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눨 22일 한일합병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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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8-23 16:35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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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병조약》
《한일합병조약》은 1910년 8월에 일제가 조선강점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날조한 침략적인 《조약》이다.
1905년에 《을사5조약》을 조작하여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이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1910년 8월 22일 군사적위협과 공갈밑에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였다.
이날 일제는 《합병을 위해서는 위력이 필요》하며 《미개한 인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보병보다 오히려 외관상 위엄이 있는 기병이 필요하다.》는 오만무례한 넉두리를 늘어놓으면서 서울에 2천여명의 병력과 3백여필의 군마를 주둔시키고 군함에 의한 《위협시위》도 감행하는 등 계엄상태를 펴놓는 한편 대신들을 협박공갈하여 8개 조항으로 된 이 《조약》을 강압적으로 날조하였다.
일제는 이 강도적인 《조약》에서 조선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천황》에게 넘기며 조선을 일본에 《병합》한다는것을 규정하였다. 일제는 이 《조약》을 조작함으로써 형식상으로 존재하던 조선봉건국가를 완전히 없애버리였다.
놈들은 조선인민의 거세찬 반일투쟁앞에 겁을 먹고 《조약》을 공포하지 못하고있다가 8월 29일에야 이른바 《천황》의 《칙령》으로 공포하였다.
원래 불법적인 《을사5조약》에서 발원하였으며 군사적위협과 공갈밑에 강압적으로 날조된 《한일합병조약》은 철두철미 비법적이며 무효한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 《조약》을 날조한 후 조선에서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우리 인민은 강도적인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렸다.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패망후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을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집단수장시킨 사건이다.
일제는 혹가이도에서 노예로동을 강요당한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고향에 보내준다고 속여 4 730t급 해군수송선 《우끼시마마루》에 타게 한 다음 1945년 8월 22일 일본본토의 최북단 아오모리에 위치한 오미나또군항을 떠나게 하였다.
8월 24일 일제는 부산항을 향하여 가던 배를 갑자기 물을 싣는다는 구실밑에 마이즈루앞바다로 항로를 바꾸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쯤 가다가 기관실이 있는 배밑을 폭파시켰다. 갑판우에 올라와있던 일본놈들은 뽀트를 타고 도망쳐버렸으며 선실안에 있던 조선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갑판우로 올라오려고 무진애를 썼으나 배와 함께 바다물속에 잠기고말았다.
일제는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을 수장하고도 속이 풀리지 않아 살아남은 얼마 안되는 조선사람들을 마이즈루에 있는 어느한 해군숙소에 수용시키고 그곁에 있는 증기탕크를 폭파시켜 학살하는 귀축같은 만행을 또다시 감행하였다.
일제가 감행한 천인공노할 살륙만행은 그 규모와 잔인성에 있어서 세계 그 어느 나라 력사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전대미문의 대학살이였다.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야말로 패망이후에도 조선민족말살에 미쳐날뛴 살인악마들이며 천년숙적이라는것을 똑똑히 고발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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