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441] 전쟁에서 얻은 피의 교훈과 공병정찰조의 변모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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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4-26 16:3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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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미국 전쟁실록에 수록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군공 2. 하동전투와 마산방어선 돌파전 3. 전쟁에서 얻은 피의 교훈과 공병정찰조의 변모된 모습 4. 고속기동군의 비대칭전법과 속결전씨나리오
1. 미국 전쟁실록에 수록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군공
모란봉악단이 2014년 9월 3일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신작음악회를 열었다. 모란봉악단의 공연종목 가운데는 2014년에 창작된 노래 ‘근위부대자랑가’도 있었다. 모란봉악단 성악가수들이 경쾌한 곡조로 부른 ‘근위부대자랑가’는 6.25전쟁 시기 근위칭호를 받은 8개 전투부대들의 군공에 관한 가사를 담았다. ‘근위부대자랑가’에서 일곱 번째로 나오는 근위부대가 바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다.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6.25전쟁에서 어떤 군공을 세웠기에 근위칭호를 받았으며, 7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부대명칭이 대중가요에 오를 만큼 유명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2015년 2월 7일 <조선중앙통신> 보도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6.25전쟁 시기에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개성과 연안, 강령과 옹진반도, 김포, 인천 등지를 해방하였으며,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 경상남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령활무쌍한 전술과 전법으로 남조선의 많은 지역들을 해방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락동강도하전투에서 무적의 공훈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보도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1950년 8월 29일 근위칭호를 수여받았고, 6.25전쟁에서 특출한 군공을 세운 수십 명의 공화국 2중영웅과 공화국영웅들을 배출했다고 한다.
6.25전쟁에서 조선인민군과 격전을 벌인 미국군도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군공을 인정했다. 미국 육군역사연구소(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가 역사학자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에게 집필을 의뢰하여 1961년에 펴낸 전쟁실록의 제목은 ‘남으로 낙동강까지, 북으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인데, 이 전쟁실록에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전투기록이 서술되었다. 전쟁실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코리아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기동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실록에 따르면, 6.25전쟁에 참전한 미육군 제8군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투부대를 재배치해야 했고, 미국 극동군사령부와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자기들의 전쟁계획을 변경해야 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어떤 군공을 세웠기에 미국 육군역사연구소가 그처럼 높이 평가한 것일까? 6.25전쟁 초기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작전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월 25일 개성, 옹진 점령 6월 28일 한강하구 도하, 김포반도 점령 7월 3일 서울 영등포 점령 7월 4일 경기도 인천 점령 7월 8일 충청남도 천안 점령 7월 11일 충청남도 온양, 예산, 홍성 점령 7월 19일 전라북도 군산 점령, 금강 도하 7월 20일 전라북도 이리, 전주, 김제 점령 7월 22일 전라북도 고창 점령 7월 23일 전라남도 영광 점령 7월 24일 전라남도 나주, 목포, 남원, 구례 점령 7월 25일 전라남도 순천, 여수 점령, 섬진강 도하 7월 26일 경상남도 하동 점령 7월 30일 경상남도 진주 점령 7월 31일 경상남도 마산 근교로 진격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개전 당일 개성을 점령하고 그로부터 한 달 만에 목포를 점령한 것은 매우 빠른 진격속도로 기동전을 전개했음을 말해준다. 어떻게 그처럼 빠른 속도로 진격할 수 있었을까? 다음에 열거한 사실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6.25전쟁 시기에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한국군을 압도하는 강한 무장력을 갖추었다. 6.25 전쟁 시기에 조선 주재 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울라지미르 라주바예브(Vladimir N. Razuvaev)가 작성하여 소련군 총참모부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무장장비는 땅크 4대, 자행포 16문, 견인포 64문, 반땅크포 48문, 박격포 99문이었다.
2) 6.25전쟁 시기에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진격한 한강 이남 서부전선에는 한국군 전투부대가 없었고, 경찰대만 있었다. 사실상 무방비상태였다. 경찰대는 조선인민군이 땅크를 앞세우고 진격해온다는 소문만 들어도 줄행랑을 쳤다. 이런 사실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교전을 거의 하지 않고 전진하는 기동전을 전개하였음을 말해준다.
