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벽예감 401- 1 ]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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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6-29 17:4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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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1.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한 미국군사고문단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2020년 7월 1일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71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 육군성은 주한미국군철수를 완료한 이튿날인 1949년 7월 1일 약 500명으로 이루어진 군사고문단을 서울에 설치했다. 군사고문단의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주재 미국군사고문단(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이다. 이 글에서는 미국군사고문단이라는 약칭을 쓴다.
미국군사고문단이 한국군을 어떻게 지휘통제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군의 경험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50년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은 미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었다. 당시 제1보병사단만 미국군 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군 전체가 미국군 밑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군에는 합동참모본부가 없었기 때문에 미국군 밑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 합동참모본부는 1990년 10월 1일에 창설되었다. 그러므로 1948년에 창군된 이래 1990년까지 42년 동안 한국군은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직접적인 지휘통제를 받아온 것이다. 1990년 10월 1일 한국군 합동참모본부가 창설되었지만, 지금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주한미국군사령관이 장악, 행사한다.
1950년 6월 당시 미국군 제1군단장 프랭크 밀번(육군 소장)은 자기 군단에 배속된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공식적으로 지휘통제하고 있었지만, 그 사단을 현지에서 사실상 지휘통제한 지휘관은 미국 육군 중령 로이드 로크웰이었다. 1950년 당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이 2010년에 남긴 회고록을 보면, 로크웰은 수석고문이라는 군직을 가지고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사실상 지휘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수석고문 밑에 작전고문, 정보고문, 통신고문, 군수고문, 군단연락장교, 공지(空地)연락장교, 연대고문 등 10명을 두고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어깨에 별을 단 한국군 사단장들이 미국군 중령의 지휘통제를 받는 치욕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존엄과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미국군에게 매달린 것이야말로 한국군이 겪은 불행과 비극이었다.
70년 전에만 그런 게 아니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창설된 때로부터 오늘까지 71년 동안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변함없이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손아귀에 있다. 몇 해 전부터 미국이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돌려주겠다고 하는데도, 한국군은 아직 돌려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느니 또는 ‘철통같은 혈맹’은 영원하다느니 뭐니 하면서 미국군의 작전통제를 계속 받으려고 한다. 미국의 발밑에서, 미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한, 이 땅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실현될 수 없고, 조국통일도 실현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49년 7월 1일부터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했다.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단 정보고문이 수집한 군사정보는 수석고문을 통해 미국군사고문단 본부에 직보되었다. 이런 사정은 미국군사고문단이 6.25전쟁과 관련된 모든 군사정보를 독점통제하였음을 말해준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개전전황보고는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것이다.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짤막한 전황보고를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통보했다. 무초는 자기가 받은 전황보고를 워싱턴으로 급히 타전했다. 미국군사고문단이 작성한,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사람들이 전혀 의심하지 않는, 아니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6.25전쟁 개전전황보고는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까지만 해도 그날 새벽에 38도선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에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역사기록은 미국군사고문단이 적당히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미국과 남측의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 등에서 활동하는 우익학자들과 우익선동가들은 미국군사고문단이 가공처리한 개전전황보고에 의거하여 6.25전쟁 개전상황을 왜곡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한 오늘 그 전쟁의 개전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검토하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진 1>
2. 믿을 수 없는 개전전황보고
1950년 6월 25일에 펼쳐진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 6월 25일 당시 서울 신당동 자택에 있었던 그는 38도선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알려주는 전화를 당일 오전 7시경에 받았다고 한다. 누가 백선엽에게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 하는 문제는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백선엽은 누가 자기에게 그런 정보를 전해주었는지 밝히지 않았다.
백선엽은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자신이 겪었던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회고록에 서술했다.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은 백선엽이 서울 용산에 있는 한국군 육군본부에 가려고 자기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7시 10분경이었다. 백선엽이 육군본부 청사 2층에 있는 육군참모총장실로 올라갔더니 육군참모총장 채병덕과 장교 7~8명이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방안에서 서성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군 지휘부가 38도선 무력충돌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모든 군사정보를 미국군사고문단이 독점통제하고 있었으므로, 한국군 지휘부는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군사정보를 제공받기 전에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까막눈 신세였다.
전선으로 급히 돌아가라는 채병덕의 호통을 듣고 밖으로 나온 백선엽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이드 로크웰부터 찾았다. 왜냐하면 백선엽은 사단장이라는 군직만 가지고 있었고, 사단을 지휘통제하는 진짜 지휘관은 로크웰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로크웰은 한국군 육군본부 인근에 있는 미국군사고문단 사택에서 아직 잠을 자고 있었다. 백선엽이 로크웰의 집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더니, 잠에서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그는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백선엽과 로크웰이 군용차를 타고 서울 서대문구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경이었다.
