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베를린 강연회 이낙연 측근이 수박그림이 새겨진 현수막을 파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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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6-13 16:0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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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반도 평화를 모색하자
23년 전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은 이 대학에서 베를린선언을 발표했고, 그 3개월 후에 한반도 분단 이후 최
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제가 그 역사적 장소에 있다는 것은 저에게 엄청난 영광입니다. 저에게 오늘 강연의 기회를 주신 베를린자유대학에 먼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모두 에게 감사드립니다. 올해로 대한제국과 독일제국이 수교한지 140년이 됐습
니다. 수교 이후 두 나라는 역사의 격류를 헤엄치며 많은 변화를 겼었습니다. 독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함께 분단을 당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1990년에 다시 평화적으로 통일하고 유럽통합을 이끌며 세계의 지도국가의 하나로
발전했습니다. 한반도는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1945년 종전과 함께 분단돼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부터
3년 동안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 전쟁을 종결하지 못한채 휴전으로 남아있습니다. 한반도에는 구냉전에 이어 다시 신냉전의 유령이 엄습하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미소 대결의 최전방에서 미중 대립의 최전선으로 바뀌고있습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독일은 2차 대전 이후여러 분야에서 협력하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독일은 한국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첫째, 독일은 한국의 산업화를 도왔습니다. 서독은 패전과 분단을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었습니다. 남한도 전쟁이 남긴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한강의 기적’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도 공헌했습니다. 광부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사는 1960년부터 1976년까지 1만1천57명이 독일에 파견됐습니다. 그들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1억 달러 이상을 고국에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1965~1967년의 송금액은 그 기간 한국 수출액의 1.6~1.9%에 해당했습니다. ‘한강의 기적’ 초기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땀과 눈물이 그만큼 기여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독일의 경제발전에도 공헌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총리는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독일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습니다.
1964년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해 1억 달러가 넘는 차관을 지원받았습니다. 1967년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해 양국을 “다시 통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숙명적인 정치적 동반자”라고 규정하고, 몇 가지 지원사업을 확정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한국 최초의 낙농목장이 1969년에 문을 열어 한국인에게 국산우유를 공급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목장을 ‘한독목장’으로 부르며, 독일의 우정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둘째, 독일은 한국의 민주화를 도왔습니다. 1980년 나의 고향 광주에서 민주화를 위한 시민의 항쟁을 군부가 처참하게 짓밟았을 때, 독일의 용기 있는 언론인이 그 진상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독일 제1 공영방송 ARD-NDR 소속 도쿄 카메라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였습니다.
힌츠페터의 당시 활동을 다룬 영화 ‘택시 운전사'는 한국에서 1천만 명 이상이 눈물로 관람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내가 죽으면 광주에 묻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뜻에 따라, 그는 유품과 함께 민주화 항쟁의 희생자들이 묻힌 광주 망월동 묘역에 2016년 안 치됐습니다. 힌츠페터 기자를 통해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등이 광주를 위해 국제연대에 나섰고, 당시 감금돼 있던 김대중의 석방을 위한 세계적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그후 한국은 민주화를 쟁취하고, 김대중은 대통령에 취임해 새 역사를 썼습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김대중은 ‘햇볕정책’으로 발전시켜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습니다. 브란트와 김대중은 1971년과 2000년에 각각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셋째, 독일은 한국의 분단과 통일로 가는 길을 돕고 있습니다. 독일이 패전과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 역사적 쾌거는 한국에 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한국의 민주당 출신 대통령 세 사람이 모두 독일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구상을 밝히며, 남북정상회담의 출구를 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화해협력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베를린 선언’으로 불리었습니다. 3개월후인 그해 6월,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 4월 베를린 등의 한국 교민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평화와 통일에 관한 생각을 밝혔습니다. 그 후 2007년 10월 노무현-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 베를린의 구시청에서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을 통해 ‘신 한반도 평화비전’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신 베를린 선언’으로 불리었습니다. 그것을 북한이 받아들여 2018년 4월과 9월 사이에 판문점과 평양에서 문재인-김정은의 남북정상회담이 세차례나 열렸습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역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도 2018년 6월 싱가포르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잇달아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탁월한 독일 언론인 테오 좀머가 지적했듯이, 독일과 달리 남북한의 관계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독일과 한국, 나아가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에 큰 차이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한국과 독일은 정책계승에서 달랐습니다. 서독에서는
사민당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을 기민당 헬무트 콜 총리가 이어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주당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을 보수정부들이 뒤집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정부간 교류뿐만 아니라 넓고 긴밀한 민간교류가 오랜 기간 이어져 동서독 주민 사이의 상호이해
를 증진하고 동질감을 유지하는데 기여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남북 교류가 상당 부분 정부 주도로 이루어져
남북한 주민들이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는데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것마저도 남북한 내부의 정치적 변화와 북미 관계의 부침에 따라 단절되곤 했습니다.