3) 6.25전쟁 시기에 미국군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한강 이남 서부전선을 기동전으로 신속히 돌파한 뒤, 남부 해안지대에서 우회기동하여 부산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군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전라남도 목포를 거쳐 경상남도 하동을 점령할 때까지 그들이 언제 어디로 기동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적진의 가장 약한 취약지대를 기동전으로 신속히 돌파하여 허를 찔렀음을 말해준다. <사진1>
2. 하동전투와 마산방어선 돌파전
한강 이남 서부전선에서 교전을 거의 하지 않고 남진하여 목포를 점령하고 부산을 향해 우회기동하던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1950년 7월 25일 경상남도 하동에서 처음으로 교전다운 교전을 벌였다. 위에 인용한 미국 육군역사연구소의 전쟁실록 ‘남으로 낙동강까지, 북으로 압록강까지’에 하동전투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부산을 방어하던 미육군 제8군 사령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선인민군 전투부대가 하동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다급한 정찰보고를 받았다. 미육군 제8군 사령부는 마산방면에 배치된 제29독립보병련대를 1950년 7월 24일 하동방면으로 출동시켰다.
그런데 하동방면으로 이동하는 미국군 제29독립보병련대 제3대대 대대장 해롤드 무어(Harold G. Moor, jr.) 중령의 뒤를 한국군 지휘관 한 명이 따라다녔다. 그가 바로 채병덕이다. (서울방어전에서 대패하고 한강 이남으로 패주한 채병덕은 한국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영남관구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투부대가 없는 허수아비 사령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군 중령의 뒤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 제13련대는 하동의 어느 야산에 매복하고 있다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미국군 제29독립보병련대에 불의의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미국군 대대장의 뒤를 따라가던 채병덕은 머리에 기관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고, 미국군 전투원들은 많은 전사자와 무기를 버려두고 황망히 패주했다.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이 계속 추격해오자 미국군 패주병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자기들이 입고 있던 군복과 신고 있던 전투화까지 모두 벗어던지고 거의 벌거숭이로 물에 뛰어들어 내를 건넜다. 내를 건너는 동안 수영을 하지 못하는 많은 패주병들이 물살에 휩쓸려 익사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미국군 패주병 60~70명이 약 2.5km를 허겁지겁 도주하다가 어느 골짜기로 들어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능선에서 불쑥 나타난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이 또 다시 그들의 머리 위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위에 인용한 전쟁실록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집중사격을 또 다시 받은 미국군 패주병들은 “놀란 꿩들이 숨을 곳을 찾아 도망치듯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고 한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그들은 군화도 신지 못한 맨발로 어둠 속을 밤새 걸어 이튿날 아침 미국군 제19보병사단 전초선에 간신히 도착했다. 살아남은 패주병은 10명이었다. 미국군 제29독립보병련대는 하동전투에서 38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하고, 313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부지기수가 실종되었다. 사상자들 가운데는 현장지휘관들이 많았다. 그래서 미육군 제8군 사령부는 제29독립보병련대를 개편해야 했다. 이런 정황은 제29독립보병련대가 하동전투에서 패하여 사실상 궤멸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동전투에서 미국군 보병련대를 궤멸시킨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파죽지세로 진주를 점령하고, 곧바로 마산 근교까지 진격했다. 그들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돌격전에 앞서 전렬을 정비했다.
마산역에서 부산역까지 직선거리는 45km밖에 되지 않는다.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보유한 각종 견인포들 가운데 122mm 견인곡사포가 가장 멀리 포탄을 날려보낼 수 있었는데, 그 사거리는 20km였다. 그러므로 마산 근교까지 진격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마산을 점령하고 5km만 더 전진했더라면, 122mm 곡사포로 부산 도심을 타격할 수 있었다.
미국의 전쟁사가들은 당시 마산 근교까지 진격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측면돌파전을 벌이고 있었던 1950년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1개월 기간이야말로 6.25전쟁 중에 미국군이 최악의 패전위기에 몰렸던 위급한 시기였다고 지적했다.