위와 같은 정황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까지 미국군사고문단은 군사고문들에게 개전상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고, 개전상황에 대처할 긴급명령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로크웰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으로서 개성-문산-파주-고양-서울로 이어지는 제1축선에서 전략임무를 수행하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을 지휘통제하였는데, 그처럼 중요한 군직에 있는 그가 당일 오전 9시까지 개전상황을 몰랐으므로, 미국군사고문단도 개전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군사고문단은 한국군 사단, 여단, 연대마다 군사고문을 10명씩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휘통제했는데,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의 작전고문은 미국 육군 대위 조섭 대리고였다. 서울 서대문구 수색을 떠난 백선엽과 로크웰이 경기도 파주군 파주국민학교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전방지휘소에 도착한 때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경이었다. 백선엽은 회고록에서 자신과 로크웰이 오전 9시경에 수색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사령부에 도착했고, 오전 9시 30분경 파주에 있는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정부지휘소에 도착했다고 썼지만, 오전 9시경 수색에 있는 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잠시 머문 뒤에 그곳을 출발하여 오전 9시 30경에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오전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파주에 있는 사단 전방지휘부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과 로크웰은 개성쪽에서 포성이 들리고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한국군 제1보병사단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임진강 철교 남단까지 나가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신발조차 신지 못한 맨발로 자기 군용차를 몰고 “뭔가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허겁지겁 패주해왔다. 황망히 패주하다가 임진강 철교 남단에서 뜻밖에 로크웰 일행과 마주친 대리고는 “숨이 넘어갈 듯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면서 “큰일났다. 적들이 이미 기차로 개성역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포성이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백선엽과 로크웰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육군 준장)의 첫 명령이 작전현장에 하달되었다.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윌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미국군사고문들에게 “모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철수명령을 받은 로크웰은 백선엽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발길을 돌렸는데,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는 로크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진 백선엽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위에 서술한 정황을 보면, 미국군사고문단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한국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전황보고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인민군이 공격을 개시했다는 공격주체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고, 오전 4시에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시각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으며,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공격범위에 관한 보고도 믿을 수 없다. <사진 2>
3.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의 정보보고서
1950년 6월 25일 개전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서술한 전황보고는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는 조선인민군 포병부대가 38도선 남쪽으로 포사격을 개시한 시각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40분이었고, 그로부터 약 20분 동안 포사격이 계속되다가 오전 5시경부터 조선인민군 보병부대가 38도선을 넘어 한국군을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역사자료를 조사한 한국군사연구소 소속 연구원은 미국 원동군사령부 군사정보단이 1952년 7월에 작성한 정보보고서에서 6.25전쟁 개전상황에 관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들을 더 알아냈다.
1) 오전 6시경 서울의 미국군사고문단은 일본 도꾜의 원동군사령부에게 무선통신을 통해 38도선 전황을 처음 보고했다. (당시 미국군사고문단은 38도선 전투현장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전황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첫 전황보고는 38도선 개전상황에 관한 정확한 보고가 아니었고,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정도의 간략한 보고였다.)
2) 오전 7시경 미국군사고문단 참모회의가 소집되었다. 참모회의에서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 한국군과 무력충돌을 벌인 것으로 판단했다.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는 미국군사고문단의 최초 판단은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조선인민군이 38도선 전역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황보고로 둔갑했다.)
3) 오전 9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황해남도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연대로부터 옹진이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옹진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미국군사고문단 최고지휘관 월리엄 로벗츠는 최전방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파견된 군사고문들의 신변위험을 직감하고, 그들에게 전원 철수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로크웰도 로벗츠의 철수명령을 받았는데, 그 때는 오전 10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4) 오전 10시경 미국군사고문단은 서울에 주재하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존 무쵸에게 38도선 전황을 통보했다.
미국군사고문단으로부터 38도선 전황을 통보받은 무쵸는 미국 육군성에 긴급히 전문을 보냈는데, 그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전략) 오전 4시경 옹진에서 북조선군의 포사격으로 행동이 개시되었다. 오전 6시경 북조선 보병부대가 옹진지구, 개성지구, 춘천지구에서 38도선을 넘어오기 시작했고, 동해안 강릉 남쪽에서 (조선인민군의) 해안상륙이 있었다는 보고도 있다. (중략) 공격의 성격과 방식을 보면, 전면적인 공격으로 보인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오전 7시경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수색정찰을 하던 중에 우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났다고 판단했는데, 그로부터 약 3시간 뒤에 그들은 조선인민군이 전면공격으로 보이는 공격을 개시했다는 전혀 다른 전황보고를 무초에게 통보한 것이다.
무초의 전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옹진지구에서 시작된 무력충돌이 시차를 두고 개성지구와 춘천지구로 차츰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6.25전쟁 개전상황을 파악하려면,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군사고문단은 당일 새벽 옹진지구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옹진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7독립보병여단 미국군사고문들은 1950년 6월 25일 당시 옹진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다. 백선엽이 회고록에 서술한 것처럼, 한국군 제1보병사단 수석고문 로크웰도 1950년 6월 25일 당시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었다.
미국군사고문들은 왜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6월 25일 아침 서울에 모여 있었을까? 한국군 최전방부대들에 배치된 미국군사고문들은 주말마다 최전방을 떠나 서울에 가서 휴일을 즐겼다. 토요일이었던 1950년 6월 24일 밤 서울에서는 한국군 장교구락부 개설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미국군사고문들은 그 연회에서 술과 춤을 마음껏 즐기다가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6월 25일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1997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된 자신의 책 ‘코리아의 양지바른 곳(Korea's Place in the Sun)’에서 개전당일 38도선 최전방에 미국군사고문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개성지구에 주둔한 한국군 제1보병사단 제12연대에 작전고문 조섭 대리고가 1950년 6월 25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다. 그가 왜 서울에 가지 주말을 즐기지 않고, 개성에 남아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개전당일 최전방에 남아있었던 유일한 미국군사고문이었다. 그렇지만 개전당일 개성에 있었던 대리고는 옹진에서 무력충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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