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277-2] 조용한 군사회담에서 펠트먼 평양방문까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15 20:29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 ⓒ 자주시보
4. 55년 만에 되살아난 우탄트의 기억
5. 구떼헤스의 중재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4. 55년 만에 되살아난 우탄트의 기억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조선이 화성-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성공으로 자기의 핵무력을 완성한 2017년 11월 29일 미국 워싱턴에서는 미국-중국 합참대화기구 제1차 회담이 진행되었는데, 그 회담에서 조미핵대결 해법을 찾기 위해 쿠바미사일위기 사례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중재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쿠바미사일위기→우발사태→핵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 속에서 중재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유엔사무국이었다. 55년 전 유엔사무국의 중재경험은 아래와 같다.
쿠바미사일위기가 격화되면서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위험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1962년 10월 26일 당시 유엔사무총장이었던 우탄트(U Thant)는 미국, 소련, 쿠바 3국 사이에서 적극적인 중재노력을 펼치겠다는 의사를 공식 발표하였다. 우탄트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면, 그에 상응하여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중재안, 다시 말하면 소련의 핵무력 철수와 미국의 쿠바 불가침을 맞바꾸는 중재안을 미국과 소련에게 각각 제시하였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60년 11월 20일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펼치던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이 유엔본부 청사에서 양측 대표들과 회담을 마치고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서 우탄트의 왼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미국측 회담대표들이고, 그의 오른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소련측 회담대표들이다. 이 사진을 보면,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만 중재노력을 펼친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미국, 소련, 쿠바 3자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펼치면서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니끼따 후르쇼브(Nikita S. Khrushchev)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우탄트의 중재안을 받아들이면서 소련이 미국과 협상하는 동안에는 소련군 미사일을 실은 수송선을 쿠바에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요즈음 쓰이는 말로 표현하면, 핵동결을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1962년 10월 27일 쿠바혁명군은 자국 영공을 침범하여 공중정찰을 감행하던 미국군 고고도정찰기 U-2를 S-75 지대공미사일로 격추하였다. 쿠바미사일위기가 최고조로 치닫고 있던 시점이었으므로, 미국은 그 사건으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오늘도 미국은 오산공군기지에서 U-2를 매일같이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출동시켜 조선에 대한 공중정찰을 감행하고 있고, 조선인민군은 S-75를 개량한 번개-1 지대공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 U-2가 군사분계선 상공을 조금이라도 넘어서기만 하면 격추해버릴 즉시발사태세를 갖추고 있다.
55년 전, 미국 군부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실행위원회는 쿠바혁명군의 U-2 격추에 대한 보복으로 쿠바무력침공을 주장하였다. 백악관과 펜타곤은 무력침공을 떠벌였으나, 존 케네디(John F. Kennedy) 당시 대통령은 남다르게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각료들과 군부의 무력침공주장에 맞장구를 치지 않았던 까닭은,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소련과의 핵전쟁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흥미로는 사실은, 케네디가 후르쇼브도 자기처럼 겁쟁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그래서 케네디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면, 소련이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 전쟁은 곧 핵전쟁으로 될 것으로 우려하면서 공포를 느꼈다. 바로 이것이 케네디가 쿠바무력침공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던 원인이다. 하지만 케네디만큼 겁쟁이였던 후르쇼브에게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는 경우, 미국과 핵전쟁을 벌여서라도 쿠바를 끝까지 지켜주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케네디가 쿠바침공을 명령하였더라면, 미국군은 군사력이 약한 쿠바를 점령했을 것이다. 이처럼 쿠바를 점령할 기회를 놓쳐버린 겁쟁이 케네디는 쿠바침공에 광분하던 전쟁광신자들의 저격으로 암살당하였으니, 그 때가 쿠바미사일위기로부터 1년이 지난 1963년 11월 22일이었다.
겁쟁이 케네디가 쿠바무력침공을 결정하지 못하면서 마음속으로 기대를 걸었던 것은 우탄트의 중재노력이었다. 그래서 케네디는 소련이 국제사찰단 감시 하에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면, 그에 상응하여 쿠바에 대한 불가침을 보장하고, 터키에 전진배치한 미국군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우탄트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터키는 자국 영토에 배치된 미국군 미사일들이 철수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케네디는 그것을 철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1962년 10월 28일 후르쇼브 서기장은 케네디 대통령이 제시한 협상조건을 받아들였고, 그 사실을 피델 알레한드로 까스뜨로 루쓰(Fidel Alejandro Castro Ruz) 쿠바공화국 수상(당시 직책)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까스뜨로는 자기와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케네디와 타협하여 쿠바에서 핵무력을 철수하려는 후르쇼브의 비겁하고 굴욕적인 처사에 격노하였다.
