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서)
3. 왜 러시아가 개입하는가
이번 시위사태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평화유지군이 투입되면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그런데 러시아군이 왜 다른 나라 시위 진압에 투입되는지 의혹의 시선이 많다.
물론 러시아를 주축으로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 6개국으로 구성된 군사안보동맹인 집단안보조약 제4조에 따라 자국의 국가 안보와 주권이 위협받으면 집단안보조약기구에 파병을 요청할 수 있다.
그런데 시위가 발발하고 파병 요청을 하여 러시아군이 투입되고 진압되기까지 불과 10일 밖에 걸리지 않은 전격적인 모습에 다들 놀라고 있다.
러시아 언론은 러시아군의 전격적인 작전에 미국이 당황하였다며 조롱했다.
러시아 언론은 이번 카자흐스탄 사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공공연히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해 1월 10일부터 진행된 미국-러시아 회담, 이후 열릴 나토-러시아 회담을 앞두고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카자흐스탄 사태를 일으켰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미국 백악관은 “미친 주장”이라고 일축했다.
또 러시아의 카자흐스탄 파병을 두고 미국이 반발하자 러시아가 맞대응하는 등 카자흐스탄 사태가 안 그래도 우크라이나 사태로 신경이 곤두선 두 나라의 대립을 더욱 부추긴 모양새가 됐다.
러시아가 카자흐스탄에 발 빠르게 파병한 이유는 이 지역이 러시아 안보에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남서쪽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국가다.
▲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카자흐스탄 ©위키백과 |
미국과 유럽이 동유럽 국가들을 흡수하면서 서쪽에서부터 러시아를 압박하는 가운데 카자흐스탄까지 포섭한다면 러시아 입장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그간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가져가고 있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 대다수를 묶어 독립국가연합(CIS)을 결성하는 데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국가연합 결성을 선언한 알마티 조약을 체결한 장소도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 알마티다.
그래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11월 방한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게 “구소련이 해체되는 혼돈과 격변의 와중에서 ‘독립국가연합’을 출범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셨습니다”라고 치하하기도 하였다.
독립국가연합은 소련 해체 이후에도 독립국들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서방에 흡수되는 것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자르바예프가 이끄는 카자흐스탄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군사적으로도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하다.
일단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은 무려 7,644km에 달하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긴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만약 카자흐스탄이 친미·반러 국가가 된다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할 것이다.
러시아는 드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한 방공망 구축에 오랜 기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다양한 무기를 개발하였다.
그 가운데 영공 방어용 요격기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게 미그-31이다.
실전배치된 전투기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미그-31은 세계 최초로 위상배열레이더를 장착하고 고성능 데이터 링크 기술을 적용해 4대가 1개 편대를 이루면 조기경보기 역할을 할 수 있으며 S-300 같은 요격미사일 체계와 연결할 수도 있다.
거기다 터보제트 엔진보다 연비와 효율을 높인 터보팬 엔진을 장착, 마하 2.35로 초음속 순항비행이 가능하며 최대 속력 마하 2.83까지도 나온다.
일반적인 초음속 전투기들이 애프터버너를 가동하는 동안만 일시적으로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것에 비하면 상당한 성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미그-31을 운용하는 나라는 러시아 외에 카자흐스탄밖에 없다.
물론 카자흐스탄 공군이 운용하지만 러시아 공군과 연계를 맺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러시아 서남부 영공 외곽 방어를 담당하는 주요 수단일 것이다.
이처럼 그간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러시아 안보의 한쪽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카자흐스탄 관계의 불안 요소도 있었다.
일단 카자흐스탄이 경제 발전을 위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본을 대거 유치한 것이다.
일종의 ‘안보는 러시아, 경제는 미국’ 노선인 셈이다.
덕분에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유입된 총 금융자금의 70%인 누적 3천억 달러가 넘는 서방 국가 자금을 유치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경제를 자국에 편입시킨 미국은 안보 영역도 러시아에서 벗어나 미국과 손잡을 것을 요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카자흐스탄에 미군기지를 건설해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사실 카자흐스탄에는 이미 미군 기지가 들어선 적이 있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일시적으로 알마티에 미군기지 사용을 허용했다.
탈레반 정부 붕괴 후 아프가니스탄에 직접 주둔하면서 알마티 기지는 필요가 없어져 미군이 떠나기는 했지만 이번에 시위가 가장 격렬히 진행된 곳이 알마티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당시에도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것에 반발했다.
하지만 당시는 워낙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기세등등할 때였고 러시아가 미국에 비해 열세였기에 막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2020년 미국은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중앙아시아에 미군기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카자흐스탄에 시급히 미군기지를 세워야 했다.
나자르바예프가 공식적으로 미군기지 건설을 부인했고 카자흐스탄 언론도 “미군기지 건설 주장은 헛소문”이라고 해명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요구는 끈질겼고 러시아도 나자르바예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미국은 잘마이 칼릴자드 아프가니스탄 평화 특사를 카자흐스탄에 파견, 토카예프 대통령과 공식 회담을 갖고 미군기지 설치를 재차 압박했다.
이에 발끈한 러시아는 라브로프 외무장관 인터뷰를 통해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회원국 영토에 미군기지를 세우는 문제는 CSTO의 합의가 필요한 사항이며 새로운 미군기지의 출현은 중앙아시아 안보를 해친다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CSTO는 유명무실해진 기구로 치부되었으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부활에 성공한 셈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자국 안보를 위해 카자흐스탄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마침 시위 사태가 터지면서 절호의 기회를 포착, 재빠르고 과감한 작전을 펼친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10일 만에 끝난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각국의 시선은 매우 복잡하다.
정말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미국이 러시아를 압박하기 위해 카자흐스탄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가 오히려 러시아의 적극적인 행보에 본전도 못 건진 꼴이 된 것일까?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크라이나 사태의 결말도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