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주석님은 해외동포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통일애국의 참된 삶을 안겨주신 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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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4-15 16:50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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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 (2)
류경 4월 13일 평양
우리 조국에서 세계를 놀래우는 기적적인 사변들이 련이어 일어나 공화국의 존엄과 위상이 만방에 떨쳐지고있는 격동적인 시기에 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시고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며 우리 해외동포들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탄생 110돐을 뜻깊게 맞이하고있다.
해마다 태양절을 맞이할 때면 지구상 방방곡곡에 흩어져사는 수백만 해외동포들은 망국노의 설음, 이역살이의 천대속에 피눈물을 흘리던 우리 동포들에게 해방과 더불어 위대한 조국을 안겨주시고 한평생 자애로운 사랑의 품에 안아 참된 애국의 길에 내세워주신 어버이주석님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으로 가슴적시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한품에 안아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한없이 넓고 은혜로운 품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은 한평생 이역의 동포들을 잊지 않으시고 친어버이사랑으로 품어주고 내세워주시며 참다운 존엄과 삶을 안겨주신 민족의 태양, 영원한 어버이이시다.
* *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은 세계 방방곡곡에 사는 각계층 해외동포모두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 따뜻이 보살펴주신 자애로운 어버이이시다.
흔히 이국살이는 《삼복더위에도 등이 시리고 마시는 한사발의 물도 절반은 눈물》이라고 한다.
이역살이의 이 피눈물나는 설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였기에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조선민족이라면 그가 누구든, 어디에 살든 재산의 유무,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사랑의 한품에 안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우리 주석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제일먼저 떠오르군 하는 노래가 《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이다.
예로부터 배움에 대한 갈망이 남달리 높아 어려움속에서도 자식공부시켜 남부럽지 않게 내세우려는것이 이 나라 백성들의 간절한 소원이였다.
그래서 재일동포들은 해방후 이역땅에서도 한푼두푼 피같은 돈을 모아 자식들을 위한 민족교육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워낙 교육사업자체가 많은 자금이 드는 일인데다가 일본반동들의 극심한 민족차별정책으로 하여 첫걸음부터 애로와 난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어머니는 멀리서도 자식의 불행을 감촉하는 법이다.
누구나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을 복구하는데만 신경을 쓰던 전후 그 어려운 시기 우리 주석님께서만은 민족교육에 대한 재일동포들의 애타는 소원을 자신의 일로 떠맡아안으시였다.
주체44(1955)년 9월 29일 조국해방 10돐경축 재일조선인축하단 성원들이 위대한 주석님을 만나뵈웠을 때였다.
이날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재일동포들이 이국의 어려운 형편에서도 자녀들을 믿음직한 애국인재로 키우기 위하여 자체로 대학을 내올 준비를 하고있다고 하는데 아주 장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공화국정부는 재일동포들의 민주주의적민족교육사업을 힘껏 도와줄것이며 교육원조비와 장학금도 보내주겠다고 하시였다.
순간 축하단성원들은 깜짝 놀라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깊은 조국의 엄혹한 현실을 그들자신이 직접 목격했기때문이였다.
그이의 너무도 뜻밖의 말씀에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그들이 얼마전 어버이주석님께서 겪으신 일까지 알았더라면 더욱 놀랐을것이다.
바로 며칠전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를 현지지도하시던 어버이주석님께서는 길가에서 허름한 책보를 안고 맨발로 학교로 가는 어린 소년을 만나시였다.
소년이 어버이주석님께 달려와 꾸벅 머리숙여 인사를 올리자 어버이주석님께서는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수행일군들에게 이것 보오, 이애에게 신발 하나 신기지 못했는데 그래도 이애는 나를 보고 인사를 하오라고 하시며 한동안 먼 하늘가를 바라보시였다.
그때 나라의 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는 그 이듬해 겨울 어버이주석님께서 강선의 로동계급을 찾으신 사연을 보아도 잘 알수 있을것이다.
전쟁으로 황페화된 나라의 경제를 하루빨리 복구하자면 중공업을 발전시켜야 하고 그러자면 강재가 있어야 하는데 종파분자들은 기계에서 밥이 나오는가고 하면서 우리 당의 경제정책을 헐뜯었고 패배주의에 물젖은 일군들은 맥을 놓고 주저앉아 한숨만 쉬였다.
정말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속이 타시였다.
얼마나 안타까우시였으면 우리 주석님께서 강재생산과 관련한 협의회를 지도하시던 도중에 강선제강소의 로동계급을 찾아가시여 이제 강재 1만t만 더 있으면 나라가 허리를 펴겠다고, 나는 동무들을 믿고 동무들은 나를 믿고 조성된 난국을 타개해나가자고 절절히 호소하시였겠는가.