위기상황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자, 우탄트 유엔사무총장이 다시 중재에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쿠바를 방문하여 까스뜨로 수상과 회담하였다. 그 자리에서 우탄트는 격추당한 미국군 정찰기 U-2 조종사의 시신을 미국에 반환해줄 것과 국제사찰단이 쿠바에 입국하여 소련군 미사일 철수과정을 감시할 수 있게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국제사찰단 입국을 쿠바의 주권침해로 본 피델 까스뜨로 수상은 국제사찰단 입국을 거부하였고, 미국군 정찰기 조종사의 시신만 반환하였다. <사진 6>
▲ <사진 6> 1962년 10월 28일 피델 까스뜨로 쿠바 수상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타협하여 쿠바에서 핵무력을 철수하려는 후르쇼브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비겁하고 굴욕적인 처사에 격노하였고, 후르쇼브-케네디 비밀협상을 전면 거부하였다. 까스뜨로 수상은 쿠바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5개항을 발표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미국과 끝까지 싸울 결의를 표명하였다. 위쪽 사진은 쿠바미사일위기 당시 까스뜨로 수상이 반미결사항전에 나선 쿠바혁명군 고사포부대를 시찰하는 장면이고, 아래쪽 사진은 쿠바혁명의 영원한 지도자들인 피델 까스뜨로와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가 담화하는 장면이다. 체 게바라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그의 혁명생애만큼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우탄트의 중재안을 거부한 피델 까스뜨로는 쿠바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5개항을 발표하고, 이를 관철하기 위해 미국과 끝까지 싸울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반미결사항전을 결의해 나선 쿠바혁명군과 쿠바인민은 전투동원태세에 진입하였다. 그가 제시한 평화안은 미국은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와 경제제재를 중단할 것, 미국은 쿠바 정부에 대한 전복활동, 무력침공, 침투공작을 중단할 것, 미국은 쿠바 선박에 대한 해적행위를 중단할 것, 미국은 쿠바 영공 및 영해에서 모든 불법행동을 중단할 것, 미국군은 쿠바의 관따나모 해군기지에서 철수할 것 등이었다.
겁쟁이 케네디와 비겁한 후르쇼브는 비밀협상으로 쿠바미사일위기를 해결하였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들의 비밀협상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결의한 쿠바는 케네디-후르쇼브의 해법을 걷어차 버렸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발생한 쿠바미사일위기가 케네디-후르쇼브 비밀협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미국과 쿠바 사이에서 발생한 쿠바미사일위기는 종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쿠바미사일위기가 1962년 10월 28일에 종식되었다는 주장은 쿠바를 제외시킨 미국과 소련의 편중된 시각으로 쿠바미사일위기를 바라본 반쪽짜리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1962년 11월 2일 후르쇼브는 아나스따스 미꼬얀(Anastas I. Mikoyan) 소련 제1부수상을 쿠바에 급파하여 국제사찰단을 받아들이라고 피델 까스뜨로 수상을 여러 날 동안 설득해보았으나, 까스뜨로 수상은 그런 굴욕적인 요구를 거부하면서 쿠바의 주권과 자존심을 지켰다. 그렇게 되자 미국이 조작해놓은 국제사찰단은 미국 공군 해상정찰기의 공중지원을 받는 가운데 미국 해군 군함을 타고 쿠바 영해로 접근하여 쿠바 영해 밖에서 대기 중이던 소련 수송선들에 승선하여 사찰놀음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5. 구떼헤스의 중재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
위에 서술한 쿠바미사일위기 해결경험을 보면, 유엔사무국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발생한 위기를 해소하는 데서 중재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미국과 쿠바 사이에서 발생한 위기를 해소하는 데서는 중재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은 군사력이 약한 쿠바를 얕잡아보고 국제사찰단을 들이밀려는 주권침해의도를 버리지 않았고, 쿠바는 반미결사항전을 결의하고 자기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투쟁정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유엔사무국의 중재노력도 허사로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돌이켜보면서, 조미핵대결과 쿠바미사일위기를 굳이 비교한다면, 조미핵대결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타협가능한 대결보다는 미국과 쿠바 사이의 비타협적인 대결에 더 가깝다. 조선은 전략적 핵압박공세로 주한미국군을 철수시켜 자주권을 지키려고 하고, 미국은 조선의 전략적 핵압박공세를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주한미국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버티기 때문에 조미핵대결은 비타협적인 대결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타협적인 대결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고, 수세에 몰려 얻어맞는 쪽이 공세를 펴며 들이치는 쪽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멀지 않아 종식될 것이다.
그런데 미국 언론매체들이 보도한 내용만 읽어보면, 이번에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을 조선에 파견한 중재시도가 백악관과의 사전조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유엔사무국이 백악관에게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추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미국의소리> 2017년 12월 5일 보도에 따르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의 조선방문은 유엔사무국이 미국 정부와 협의를 거쳐 추진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진 7>
▲ <사진 7> 이 사진은 2017년 1월 1일 안또니오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2017년을 평화의 해로 만들자고 전 세계에 호소하는 장면이다. 지금 그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노력을 펼치려고 하지만,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타협적인 핵대결이 유엔사무국의 중재로 과연 종식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유엔사무국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떠맡을 중재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체면을 고려하여 미국의 굴복을 굴복이 아닌 타협처럼 포장해주는 중재역할로 될 것이다. © 자주시보, 한호석 소장
2017년 12월 5일 헤더 노어트(Heather A. Nauert)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언론설명회에서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이 조선에 갈 때 미국 정부의 어떤 메시지도 지참하지 않았고, 미국 정부를 대표하여 조선을 방문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하나마나한 소리다. 왜냐하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은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중재를 시도하기 위해 조선에 보낸 유엔사무국의 외교사절이므로, 처음부터 미국의 의사를 조선에 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이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을 조선에 파견한 것은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려는 노력이므로 펠트먼 유엔사무차장이 유엔사무국으로 돌아가면 구떼헤스 유엔사무총장은 그를 통해 전달받은 조선의 의견을 백악관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타협적인 핵대결이 유엔사무국의 중재로 과연 종식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론 유엔사무국이 중재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조미핵대결 최종국면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예견할 수 있다. 유엔사무국이 조선과 미국 사이에서 떠맡을 중재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아메리카제국의 체면을 고려하여 미국의 굴복을 굴복이 아닌 타협처럼 포장해주는 중재역할로 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