대북정책은 한국 정치에서 가장 양극화된 분야입니다. 그것은 남북한이 1950년부터 3년 동안 치렀던 참혹한 전쟁의 잔재입니다. 그에 비해 동서독은 서로를 향해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역사적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했다. 통일 전의 독일과 달리, 남북한은 서로를 안보위협으로 보아 왔습니다. 그런 배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북정책이 일관되게 계속되도록 하는 일은 한국의 큰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는 한국의 정치인들에게 독일의 경우를 배우자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특히 반대정당의 정책을 받아들이고 국가를 통일의 길에 올려놓은 콜 같은 정치가가 한국의보수정당에서도 나오기를 바랍니다.
유럽과 아시아는 역사청산에서 달랐습니다. 전범국이자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가해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사과하고, 전범을 엄격하게 처벌해 주변국들의 신뢰를 확보했습니다. 특히 1970년 비 오는 날에 폴란드 바르샤바유태인 학살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은
유럽의 피해국뿐만 아니라 세계인류에게 깊은 감동남겼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전범국이자 패전국이었습니다. 일본은 사과했으나 지속적이지 않았고,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를 각료들까지 참배해왔습니다. 나는 일본정치인 가운데 브란트 같은 지도자가 나와 노벨평화상
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서는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독일이분단됐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배 피해자 한반도가 한민족의 의사가 아니라 강대국들의 계산에 따라 분단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련 강대국들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도울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990년 독일 통일과 1991년 소련 해체에 따른 냉전 종결은 한반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한은 냉전의 굴레를 벗고 외교지평을 넓히며 경제성장으로 질주했습니다. 북한은 고립 속에서 핵무장으로 폭주했습니다. 남북한은 비슷한 속도로,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1990년대 초 남한은 소련, 중국과 동유럽, 중앙아시아등 30여개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하며 수출을 늘리고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반대로 북한은 미국, 일본과의 수교에 실패했고, 냉전시대의 동맹과 경제협력 파트너 들을 잃었습니다. 미국은 냉전을 종결시켰고, 한국은 탈 냉전의 혜택을 누렸으나,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해 냉전의 사고와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그런 전개를 체제위기로 받아들인 북한은 1993년 NPT 탈퇴를 선언하며 핵무장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1차 북한핵 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94년에 남한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했습니다. 2006년에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그것을 전후한 기간이 2차 북한핵 위기입니다. 그 해에 남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북한은 6차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를 성공시킨 뒤에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고, 남한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2차 핵 위기 이후에는 사람들이 북한핵 위기에 숫자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북한핵 위기가 끝났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북한 핵이 기정사실로, 북한핵 위기가 상시적인 것으로 됐음을 시사합니다.
핵무력 완성’ 이후에도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 면서 도발을 계속했습니다. 2022년만 해도 북한은 ICBM을 포함한 탄도미사일을 69회나 발사했습니다. 1차 북한핵 위기 이후 3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은 미국이 주도했습니다. 협상은 지속적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몇 차례 합의를 이루었으나, 그 합의들은 모두 이행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독일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1년 동안 머물며 한반도 평화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나는 미국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 실패한 이유를 다섯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첫째, 미국은 북한 체제의 생존욕구를 무시했습니다.
둘째, 미국은 북한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곧 붕괴할 것이라고 오판했습니다. 셋째,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등 압박의 효과를 과신했습니다.
넷째, 미국은 정권에 따라 북한정책이 오락가락하며 일관성을 잃었습니다.
