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3. 박상학탈북자의 쓰레기같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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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6-13 13:27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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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에 매인 인생
한번의 달콤함에 백년 방탕이라는 말처럼 한번 들인 돈맛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수밖 에 없는 법이다.
저렬하고 속된 박상학의 추악상을 폭로하는 체험자들의 증언은 계속되였다.
박민철은 퇴학이라는 수치스러운 선고를 받고서도 박상학이 자책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이 오히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돈벌이를 하게 되였다느니, 돈이 사람의 무게를 결정하는 저울추라느니 하며 술상앞에만 마주앉으면 주절댔다고 하면서 꼭 주인집의 담장밖으로 뛰쳐나간 개몰골 그대로였다는데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의 이야기는 박상학의 진면모를 들여다보는 확대경이나 같았다.
… 집으로 돌아와서도 배치된 직장에는 가지 않고 박 상학은 돈벌이구멍수를 찾아 병자년 까마귀 빈 뒤간을 들여다보듯 이리저리 빈둥거렸다. 탐욕의 배는 늘 곯아있 다고 타락한 생활만을 추구하여온 그자에게 있어서 돈에 대한 갈증은 날을 따라 더해만 갔다. 나쁜 씨앗은 언제나 빨리 자라듯이 박상학의 금전의식은 넝쿨을 뻗고 마디를 맺으며 이 나무, 저 나무를 칭칭 감아돌아갔다.
그자의 그릇된 행동을 두고 박민철은 따로 그를 불러놓 고 직장생활이라도 바로하라고 따끔히 충고를 주었다.
그때마다 박상학은 코방귀를 뀌며 직장생활 같은것은 해서 무엇하는가, 돈만 잘 벌면 그저그만이라고 씨벌대군 하였다고 한다.
박상학은 무려 3년동안이나 무직건달을 부리며 여러가지 구실로 돈을 꾸고 그것을 물어주지 못해 이웃들의 살 림집에 불법침입하여 돈과 귀중품, 재산들을 훔쳐내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박상학의 이러한 행적에 대해 박민철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는 말처럼 돈에 환장한 나머지 박상학은 고등중학교시절 자기를 배워준 스승의 집에까지 뛰여들어 도적질을 하는 배은망덕 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집에까지 말입니까?!》
우리의 의문앞에 박민철은 그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 1987년 5월 29일 박민철은 동창생들과 함께 중학시절 담임교원네 집에 찾아갔었다.
그날이 바로 선생님의 생일이였던것이다. 졸업후 처음으 로 맞는 선생님의 생일이라 제자들의 도리를 다하고싶은 심정에서였던것이다.
이날 그들은 자기들이 성의껏 준비해온 기념품들을 선생님에게 드리며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때 박상학은 스승과 동무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퇴학 이라는 불미스러운 오점을 남긴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돌 이켜보아야 하겠으나 몸이 불편하여 스스로 퇴학한것처럼 변명하였다. 그자는 스승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는것 이 아니라 뱁새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집안에서 값이 나 가는 물건들이 없는가 하는데만 관심하였다.
며칠후 박상학은 대낮에 선생의 집에 뛰여들어 아래방 에 놓여있던 증폭기와 록음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값진 물건들을 훔쳐 그것을 팔아먹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 할수 없는 절도행위를 하였다.
예로부터 글 한자를 가르쳐준 사람은 평생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는 말이 있다.
박상학의 행위는 삼년 먹여 기른 개 주인의 발등을 무는 격이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박상학은 자기의 비인간적인 행위가 까밝혀지자 제 부모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제발 잘못했노라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닦은 콩에서 싹이 나올리 만무하다고 재물욕에 머리가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박상학은 더욱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길에 들어섰다.
증언자들중에는 당시 보안원으로 일하였던 조성민로인도 있었는데 그는 박상학은 강도절도범이라며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듯 량미간을 쪼프렸다.
… 1998년 6월초 어느날 밤, 박상학은 동생 박영학과 함께 혜산시 혜화동 19반 3층 1호에 뛰여들어 수많은 현금을 훔쳐내는 행위를 저질렀다.
이자들은 이미전에 집주인인 강종훈로인의 맏아들 강청 길한테서 돈을 꾸어간적이 있었다. 하지만 박상학에게는 그것을 물어줄 능력이 없었다. 그동안 그 돈으로 타락한 생활을 누려왔던것이다.
강청길은 그들이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록 돈을 반환하지 못하자 독촉을 하였다.
궁지에 빠진 박상학은 강청길의 부부가 청진으로 나들이간 기회를 리용하여 깊은 밤 복면을 쓰고 이 집에 뛰 여들었다. 그리고는 늙은 강종훈내외를 때려 방바닥에 쓰 러뜨리고 많은 현금을 훔쳐내는 범죄를 감행하였다.