조국의 형편이 그토록 어려웠지만 어버이주석님께서는 그로부터 한달후인 주체46(1957)년 1월 국가예산을 심의하는 내각전원회의에서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라는 세상에 없는 국가예산항목을 새로 제정해주시였다.
그때 어버이주석님께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일군들에게 우리가 공장을 한두개 못 짓는 한이 있더라도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동포들에게 아이들을 공부시킬 돈은 보내주어야 한다고, 일본에 우리 동포가 있고 배워야 할 어린이들이 있는 이상 계속 보내주어야 한다고 절절히 교시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주체46(1957)년 4월 19일 어머니조국의 사랑과 은정이 깃든 첫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바다건너 자본주의일본땅에 살고있는 재일동포자녀들에게 전해지는 동서고금 그 어느 나라에도 있어본적 없는 사랑의 전설이 태여나게 되였다. 올해가 바로 력사적인 그날로부터 65돐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그때 어버이주석님께서 보내주신 1억 2천만¥이나 되는 거액의 첫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받아안고 총련의 한덕수의장동지가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으며 한자한자 쓴 노래가 바로 가요《조국의 사랑은 따사로워라》이다.
해마다 조국에서 진행하는 설맞이무대에 재일조선인학생소년들도 불러주시고 조국에서 설을 맞이하는 그들이 부모들을 그리워할세라 사랑의 선물을 가슴가득 안겨주신분도 우리 주석님이시다.
어지러운 일본땅에서 민족의 춤과 노래를 지켜가는 동포예술인들이 너무도 기특하시여 그들을 조국에 불러 오랜 시간 공연을 보아주시였으며 애틋한 사랑과 믿음을 담아 친히 예술단의 이름을 《금강산가극단》으로 지어주시고 공화국의 자랑높은 해외민족예술단체로 키워주신분도 어버이주석님이시였다.
총련일군들에게 베풀어주신 위대한 주석님의 사랑과 믿음은 또 얼마나 각별하신것인가.
한덕수의장동지가 심한 병으로 운신조차 못하고있을 때 어버이주석님께서는 멀리 조국에서 그의 병상태를 매일 직접 보고받으시면서 조국에 있는 그의 아들과 딸을 교대로 일본에 보내여 돌봐주도록 하시고 유능한 수기치료의사까지 보내주시였다. 그가 어느 정도 병이 나아 걸을수 있게 되였을 때에는 조국에 데려다가 자신의 가까이에서 치료를 받도록 사랑의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지금까지 한 일도 많은데 치료를 받아 한 20년은 더 살아야 한다고, 해외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애국운동에 한생을 바쳐오는 의장동지의 병치료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까울것이 없다고 하시며 온갖 치료대책을 최상의 수준에서 세워주도록 하신 우리 주석님의 그 사랑이 불사약이 되여 의학적사형선고를 받았던 한덕수의장동지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로당익장하여 애국의 삶을 빛내일수 있었다.
어버이주석님의 영광스러운 항일혁명투쟁업적이 깃들어있는 력사의 땅에서 사는 재중동포들에게도 대를 두고 전해갈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주체62(1973)년 9월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오는 첫 조선동포조국방문단 성원으로 당시 공민학습반책임자로 일하던 양영동동포를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동포와 그의 일행이 금강산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있을 때 방문단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신 어버이주석님께서는 그들이 처음으로 조국을 찾아왔는데 우리 돈을 써보게 하자고 하시며 단장이하 매 성원들에게 100원씩 보내주도록 은정깊은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그러시면서 그들이 조국에 와서 처음으로 써보는 돈인데 은행에 가서 새 돈을 가져다주도록 하라고 세심히 이르시였다.
어버이주석님께서 보내주신 사연깊은 돈을 받아안고 양영동동포와 방문단성원들모두가 너무도 감격하여 온밤 눈물로 베개잇을 적시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국으로 불러 재중동포들의 애국운동에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도 안겨주시고 자신의 곁에 세우시여 기념사진도 찍어주시던 우리 주석님의 따사로운 사랑속에서 양영동동포는 후날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초대의장으로 조국과 민족의 기억속에 애국의 삶을 빛내이게 되였다.
주체82(1993)년 10월말 중국의 심양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범민련 재중조선인본부 제1부의장 최영희동포가 잘못되였다는 소식이 조국에 전해졌을 때였다.
녀성의 몸으로 이역땅에서 변함없는 애국심을 간직하고 민족의 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실현을 위해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던 최영희 제1부의장이 너무도 일찌기 우리곁을 떠났다는것이 우리 주석님께서는 선뜻 믿어지지 않으시였다.
