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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39.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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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31 03:5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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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다물흙 림원섭

이 글은 2010년9월 자료다.

39.
1947.5.21 서울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은 일방적 퇴장으로 파탄시켰다. 미국은 통일된 국가 보다는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게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전후처리 관련 분쟁에는 유엔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유엔헌장 제107조’의 규정을 위반하고 불법적으로 유엔에 상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대방 진영을 무시하고 독단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으로서 조국을 분단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불법적으로 유엔에 상정할 때부터 분단은 정해져 있는 거나 같았습니다. 국제평화기구에서 범죄단체로 전락한 유엔 은  우리 조국을 완전히 분단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죽는 날까지 혈육을 만날 수 없게 하여 수백만 명 이산가족에게 죄를 저지른 범죄 집단 유엔은

북한을 침략해서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범죄를 또 저질렀습니다.  미국은 저들의 거수기를 발동해 47년 11월 14일에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담당할 「유엔한국위원단」을 만들어냈으나 몇 달 뒤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하여 

2.7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1948년).   

1948년 1월 8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날 서울의 여러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1월 19일에는 경성전기회사 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애국민중의 투쟁은 마침내 경향 각지로 확대됐다. 
 1948.2.7일에는 전국에서 참가하였다( 2.7 항쟁 즉, 2.7구국투쟁). 서울, 인천, 대전, 목포, 부산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철도노동자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물러가라!≫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이남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등의 구호 밑에 총파업에 돌입했다. 투쟁은 삽시에 40여개의 도시를 포함한 경향 각지를 휩쓸었고 철도, 체신을 비롯한 각부문에 걸쳐 수백개의 공장, 업체 노동자들의 참가하에 대규모적인 동맹파업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날 전라북도 완주군 농민들도 투쟁에 나섰으며 경찰의 탄압만행에 격분하여 경찰지서를 들이쳤다. 합천, 김제를 비롯한 각지의 농민들은 시위와 횃불투쟁 등을 벌였다. 2월 13일 청년학생들은 서울 탑골공원 앞과 종로 네거리, 남대문 거리들에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사이에만도 투쟁참가자들은 33개소의 경찰기관을 습격하고 47명의 악질친일경관들을 살상했으며 68개소의 전선을 끊어버리고 39대의 기관차와 5개소의 철길과 도로를 파괴해 버렸다. 이 투쟁으로 이남 전역에서는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었고 대부분의 공장, 기업체들에서 생산이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2.7구국투쟁은 미국과 그 추종자들의 가혹한 폭압 속에서도 3개월 가까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등 무려 2백여만에 달하는 각 계층 애국민중이 참여했다. 
참으로 2.7구국투쟁은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독립된 조국에서 살려는 우리 민중의 굳센 의지를 내외에 널리 과시한 애국적 투쟁이었다.

1948년 2월 5.10단독선거를 분쇄하여 민족분단을 막고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력투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2.7구국투쟁이라는 '작은 전쟁'에서부터 6.25전쟁이 끝나는 1953년 정전까지 우리민족은 죽음으로써 미국에 항거하였다. 

해방된 조선에서 독립정부의 수립은 오직 조선인의 힘만으로 이뤄져야 한며 유엔으로 간판을 바꾼, 실질적인 미군 감시하의 선거는 원치 않았다. 

 우리민족의 장래는 우리 민족 스스로가 결정해야지 세계대전 후 독립하여 미국의 원조가 필요한, 우리민족에 관심조차 없는 잡다한 신생국가들을 포함한 유엔총회의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미국이 천명하고 「국제연합헌장」에도 있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즉, 그 나라 운명은 그 나라 사람들 스스로가 결정해야지 다른 나라가 또 다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민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횡포에 의해 불법적으로 조작된 1948년의「5.10단독선거」는 민중을 억압하는 살벌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강행되었다. 그것은 민의가 수렴된 자유스럽고 평화적 선거가 아니었고 주한미군이 개입된 군사적 폭력행사였다. 

이에 대해 AP통신은  『미군 정찰기는 상공을 비행하였고 선거장이 있는 곳에는 야구용 타봉을 가진 「향보단」에 의하여 엄중히 경호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수 천 명의 경관과 투입된 민간인이 미군의 지원하에 각 요소와 교차장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며 각 골목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용 타봉, 곤봉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경비대는 미국제 카빈총으로 무장하였다. 분위기는 계엄령하의 도시와 같았다』라고 보도했다. 

미군은 투표를 거절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주저하는 사람들까지도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하고 마구 때리며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했다. 골목마다 뭔가를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났고 여자의 비명 소리도 들려왔지만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만 듣고 있을 뿐 주위에서는 그 쪽으로 감히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은 5월7일부터 10일까지의 사이에만도 5만 여명에 달하는 우리 민중들을 체포했고 5백89명의 애국민중을 잔인하게 죽이는 만행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파렴치하게도 이미 작정했던 대로 단독선거결과를 날조하여 『선거가 성과 있게 진행』됐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미국은 유엔을 도구로 이승만을 괴뢰 정권을 만들어 내는 선거놀음판을 벌림으로써 우리 조국과 민족을 분열시키는 범죄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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