얼마나 비렬한자들인가. 자기들을 도와준 사람의 부모들을 구타하고 돈까지 훔쳐가는 박상학이야말로 초보적인 륜리도덕마저 줴버린 인간쓰레기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288조에는 사람의 생명, 건강에 위험을 주는 폭행, 협박을 하여 개인의 재산을 강도한자는 4년이하의 로동교화형에 처한다고 지적되여있다.
박상학은 그로부터 얼마후 자기의 강도적인 절도행위가 드러나게 되자 남조선으로 도망치고말았다. …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조성민로인은 원체 박상학은 뿌리부터 썩은 놈이였다고 하면서 놈의 가정래력에 대해 들려주었다.
박상학의 애비 박건길은 한때 량강도 통신기계부속품 공장에서 관리일군으로 일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태여나 1960년대초 조국의 품에
안긴 재일귀국공민이였다. 고마 운 조국의 품은 그들의 가정을 따뜻이 보살펴주고 돈 한 푼 받지 않고 공부시켜 사회의 주인, 공장의 주인으로 내세워주었다.
그러나 박건길은 자기가 받아안은 사랑과 믿음에 보답은커녕 배신으로 대답해나섰다. 일본에서 물젖은 극단한 개인리기주의에 사로잡혀있던 그자는 자식들과 공모하여 나라의 귀중한 재산들을 훔쳐 팔아먹는 역적짓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박상학은 아버지가 공장에서 비법적으로 빼내오는 물자, 자재들을 동생 박영학과 함께 이웃나라에 팔아넘겨 사복을 채우군 하였다.
박상학의 에미 리순희도 남편과 자식들이 국가의 법을 어기고 비법행위들을 하고있는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거기에 공모하여나섰다. 또한 직장생활도 하지 않고 노상 개를 부여안고 방바닥에서 딩굴며 무위도식하던 녀동생 박선화도 집에 들어오는 돈과 물건앞에 입이 함지만 해지 군 했다.
결국 박상학의 집안은 애비에미로부터 동생들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재산과 개인재산을 훔쳐 배를 채우는 더러운 도적집안, 인간쓰레기들이 오뉴월 구데기끓듯 하는 오물장이였다.
박건길과 그의 자식들은 돈에 환장되여 1986년 조국방문으로 일본에서 온 사촌형의 돈까지 훔쳐냈다.
제국주의련합세력들의 고립압살책동과 몇년째 지속되는 자연재해로 공화국이 시련을 겪게 되자 박건길은 조국에 대한 믿음이 없이 배신의 나락으로 영영 굴러떨어졌다.
박건길은 기술대표단의 성원으로 1996년 5월부터 1997년 11월까지 이웃나라에 드나들면서 나라의 귀중한 자금으로 부화타락한 생활만을 추구하였다.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양은 승냥이에게 먹히우는 법이다. 오직 자기의 안락만을 추구하던 이자는 그 나라에 경제교류라는 명목으로 남조선에서 기여든 안기부(당시)요 원들의 눈에 들게 되였다. 언제나 술과 녀색에 미쳐 돌아가는 박건길은 그자들에게 있어서 맛좋은 먹이감이 아닐수 없었다. 안기부요원들이 쥐여주는 몇푼의 딸라에 매수된 박건길은 중요한 국가비밀까지 다 넘겨주며 괴뢰들과 밀려다니다가 지은 죄가 두려워 1996년 6월 9일 남조선으로 도주하였다.
이자는 남조선에 나가서도 안기부의 추동밑에 반공화국 적대행위를 계속 감행하였다. …
사람이란 누구나 다 태여나서부터 백지장과도 같은 인 생길을 선사받게 된다. 그 티없는 인생의 시작을 어떻게 떼며 또 무엇으로 수놓아가는가 하는데 따라 그 삶이 규정되고 평가된다. 때문에 누구나 자기의 인생길을 아름답게 장식하려고 노력하는것이다.
허나 박건길과 같이 치욕으로 얼룩진 인생은 이웃들은 물론 부모와 형제들에게서도 배척을 받게 되는것이다.
나라의 법과 질서를 란폭하게 위반하며 씻을수 없는 범 죄를 저지른 박건길과 그의 가족들의 행적을 더듬어보는 우리들의 눈앞에는 혜산으로 오는 도중 함경남도 함흥시 에서 만나보았던 일가친척들의 격분에 찬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하였다.