다섯째, 미국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루려하다가 그것이 안 되면 협상을 깨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or Nothing)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미국은 북한핵 문제에 대해 사실상 손을 놓고 있습니다. 취임 후 2년여 동안 조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스무 번이나 말했습니다.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겠다고 몇 차례 재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아무런 실질적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북한과 미국이 평화조약 체결 및 관계정상화와 북한 비핵화를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안합니다.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선제적으로 결단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합니다. 나는 미국이 북한과 수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한이 중국, 소련과 수교했던 1990년대 초에 북한의 요구대로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했더라면, 오늘의 북한핵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북한과 미국이 이룬 가장 최근의 합의이자, 유일한 정상간 합의는 2018년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싱가포르 합의였습니다.
그 골자도 북한과 미국의 새로운 관계 수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한 비핵화의 교환이었습니다. 지금 남북한은 국제질서의 회오리에 또 다시 휩쓸려가려 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는 북한-중국-러시아와 남한-미국-일본의 연대가 다시 대치하고 있습니다. 남북한은 그 구도에 매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남북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화의 통로를 열어놓고 긴장의 고조와 우발적 사태의 발생을 막아야 합니다. 나는남북한의 책임자들에게 특별히 호소하고 싶습니다. 한반도는 더 이상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미중 경쟁이 신냉전으로 진행하지 않기를 바랍니
다.
세계를 다시 진영으로 나누고, 외교 안보와 경제도진영 중심으로 전개하는 시대가 다시 오지 않아야 합니다. 세계가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신장하면서, 경제적으로 윈-윈의 관계를 발전시켜 가기를 나는 소망합니다. 나는 그것을 미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특별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바람직한 세계질서가 확립되도록 독일과 한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들이 지혜와 힘을 모아 함께 노력할 것을 제안합니다. 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고,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타국에 대한 어떠 침략도 지구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나는 갈망합니다.
나는 독일이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민주주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지원하는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도 비살상 장비를 포함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북한과의 대치로 안보에 극히 민감하기 때문에, 군사적 지원에는 일정한 제약을 안고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은 가장 성공적인 협력관계를 지속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양국이 협력관계를 발전시키면서, 특히 경제안보와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해 가기를 나는 기대합니다. 동시에 세계경제 불확실성, 공급망 위기, 기후 변화 같은 지구적 과제에 대해서
도 긴밀히 공조해 가기를 나는 바랍니다. 끝으로 나는 독일이 더 강력한 국제적 리더십을 발휘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독일이 미중 경쟁과 러시아의공격적 태도에 더 많은 지혜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랍니다. 독일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더 많이 지원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 흥 노 재미동포 자주시보 6월 10일 서울
이낙연 전 총리가 1년간 워싱턴 연수 생활을 끝내고 지난 6월 4일 워싱턴을 떠나 독일을 거쳐 6월 24일 귀국하게 된다. 그는 조지 워싱턴 대학 연수 중 동포들과의 대화도 여러 번 했고 강연회도 열었다. 또, 『대한민국 생존전략 - 이낙연의 구상』(21세기북스, 2023)이라는 제목의 책도 내고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이 전 총리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두는 이유는 남다른 경력과 영향력을 가진 그가 위기에 직면한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데 앞장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설, 동포들과의 대화, 그리고 자신의 저서를 통해 대한민국은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안보 등이 총체적 문제라고 지적하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해내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5월 말, 귀국을 앞둔 이 전 총리는 출판기념회에서 동포들에게 위기의 대한민국이 “미·중 대립의 신냉전에 한민족이 최전선에 선 형국”이라면서 “한미 공조를 강화해도 중국과는 건설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북한과도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대북한 및 민족통일에 대한 그의 발언은 동포들로부터 좋은 점수를 받았을 뿐 아니라 많이들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도 가고 북녘 동포들을 도우며 평화통일에 도움을 줘야 한다”라는 발언에 이르자 동포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진지하게 경청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외교가 너무 약하다면서 “동맹국 미국에 할 말은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 “동포들이 한반도의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되어달라”라고 주문했다. 대통령이 돼 “미 대통령을 만나면 한국의 역할을 인정해달라고 말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뭔가 딱 부러지게 정곡을 찌르면서 한국 외교가 약하다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진짜로 약한 건 이 전 총리 자신인 것 같다. 한국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한 건 맞지만 적어도 왜 위기를 맞이했고 위기의 책임자가 누군가라는 것은 딱 부러지게 지적하고 비판했어야 옳았다. 양다리를 걸치고 눈치나 살피며 기회를 엿보는 회색분자의 구태의연한 잔꾀를 버리지 못한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퍼주기만 하는 한국 외교의 참상을 겨우 ‘외교가 약하다’, ‘우방인 미국에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목소리로는 너무 나약하다.