위급한 상황에 몰려 패전공포에 사로잡힌 미국군과 한국군은 낙동강에 의지하여 불퇴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의 도하작전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당시 도하장비가 없는 조선인민군 제3보병사단과 제4보병사단은 급히 통나무로 떼를 무어 낙동강을 건넜으나, 항공무력의 화력지원을 받은 미국군과 한국군의 격렬한 저지선을 뚫지 못한 채 많은 사상자를 냈다. 낙동강전투는 격전 중의 격전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탄우는 햇빛을 가렸고, 사상자들의 핏물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미국군 제25보병사단은 마산방어선을 구축하고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의 진격을 저지했다.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은 1950년 8월 2일부터 9월 14일까지 무려 34일 동안 미국군 제25보병사단을 계속 공격하면서 마산방어선을 뚫고 나가기 위한 돌파전을 벌였다. 만일 마산 근교까지 진격한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마산을 점령하고 낙동강방어선을 측면에서 돌파했더라면, 조선인민군은 1950년 8월 15일 직전에 전쟁을 결속하고 부산에서 8.15해방 5주년을 맞았을지 모른다. <사진 2>
3. 전쟁에서 얻은 피의 교훈과 공병정찰조의 변모된 모습
격전의 포성이 정전으로 멈춘 뒤에 조선인민군은 부산 인접지역까지 진격했으면서도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피의 교훈을 되새겼다. 조선인민군이 6.25전쟁에서 얻은 피의 교훈은 무엇인가?
만일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더 빠른 진격속도로 기동전을 벌였다면, 그들은 부산으로 후퇴하는 미국군과 한국군보다 먼저 부산에 도착했을 것이다. 조선인민군 제6보병사단이 마산 근교까지 진격하기까지 1개월이 걸린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한강하구, 금강, 섬진강을 도하할 때 부교가 없어서 신속한 도하작전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민군 제3보병사단과 제4보병사단도 부교가 없어서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미국군 증원무력이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신속히 결속하려면 진지전이 아니라 기동전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강과 하천이 많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기동전을 하려면 도하작전능력과 상륙작전능력을 비상히 강화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6.25전쟁에서 조선인민군이 얻은 피의 교훈이었다.
피의 교훈은 정전 이후 오늘까지 70여 년 동안 조선인민군을 엄청나게 변화시켰다. 지난 날 도하장비가 없어 떼에 올라타 강과 하천을 건너야 했던 그들은 오늘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을까?
조선인민군의 무장장비는 고속기동전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맞춤형 무장장비로 변화되었다. 2020년 10월 10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과 2021년 1월 14일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8차 대회 열병식에 각각 등장한 각종 무장장비들은 고속기동전에 적합하게 경량화되고, 차량화되고, 장갑화된 첨단무장장비들이다. 또한 조선인민군은 도하작전, 상륙작전, 고속기동전에 참가하는 공병무력을 엄청나게 강화했다.
조선인민군이 공병무력을 엄청나게 강화했다는 사실은 2017년 1월 11일 한국 국방부가 발간한 ‘2016 국방백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6 국방백서’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15개 군단을 17개 군단으로 증편했다고 한다. ‘2016 국방백서’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2개 군단을 증편한 것은 사회안전성(당시 인민보안성)에 소속된 공병총국(제7총국)과 도로총국(제8총국)을 국방성(당시 인민무력성) 소속 2개 공병군단으로 개편한 조치였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1개 전연군단(전방에 배치된 군단)에 공병련대가 1개씩 배속되었고, 1개 기계화군단에 도하공병대대가 1개씩 배속되었고, 1개 차량화보병려단에 공병중대가 1개씩 배속되었는데, 그와는 별도로 2개 공병군단이 더 증설된 것이다. 조선인민군 1개 군단의 병력수는 63,000명이므로, 2개 공병군단에 배속된 공병은 총 126,000명이다. 이런 정황은 조선인민군이 공병무력을 엄청나게 증강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인민군의 공병무력이 엄청나게 증강되었다는 사실이 한국 국방부의 ‘2016 국방백서’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때로부터 3년이 지난 2020년 10월 10일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이 진행되었다. 그 열병식에서 조선인민군 공병군단 소속 전투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은 2016년부터 5년 동안 조선인민군 공병군단의 장비가 얼마나 질적으로 발전했는지를 현실로 보여주었다. 구체적인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2016년의 그들 모습과 2020년의 그들 모습을 비교해보자.