함흥시 동흥산구역 서운1동 12반에서 살고있는 박상학의 셋째고모이며 박건길의 누이동생인 박혜영을 찾아갔을 때 그는 분격을 금치 못해하였다. 박건길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생일은 물론 명절에도 찾아오지 않은 불효자식이였다. 우리 동생들이 너무도 보기가 민망스러워 《오빠, 아버지가 토의할 문제가 있다고 좀 오시래요.》라고 말하면 《출장갔다가 아직 오지 않았 다구 해라.》라고 하면서 부모들을 박대하였다. 이것은 결코 박혜영 한사람의 목소리만이 아니였다. 함흥시 회상구역 해빛동 34반에서 살고있는 박건길의 녀동생이며 박상학의 고모인 박미영도 가슴을 두드리며 자기의 분노를 이렇게 터놓았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은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들을 생전이나 사후에나 잘 모시는것을 어길수 없는 법도 로, 자식의 응당한 도리와 의무로 여겨왔다. 그런데 박 건길은 집안의 맏아들이지만 부모님들이 살아계실 때 얼 마나 속을 태웠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저 건 내 새끼가 아니다.》고까지 했겠는가. 부모가 살아있을 때 그렇게 불효막심했다면 그들이 돌아갔을 때에라도 채심해서 맏상제의 도리를 해야 할게 아닌가. 그런데 박 건길은 부모들의 제사 같은데는 아예 관심조차 돌리지 않았다. …
부모와 형제들에 대한 정이 없는자는 조국도 쉽게 배반하는 법이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 추상적인것 이 아니라 자기 부모, 자기 형제에 대한 정과 사랑 등 구체적인 생활세부를 통해 표현되는 고상한 감정세계이기 때문이다.
가정에는 불효하고 나라에는 불충한 박건길의 피를 그 대로 이은 박상학이기에 그자는 남조선으로 달아나서도 자기의 일가친척들을 모독하며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리용하고있는것이다.
이자는 자기가 반공화국삐라살포에 나서게 된것은 공화 국에서 자기 삼촌과 고모들을 비롯한 친척들을 모두 법 적으로 처리하고 또 사촌형제들이 빌어먹으며 다니기때문 이라고 날강도적인 거짓말로 국제사회를 우롱하고있다. 미국과 남조선의 반통일분자들이 던져주는 몇푼의 돈에 명 줄을 건 더러운 수전노의 몸뚱아리를 조금이라도 감싸보 려고 이렇듯 자기의 친척들까지 우롱하고있는것이다.
우리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최주혁에게 물었다.
《박상학이와 돌격대생활을 함께 하였다고 했는데 그 때 그자가 돌격대의 선전부에서 지도원(당시)을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이 물음앞에 최주혁은 천만뜻밖이라는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선전부 지도원이라니요? … 아니, 전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박상학은 무직으로 건달을 부리다가 동주민들과 이웃들의 눈총이 두려워 돌격대에 마지못해 들 어왔습니다. 내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청년돌격대에 입대하였으니 1988년 9월초쯤이였을겁다. 그때 그자 도 저와 같이 입대하여 광복거리건설장에 함께 갔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달도 일하지 못하고 힘들다구 하면 서 집으로 도망쳐온자인데 어떻게 그런 중요한 사업을 맡길수 있겠습니까?》《예, 그렇군요. 그런데 박상학은 지금 남쪽에 도주하여 자기는 량강도청년돌격대에서 선전부 지도원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한결같이 말했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아니, 일하기 싫어하구 뺀둥뺀둥거리던 놈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그건 제 몸값을 올려보려는 허튼수작입니다.》 너무도 황당무계한 거짓말에 최주혁은 쓰겁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박상학은 선동부 지도원이 아니라 선전대 대원으로 있었습니다. 제가 광복거리건설장에서 돌 아오니 그자가 갓 조직된 기동예술선전대에 다닌다구 하면서 우쭐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웅뎅이안에 있던 미꾸라지가 강에 나갔다구 결코 룡으로 둔갑할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박상학의 돌격대생활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였다.
… 노상 안일한 생활과 돈벌 구멍만을 찾아다니던 박상학은 새로 조직되는 돌격대 기동예술선전대에 타악기 한조를 들여놓으며 선전대 대원이 되였다.
천하에 둘도 없는 돈벌레인 그의 처사는 마른나무에서 잎이 피는것을 보는것만큼 희한한 일이였다.
여기에는 박상학의 음흉하고 교활한 목적이 깔려있었다. 그자는 선전대에 적을 걸어놓고 물자구입을 한다고 하 면서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장사와 거간, 협잡질로 제 리 속을 차리는데만 골몰하였다. 돈에 환장이 된 박상학은 나중에는 나라의 귀중한 국보인 민족문화유산까지도 팔아먹는 반역행위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
우리는 당시 보안원이였던 조성민로인에게 박상학의 죄행자료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줄것을 부탁하였다.
그가 들려준데 의하면 박상학은 돌격대생활을 하면서 동생 박영학과 함께 1998년 6월초 강종훈로인 내외를 구 타하고 절취한 돈을 가지고 근 한달동안 황해남도를 비 롯한 개성일대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목적은 민족문화유산을 얻어보자는것이였다.