그의 뜻밖의 사망을 두고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던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최영희 제1부의장에게 국기훈장 제1급과 애국렬사증까지 수여하도록 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그의 유해를 조국으로 옮겨다 수도 평양의 력포구역 동명왕릉 주변의 해외동포애국자묘 제일 가운데 안치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일군들이 지금처럼 중국 심양에 번듯하게 일떠세운 청사와 좋은 살림집들에서 마음놓고 사업할수 있게 된데도 가슴뜨거운 사연이 있다.
해외에서 애국운동을 벌려나가자면 그를 물질경제적으로 안받침할수 있는 충분한 사업조건이 구비되여야 한다. 중앙에만도 본부청사와 회의실, 사무실과 식당, 살림집을 비롯한 사업조건들이 마련되여야 하며 애국운동을 벌려나가는데도 막대한 자금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지역에 범민련 재중조선인본부라는 동포조직이 무어지고 애국운동의 첫 자욱을 내디디던 시기에는 그 어느것 하나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본부일군들이 아늑한 자기 집을 멀리에 두고 심양으로 오가면서 일해야 하는데다 그들의 활동비라는것이 얼마 안되는 년금과 개인업자들의 기부금을 조금씩 모은것이 전부여서 그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
이런 속에서도 오로지 애국으로 불타는 마음을 안고 열정을 다 바쳐 일하는 이곳 본부일군들의 수고를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신분이 어버이주석님이시였다.
어버이주석님께서는 그들이 번듯한 청사와 사무실, 살림집들을 일떠세울수 있게 조국에서 귀중한 자금을 아낌없이 돌려주도록 해주시고 애국운동에 필요한 활동자금을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들도 취해주시였다.
절세위인의 사랑과 믿음을 자양분으로 받아안고 민족의 넋, 애국의 넋을 목숨처럼 지켜온 재중동포들속에는 림종의 시각 붉은 천에 정히 모신 어버이주석님의 초상휘장을 내놓으면서 김일성대원수님을 잘 모셔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눈을 감은 1세 애국공민도 있고 북, 남, 해외통일행사에 참가하여 어버이주석님의 초상휘장을 모신데 대해 시비질하는자들에게 《우리 수령님은 조선민족모두의 하느님이시다. 네놈들이 수령님의 초상휘장을 모시지 말라는것은 나의 신앙을 없애겠다는것이다.》고 추상같이 웨치며 주석님의 초상휘장을 보란듯이 모시고 호소문을 랑독한 청년일군도 있으며 오늘까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집에 남겨두고 조국의 경제강국건설을 위한 애국사업에 한생을 묵묵히 바쳐오는 동포경제인들도 있다.
민족의 어버이의 세심한 관심과 배려속에서 재중동포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거족적통일운동조직인 범민련 재중조선인본부가 자기의 튼튼한 물질기술적토대를 가지게 되였으며 그후 재중조선공민총련합회로, 오늘의 재중조선인총련합회로 강화발전의 길을 걸어올수 있었다.
위대한 주석님의 남다른 육친적사랑속에 삶을 빛내인 동포들가운데는 국제고려인통일련합회 위원장이였던 강일선생도 있다.
강일선생으로 말하면 식민지망국민의 후손으로 로씨야 원동지역에서 태여나 오래동안 민족과 동떨어져 남을 위해 일해온 사람이였다.
어버이주석님께서는 이런 강일선생을 두차례나 몸가까이 불러주시여 구면친지 대하듯이 따뜻하고 구수한 말씀도 해주시고 민족의 향취가 넘쳐나는 음식들도 대접하시면서 애틋한 사랑을 부어주시였다.
일찌기 쓰딸린까지도 《동방의 영웅 김일성장군》이라고 아낌없는 존경심을 표시한바가 있다는것을 알고있던 선생이였지만 우리 주석님께서 그에게 동포들속에서 조선말을 배우기 위한 사업을 벌리고있는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치하도 해주시고 가정형편도 자상히 물어주시자 그이의 소탈하신 인품에 끌려 아들, 손자는 없고 딸, 외손녀들만 있다고 아쉬운 속사까지 숨김없이 아뢰였다.
그러자 어버이주석님께서는 딸들을 키우는 재미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해외동포들에게 있어서 조국은 본가집, 큰집이라고, 해마다 한번씩 조국에 와서 함께 이야기나 나누자고 하시며 그들부부에게 자신의 존함이 모셔진 금시계까지 선물로 안겨주시였다.
이역에 사는 동포들을 위해 주실수 있는 사랑과 은정을 깡그리 부어주신 위대한 주석님의 자애로운 어버이사랑속에서 우리 해외동포들은 바람세찬 이역땅에서도 김일성민족의 한식솔이라는 크나큰 긍지와 자부심을 간직하고 가슴펴고 떳떳이 살아올수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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