2016년 3월 19일 조선인민군은 강원도 원산만에서 상륙 및 반상륙방어연습을 진행했는데, 그날 연습에 공병정찰조가 참가했다. 그들은 바다와 개펄을 고속으로 질주하는 공기부양정을 타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질풍 같이 달려가 해안 모래사장에 신속히 상륙했다. 조선인민군 공병정찰조는 상륙구역에 은밀히 침투하여 적정을 정찰하고, 상륙구역 해안에 설치된 용치(龍齒) 같은 차단물을 폭파하여 상륙돌격로를 열어놓는 작전임무를 수행한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2020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공병군단 소속 전투원들은 전시에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정찰하고, 차단물을 폭파하고, 진격로를 열어놓는 공병정찰조인 것이 분명하다.
주목되는 것은, 지난 5년 사이에 조선인민군 공병정찰조의 장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언론보도사진을 보면, 2016년 3월 19일 원산만에서 진행된 상륙연습에 참가한 공병정찰조는 얼룩무늬전투복을 입고, 방탄모가 아닌 군모를 쓰고, 어깨에 자동보총과 배낭을 메고, 손에 삽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사진 3>
그런데 2020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 참가한 공병정찰조의 모습은 크게 달랐다. 그들의 모습은 매우 특이하게 보였다. 이를테면, 그들은 5년 전과는 전혀 다른 신형 자동보총을 들었고, 5년 전과는 전혀 다른 신형 위장무늬전투복을 입었으며, 5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방탄조끼를 입었다.
그보다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열병종대 전반부는 투명한 얼굴가리개(면갑)가 부착된 방탄모를 머리에 썼고, 검은색 접시형 물체가 달린 특수야전배낭을 어깨에 멨고, 열병종대 후반부는 보안경이 부착된 방탄모를 머리에 썼고, 구명조끼를 입었고, 방수야전배낭을 어깨에 멨다는 것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투명한 얼굴가리개가 부착된 방탄모를 쓴 전투원들은 전시에 적진에 침투하여 적정을 정찰하고, 각종 차단물을 폭파하는 공병정찰조다. 그리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안경이 부착된 방탄모를 쓰고, 구명조끼를 입은 전투원들은 전시에 적진에 침투하여 각종 차단물을 폭파하고, 강이나 하천에 부교를 설치하는 공병도하조다.
그렇다면 공병정찰조가 어깨에 멘, 접시형 물체가 달린 특수야전배낭은 무엇이며, 공병도하조가 어깨에 멘 방수야전배낭은 또 무엇인가?
그 야전배낭에 얽힌 궁금증을 풀려면, 2017년 1월 27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의 현지지도 밑에 진행된 도하공격전술연습에 관한 언론보도를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보도기사에 따르면, 그날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도하공격전술연습을 현지에서 지도하면서, “공병정찰기재의 현대화, 무인화를 높은 수준에서 실현할 데 대한 문제”를 제시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화되고, 무인화된 정찰기재로 공병정찰조를 장비시킬 과업을 제시한 것이다. 그 과업을 받은 조선국방과학연구원 산하 공병연구소가 기술적 난제를 자력으로 극복하면서 연구, 개발한 첨단정찰기재가 바로 접시형 물체가 달린 특수야전배낭이다. 접시형 물체는 안테나이므로, 그것이 달린 특수야전배낭 속에는 무인정찰기 또는 무인로봇을 조종하는 전자장비가 들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공병정찰조는 적진 상공에 무인정찰기를 은밀히 침투시켜 적정을 정찰하거나 적진에 무인로봇을 침투시켜 무인총격전을 벌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날 열병식에 참가한 공병도하조가 어깨에 멘 방수야전배낭 속에는 적진에 설치된 각종 차단물을 폭파하는 고성능 폭약이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전시에 공병도하조는 적진에 침투하여 고성능 폭약으로 각종 차단물을 폭파하고 부교를 부설하는 것이다.
5년 전에 삽자루를 손에 들고 상륙연습에 참가했던 공병정찰조가 5년 뒤에는 미래전을 수행할 최신형 전자장비를 어깨에 메고 열병식에 나타났으니 실로 비약적인 발전이 아닐 수 없다.
