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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미국이 파괴해 온 한국의 민주주의] ① 미군정과 이승만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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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12-24 08:4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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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파괴해 온 한국의 민주주의]  ① 미군정과 이승만 시기


이 영 석 기자 자주시보 12월 23일 서울 

한국 현대사 속에서 한국 민주주의 주요 시기마다 미국이 어떻게 개입해 민주주의를 파괴했는지 살펴본다.

 

1.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 시대

 

1945년 미국은 한반도 남쪽에 점령군으로 주둔하며 군정을 설치했다.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간 것이다.

 

▲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조선총독부에 게양되고 있다. [출처: 주한 미8군 페이스북]

 

친미세력 육성

 

● 친일파 등용

 

미군정의 초기 한국 통치는 기본적으로 조선총독부의 통치 체제를 현상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 기구와 체계, 관리들을 대부분 유임했다.

 

미군정은 우선 친일파를 등용해 통치 수단으로 삼았다.

 

일제가 망하자 도망가기 급급했던 친일파들은 미군정 하에서 새 세상을 만난 듯 부활해 활개를 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던 친일 앞잡이들이 미국의 비호 아래 또다시 민족운동가들을 잡아들이며 제 살길을 찾은 것이다.

 

미국은 오로지 소련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통치 목적으로 들어와 우리 민족의 단합과 새 사회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극우세력들을 키워 민족세력을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그런 속에서 일제 잔재 청산, 친일파 청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

 

또 당시 미국의 정책은 일관되게 반소·반공 노선이었다.

 

미군정청 여론조사국이 1946년 7월에 실시한 ‘미래 한국 통치구조’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회주의가 70%, 공산주의가 10%, 자본주의가 13%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 국민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앞서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의 삼상회의(3개국 외무부장관 회의)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처리 문제가 결정되었다.

 

▲ 모스크바 삼상회의.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 회담에서 3개국은 한반도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합의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내용에서 ‘임시민주정부 수립’이 빠진 채 국민에게 왜곡 전달되어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 입장이 격렬해졌다.

 

이런 정치 상황에서 미국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와 통일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남한의 신탁통치 반대세력을 앞세워 정국을 좌익세력과 우익세력 간의 대결로 몰고 갔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이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추진할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48년 남한에서 단독선거가 진행되어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이 해방 이후 친일파를 친미파로 재육성하고 단독선거로 이승만 정부를 세우는 바람에 한국의 친일 역사 청산과 통일 민주정부 수립은 시작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만약 당시 미국의 방해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이 통일된 정부를 구성하고 새로운 민주사회를 맞이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인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 [출처: 국가기록원]

 

국민 억압

 

● 미군정, 인민위원회와 임시정부 등 불허

 

미군정은 한국 현상 유지 정책의 일환으로 해방 후 한국인들의 자체적인 정치·사회적 개혁이나 정부 수립 움직임을 모두 허용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무엇보다 1945년 10월 10일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정 외에 어떤 정부도 있을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인들이 해방 이후 조직한 자치적인 치안, 행정 조직들을 부정했다.

 

이러한 속에서 해방 이후 전국 각지에 조직된 인민위원회, 치안위원회 등 우리 국민의 자치 조직들이 미군정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뿐 아니라 미군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이는 미군정이 한국인들의 자체 정부 수립과 사회 개혁을 말살하며 한국 민주주의를 파탄 낸 것이다.

 

● 4.3항쟁 개입

 

▲ 1948년 5월 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출처: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주 4.3항쟁은 1948년 경찰의 3.1절 집회 발포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총파업을 시작으로 남한만의 단독선거인 5.10총선거를 반대한 무장봉기로 발전했다.

 

미군정은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했다’며 이들을 찾아낸다는 명분으로 경찰과 서북청년회를 이용해 제주도민들과 무장대를 진압했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5.10총선거는 한반도를 분단된 나라로 만들 수 없다는 일념으로 많은 제주도민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아 결국 과반 투표에 실패해 무효 처리가 되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 5.10총선거가 무산되자 미 극동사령부는 제주도에 미 구축함 크레이그호를 급파해 진압 작전에 대비했다.

 

그리고 미 제6사단 로스웰 브라운 대령을 5월 중순께 제주도 최고지휘관, 즉 진압 작전 책임자로 파견했다.

 

미국이 직접 4.3항쟁에 개입한 증거들이다.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군과 경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에게 있었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대통령과 주한미군 사령관이 체결한 군사협정의 2조에는 ‘미군의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해안경비대, 경찰을 포함한 군의 전면적인 작전상 통제권을 갖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미군은 초토화작전으로 제주도민에 대한 학살을 주도한 송요찬 조선경비대 제9연대장을 칭찬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1948년 12월 18일 윌리엄 로버츠 주한 미 군사 고문단장은 한국 국방부장관 등에게 보낸 편지에서 “송요찬 연대장은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하였다. 이런 사실을 신문과 방송, 대통령 성명에 의하여 일반에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949년 1월 채병덕 참모총장의 “공산주의자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제주에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겠다”라는 서한에 로버츠 고문단장은 “최고 수준의 생각”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 같은 미군정의 태도는 군·경 토벌대의 민간인 학살을 용인해 준 것과 같다.

 

미군정은 4.3항쟁에 위와 같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통일정부 수립을 향한 제주도민들의 민주 의지를 몰살했다.

 

● 4.19혁명 개입

 

1960년 3.15부정선거가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어찌 됐든 미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줄 인물이 이승만 외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르고 대규모 시위가 촉발하자 미국은 한국 정치 상황에 직접 개입하기로 했다.

 

주한 미국 대사가 이승만을 만나 아직 국민이 ‘이승만 사퇴’를 요구하는 건 아니니 재선거를 하라고 했지만 이승만이 이를 거부했다.

 

이후 시위가 계속 확산해 “이승만 하야”를 비롯해 “조국통일” 구호까지 나오게 되었다.

 

▲ 4.19혁명 당시 남북학생회담 요구 개최 시위. [출처: 국가기록원]

 

그래서 미국은 4.19시위가 반미·통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이승만에게 ‘무조건 하야’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7일 국회에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미국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내세워 써먹을 대로 써먹다가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이승만을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의 요구가 더 큰 사회 개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테러·암살 배후

 

해방 이후 여러 정치인이 테러, 암살당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국의 눈엣가시였다.

 

미국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곱게 보지 않았다.

 

● 김구·여운형 선생 암살

 

그중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위험을 무릅쓰고 참가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통일을 추구한 그를 미국이 위험인물로 본 것은 당연했다.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자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은 김구 선생 암살이 미국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 김구 선생 국민장 행렬.(1949.7.5.)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여운형 선생도 마찬가지이다.

 

해방 뒤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여운형 선생은 12차례나 우익 테러에 시달렸다.

 

그런데 미군정은 테러범의 신원을 파악하고서도 범인 검거와 수사에 착수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치적 반대자들이 (여운형의) 목숨을 노린다”라는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보고에도 미군정은 아무런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미국이 여운형 선생에 대한 테러·암살을 조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한국인들의 민주주의 의지를 대변하며 존경받는 명망가들을 테러·암살해 민주주의 발전을 파괴했다.

 

▲ 여운형 선생 장례식 행렬.(1947.8.3.) [출처: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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