그러다가 개성지방에서 옛무덤을 도굴하여 고려청자매 병 2점을 손에 쥐게 되였다.
이자들은 1998년 7월초 그것들을 혜산시 성후동 대안 을 통하여 이웃나라에 비법월경하여 밀매하는 범죄를 감 행하였다.
박상학은 안일하고 부화타락한 생활을 하던 나머지 이 웃나라에서 비법적으로 마약암거래를 하는자와 내통하여 마약을 끌어들였으며 몰래 사용하는 반국가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낯가죽이 두터운 박상학은 온갖 감언리설로 처녀들을 꼬이며 돌아쳤는데 돌격대기간 김경희와 리경희, 김복녀 를 비롯한 여러 녀성들과 부정적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결혼식문제가 상종되면 아버지가 외국출장에서 돌아온 다음에 토의하자느니 뭐니 하면서 게면쩍게 놀아대군 하였다니 이 얼마나 추악한 협잡배인가.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1998년 8월 9일 조성민은 구체적인 물증들과 증인들의 진술을 종합한데 근거하여 박상학을 호출하였다.
자기가 범한 죄과의 엄중성에 대해 잘 알고있는 박상학은 해당 법기관의 호출을 받자 법적제재가 두려워 이날 저녁 집을 나간 후 남조선으로 달아났다. 추악한 인간쓰레기가 갈길은 이렇듯 나라와 민족을 반 역하는 길밖에 없는 법이다.
박상학은 남조선으로 달아나자마자 미국과 극악한 반통 일세력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꿀꺽꿀꺽 삼키고 컹컹 반공화국대결망발을 짖어대는 미친개로 변하고말았다.
지금으로부터 2년전인 2014년 11월 10일 남조선신문 《한겨레》에는 《자유북한운동련합》 대표 박상학과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리민복사이의 더럽고 유치한 개싸움에 대한 기사가 게재되여 남조선인민들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을 자아냈다.
반역죄를 짓고 남조선으로 도주하여 반공화국삐라살포 로 더러운 목구멍을 채우고있는 리민복은 독자투고란에 이런 글을 올렸다.
《박상학, 이자는 나에게 삐라제작과 풍선날리기를 배운 제자이고 10살이나 어린 놈이다. 그런 놈팽이가 자기 의 홈페지에 스승인 나의 실명을 올려놓았다. 박상학이 란자는 풍선날리기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1t짜리 풍선 차를 운영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2.5t짜리 풍선차였고 지금은 7.5t짜리 풍선차를 리용하고있다. 삐라살포용가스통 도 박상학의것보다 거의 2~3배이상짜리를 리용하므로 그 자는 나와 비교도 안된다.》
리민복의 반목질시에 약이 오른 박상학도 그자를 헐뜯 기에 나섰다.
《리민복이 혼자서 단번에 120만장의 삐라를 북에 보냈다는것이 거짓이라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
그러면서 박상학은 내가 뭐 리민복의 제자인가, 나보고 돈을 바라고 삐라살포를 한다고 하는데 자긴 뭐 아 무것도 바라지 않고 풍선날리기를 하나며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상대를 공격하였다. 그야말로 세상에 까나오지조차 말았어야 할 인간쓰레기들의 밥통쟁탈전, 개싸움이 아닐수 없다. 먹이를 앞에 놓고 서로 으르릉거리는 개들도 이자들의 싸움질에 혀를 차지 않고는 못 견딜것이다.
이웃나라의 친척방문기간 괴뢰패당에 의해 유인랍치되 여 남조선에 끌려갔다가 고마운 조국의 품, 가족들의 품으로 다시 안긴 박정숙녀성은 인간추물 박상학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였다.
《… 나는 박상학이라는그 인간쓰레기를 알고있다. 그 자는 무슨 <북자유>니 뭐니 하면서 인권나발을 자주 불어대고있지만 그는 원래 인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는 추물이다.
그자는 오직 돈밖에 생각하는것이 없는 일등수전노이다. 언제인가는 풍선에 달아보내게 된 딸라라는것을 가짜 종이돈으로 바꾸어놓고 그 돈을 제 주머니에 채워넣 기까지 한 더러운자이다. 그런 푼전에까지 올빼미눈이 되여 돌아치는자이니 사방에서 모여든 인권모략군들의 손 발노릇만 잘하면 뭉치돈이 굴러들어올것 같아 앞장에서 깡패기질을 부려대고있다고 본다. 치마를 둘렀건, 미국땅 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에서 범죄자로 락인찍혔건 관계없이 돈만 쥐여주고 <북인권>소동의 돌격대로 계속 써먹겠 다는 도장만 찍어주면 그만이라는 사고를 가진자가 바로 <자유북한운동련합>이라는 모략단체, 오물집단의 두목노릇을 하는 박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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