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5광복 특집 3. - 위인과 민족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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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8-12 10:03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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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장군
- 8.15광복 특집 3. - 위인과 민족해방
유럽지역 선군연구소
인류사에는 사멸의 위기에 처했던 민족을 구원한 위인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력사에 기록된 수많은 민족적 영웅들의 공적과 헌신을 다 합쳐도 비기지 못할 위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 김일성 주석께서 벌리신 항일혈전사, 조선민족해방 투쟁사 이다.
항일대전을 승리에로 이끌어 조선민족해방위업을 이룩한 김일성 주석의 업적은 국가적 후방이나 정규군의 지원도 전혀 없는 가장 엄혹한 조건에서 강대한 적과 정면으로 맞서 장기간의 유격전쟁으로 나라를 해방 시킨 것 으로 하여 더욱 주목을 끈다.
그이가 조직 령도한 항일혁명투쟁에 대해서는 그 간고성과 희생성, 영도의 현명성을 이루다 표현하기 어렵다.
당시 해외팽창의 길로 내닫던 세계적인 신흥군사강국이였던 일본을 상대로 대담하게 전면전쟁을 선포하고 식민지약소국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는 무장투쟁로선을 제시한 김일성 주석이야 말로 동서고금에 없는 천하제일장군이였다.
일본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광신적인 황도정신을 타승하고 명치유신후 수십년동안 일본이 축적해놓은 모든 인적, 물적력량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식민지민족해방투쟁에 관한 옳은 이론이나 경험도 없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유격전을 기본으로 하는 무장투쟁로선을 선택한것은 천출위인이 아니고서는 생각할수 없는 것이 였다.
그때까지 정규전은 무장투쟁의 기본형식으로, 유격전은 일시적이며 보조적인 수단으로 공식화 되여 있었다. 더우기 세계전쟁사에는 국가도 후방도 정규군의 지원도 없이 유격전으로 강대한 정예무력을 쳐부셨다는 실례도 없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주체적 립장에서 조선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상비적인 혁명무력에 의한 유격전을 기본전투형식으로 하는 항일무장투쟁을 조직할데 대한 창조적인 노선을 내놓았다. 그에 따라 1932년 4월 25일 조선민족의 첫 혁명적무장력인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일제를 격멸하며 민족해방위업을 성취하기 위한 항일대전을 전면적으로 벌리였다.
주석은 무장투쟁초기부터 대원들을 백절불굴의 투사들로 키웠으며 자기식의 전략전술적우월성, 전민단결과 항쟁으로 일제를 격멸소탕하였다. 유인매복전과 기습소탕전, 동성서격전술, 일행천리전술, 망원전술, 선회전술 등 다양한 유격전법과 전술들을 창조, 적용하고 고기가 물을 떠나 살수 없는것처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 살수 없다는것을 유격대의 생존방식과 활동원칙으로 삼도록 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현명한 령도가 있었기에 항일유격대는 그토록 간고한 조건에서도 장기간 투쟁을 벌려 포악한 일제를 타승하고 마침내 조국해방이라는 역사적위업을 실현할수 있었다.
조선의 해방과 독립은 일제에게 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하던 조선민족을 재생시킨 력사적사변이며 동방에서 처음으로 되는 식민지민족해방운동의 승리였다.
역사에는 민족해방을 위해 유격전을 벌린 실례들이 적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빨찌산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나라가 침략자들에게 강점된것이 1941년이라고 볼 때 그 나라의 빨찌산 역사는 기껏해서 5년밖에 안되였다. 게다가 이전 쏘련으로 부터 보총과 기관총, 대포와 땅크까지 지원을 받으면서 싸웠었다.
이것을 놓고볼 때 주석께서 15성상 가장 어렵고 간고한 조건에서 벌린 무장투쟁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격렬한 싸움이였다.
조선민족이 그이를 절세의 애국자, 불세출의 전설적 영웅으로 길이 칭송하며 우러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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