최상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특수층은 남한에서 말하는 특수층과 달리조선의 최고특수층은,  일제시대 독립을 위한 항일투사와 그의 가족과 후손들,  조선전쟁에서 사망한 병사와 가족들전쟁노병들그리고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딴 운동선수들그리고 과학자들박사들학교선생들과 의사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사회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모든 대우에서우선권을 받는다고 합니다.  자본주의사회처럼 돈과는 상관이 없다고해요.

 

북한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봉사한 사람들이 특수층이지돈과 사회적 직위와는 관계가 없다고합니다. 오박사도 알다싶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돈이없으면 죽지만사회주의사회에선 국가가 인민들의 생계를 책임지기때문에돈이없어도 살수있는 사회임으로  돈이 문제가 아니고 명예를 더 중요시하는 사회이지요.

 

저의 경우를 예를 들겠습니다. 

 

내가 1982년도에 고향 방문할때까지는 북의 정부에서는 나를 전쟁사망자로 취급하여 저의 부모에게 사망통지서를 보냈답니다당연하지요.  전쟁이 끝나 몇십년이되었는데 도 집에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말이지요

 

그리하여 우리집 형제들이 아마도 특수층에 속했던가봐요나의 동생들이 노동당원들이 되었다고 합데다.  일제시대 우리집은 과수원도 있고 땅도 많은 중농이상의 집이였어요

 

우리아버지는 일제시대 평양의대를 나와 함흥병원에서 의사생활을 하셨어요그러니까 북한에서 볼때내 형제들이 노동당에 입당할 자격이 없다고봐요.  그런데 내가 함흥의대 다니는, 130명과 함께 평양의 인민군 1군관학교에 후 없어졌으니 전사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한 내가 1081년도에 미국에 살아있다고  편지가 왔으니 우리친척은 물론 , 동네가 난리가 났대요.  그 다음 1982봄에 고향방문하게 되었지요.  그때 나의 가족과 지인들은 모두 "가지말라고, 내가 가면 죽는다고 극구 말렸어요

 

그러나 나는 죽어도 가겠다고 했어요왜냐하면 우리부모가 형제중에서 나를 제일 사랑했는데 그런 내가 부모에게 효도 한번 못해 본 불효자식이 된것이 너무나 가슴아프고 원통했어요나는 죽어도  부모의 묘에 가서 실컷 울면서 불효자식의 용서를 빌고 싶었어요.  그래서 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과거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는것도 아니였지만 그러나 나의 고향방문 의지를 아무도 꺾을순 없었어요. 비장한 마음을 갖고갔는데생각외로 북한에서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더군요.  나의 과거와 남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북한에서 일체 물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내원은 나에게 "내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자기는 따라가겠다고 공손히 말하고 아주 친절하고 나의 모든 편리를 도와 주었어요

 

남한에선 안내원을 "감시원"이라고 악담을 했는데 그것은 완전히 거짓말이었어요.  그 안내원은 "여행가이드역할을하고 그가 없으면 길도 모르는 나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원하는 모든것을 편리를 봐주고  한푼 안드는  안내가이드였습니다.

 

나에게 운전수가 달린 독일제 Benz 차를 배당해 주어 고향방문 끝나는 15일동안 이용했습니다.  당시 북한에는 전부가 Benz 차만 돌아다니고 있었어요안내원이 말하기를 당시 조선이 Benz 회사의 최고 큰 고객이였다고 말했어요도착 첫날에는 호텔을 정하고 평양시내 구경을 하고 다음날 내가 원한대로 함흥에 갔어요

 

전쟁때 미군의 폭격으로 평양이나 함흥 모두 형편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를 너무나 놀라게 했습니다평양,함흥모두 5-6아파트로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었어요평양은 당시 서울보다 더 잘 건설되어 있었고 후생시설이 더 잘되어 있었고 도시계획이 잘 되어있어 공원도 60개나 된다고 했습니다.

 

평양은 미국 Washington DC 와 같은 도시풍의 인상을 주었어요.  Dr. Oh 도 아시다싶이 대부분의 건물안내벽은 거의가 모두 대리석으로 지었고 샨드리아등으로 장식되고 가는 곳마다 색다른 모양의 분수가 많았고 평양시내에서는 150m 높이 올라가는 분수가   높이 뿜어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서울과 비교하여 너무나 놀랐어요.  형편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던 평양이나 함흥이 그렇게 변해 있는줄은 꿈에도 몰랐어요한국에서 국민들에게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했어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함흥에 도착하니 형제들이 모두 마중나와 나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모두 울었지요함흥에 5일간 형제들집에 함께 지내면서 부모산소에 가서 성묘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쏟았어요.  나의 모교 함흥의대도 방문했어요.  함흥의대 학장이 나보다 4후배인 사람인데 나의 학적부를 보여주면서  최우등한 나에게 "만일 선배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자리에 앉았을 것인데하는 것이었다.

 

함흥의 동생들집에서 교대로 자면서 남동생이 하는말이  "형님덕분에 내가 노동당원이 되었어요.  형님이 전사하신줄 알고 전쟁이 끝난후에 형님의  '전사통지서'를 아버지가 받고 우리모두 한없이 슬피 울었어요그리고 우리모두 형님 제사상을 차리고 모두  슬퍼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 돌아오시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소". 하며&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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