대통령이 되면 미국에 한국의 역할을 인정해달라고 하겠다는 이 전 총리의 말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것은 의연한 자주적 자세가 아니라 예속적 노예근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여 입맛이 쓰다. 민족의 이익이 걸려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면 그냥 밀어붙이겠다는 배짱을 가져야지, 누구의 인정이나 허가를 구걸하려는 자세는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에 가깝다고 보여서다. 그는 “미국에 올 때는 착잡한 상태로 깊은 물 속에 가라앉는 듯했다”라고 실토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자업자득’이라는 걸 모르는 게 문제다.
하지만 정권을 뺏기고, 특히 남북 합의 선언을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을 깊이 통감하고 국민에게 먼저 엎드려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양심 있는 정치가의 자세다. 위에서 지적한 2개의 큰 실책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중차대한 사건이다. 이와 이 전 총리가 직·간접적으로 연동돼 있어서 절대로 자신과 무관하다는 태도를 고수해선 안 된다. 그는 이미 대선 경선에서 ‘대장동 사건’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아주 저질의 선거운동을 해서 국민의 빈축을 산 바가 있다.
결국 자신도 패배하고 정권 연장 실패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로 그 화근이 오늘까지도 연장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발목을 잡는 동시에 민주당 분열의 씨앗이 되고 있다.
그의 재미동포들과의 작별 인사말은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재미동포들이 긴장 완화에 앞장서고 남북을 오가며 평화통일에 적극 기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게 응축된 통일 절규를 동포들에게 한 정치가는 없었기에 더욱 그의 당부가 값지다고 여겨진다.
재미동포들에게 호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절박한 것은 자신이 귀국과 동시에 통일의 충직한 전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어야 옳다.
2018년 역사적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 북미공동선언으로 온 겨레는 행복에 겨워 두둥실 춤을 췄고 지구촌은 축하의 인사를 보냈다. 한반도 평화 번영의 꿈이 현실로 펼쳐지는 이 기막힌 절호의 시점에서 이 전 총리는 어떤 역할을 했으며 태도를 취했을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남·북·미 3자 간 화해의 미소가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대북 제재와 전혀 무관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를 성사하지 못한 건 누구의 책임일까? 이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합리화될 수가 없다. 이 전 총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판문점선언, 평양공동선언의 전면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라도 이행됐다면 정권을 뺏겼을 리가 없고 전쟁 위기란 있을 수도 없었을 게 아닌가. 솔직하게 말해 숨을 죽이고 미국 눈치만 보느라 교류 협력이라는 말조차 못 한 무능한 정권의 이인자가 이낙연 전 총리가 아닌가. 전쟁을 못 해 미치고 환장하는 호전광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정권을 갖다 바치고 말았으니 땅을 치고 통탄할 노릇이다. 그러니 이 전 총리가 시커먼 전쟁의 먹구름이 한반도로 몰아치는 데 일조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전 총리가 워싱턴에서 한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민족문제나 국제정세에 대한 시각이 생산적, 건설적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여 기대가 된다. 조만간 귀국하게 되면 이 전 총리는 과거를 거울삼아 다시는 배신의 길을 걷지는 말아야 하고 그럴 것으로 믿어진다. 당연히 이재명 당 대표를 구심점으로 굳세게 일치단결해서 난국을 헤쳐나가는 데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지금 절체절명의 과제는 이번 총선을 매끄럽게 치러내고 성공적인 총선 결과를 도출하는 데 적극 공헌해야 한다. 그 결과는 반드시 인정될 것이고 빛 좋고 맛 좋은 기막힌 열매를 따게 될 것이라는 걸 명심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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