4. 고속기동군의 비대칭전법과 속결전씨나리오
우리나라 지도를 펴놓으면, 동서로 240km에 이르는 군사분계선이 조국강토를 갈라놓은 가슴 아픈 모습이 보인다. 서부전선, 중부전선, 동부전선으로 구분되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은 방대한 규모의 무력을 각각 배치했다. 그런 한국군의 배후에는 태평양을 건너와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을 장악한 미국군이 상시공격태세를 갖추고 있다.
전쟁이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정전상태에서 그처럼 방대한 규모의 무력을 동원하여 첨예하게, 그리고 그처럼 오랜 기간 동안 대치하는 곳은 전 세계에서 군사분계선 인접지대밖에 없다. 조미협상과 남북협상이 모두 중단되어 평화협정을 체결할 가능성이 사라진 지금, 우리나라 안팎에 조성된 긴장된 정세는 바로 그 지대에서 전쟁이 재발할 위험이 차츰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글을 집필한 동기는 그런 정세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한국군과 조선인민군이 각각 방대한 규모의 무력을 군사분계선 중앙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국군 제7기동군단은 중부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기세로 배치되었고, 조선인민군 땅크군단과 기계화군단도 중부전선을 돌파하여 남진할 기세로 배치되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전쟁이 재발하는 경우, 경기도 파주, 동두천, 연천에서 강원도 철원, 화천, 양구, 인제로 이어지는 거대한 활모양의 작전지대에서 최대 격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6.25전쟁 시기에도 바로 그 지대에서 최대 격전이 벌어졌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은 한국군과 다르다. 달라도 정말 많이 다르다. 이를테면, 조선인민군은 한국군이 갖지 못한 강점과 특징을 가졌는데, 그것이 바로 비대칭전법이다. 남측에서는 비대칭전법이라 하고, 북측에서는 주체전법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대칭전법이란 적진의 가장 약한 작전지대에 불의의 공격을 집중하여 방어선을 신속히 무너뜨리고 고속기동전에 돌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에 조선인민군이 자기의 비대칭전법에 따라 공격을 집중하여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고속기동전에 돌입하게 될 작전지대, 다시 말해서 한국군 방어선에서 가장 약한 작전지대는 어디일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가장 약한 작전지대는 쌍방의 방대한 무력이 대치한 군사분계선 중앙부에서 벗어난 익측지대다. 익측지대 두 군데가 보인다. 군사분계선 서단에 있는 김포반도와 군사분계선 동단에 있는 강원도 해안지대가 익측지대다.
그러면 조선인민군이 익측지대에서 비대칭전법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예상해보자. 전시에 익측지대에서 비대칭전법을 수행할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고속기동군이다.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은 땅크사단, 기계화사단, 자행포려단, 방사포려단, 차량화보병려단으로 편성되는데, 화력타격력, 장갑방호력, 고속기동력에서 가히 최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속기동군은 익측지대에서 어떤 비대칭전법을 수행할 것인가?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은 개성시 개풍구역에서 한강합수부(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수역)를 도하하여 김포반도에 상륙한 다음, 인천을 점령하고 곧바로 서해고속도로를 타고 목포까지 남진하는 고속기동전을 전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고속기동전씨나리오가 근거 없는 전쟁소설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아래에 서술된 내용이 말해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이 한강합수부를 도하하여 김포반도에 상륙하려면, 다음과 같은 작전이 병행되어야 한다.
1) 조선인민군 공병정찰조가 김포반도에 침투하여 그 지역을 방어하는 한국군 해병대 제2사단의 움직임을 정찰하게 된다. 공병정찰조가 김포반도에 침투하여 적정을 정찰한다는 말은 잠수복을 입은 공병정찰조가 어둠이 깔린 한강합수부에서 수중으로 침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식의 수중침투는 옛날이야기다. 공병정찰조는 한강합수부 강바닥 아래 깊은 곳에 건설된 하저갱도를 타고 김포반도 곳곳에 깊숙이 침투하는 것이다. 개성 인근에서 한강합수부를 건너 김포반도까지 이어지는 하저갱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980년 6월에 월남한 탈북자의 진술을 담은 <월간조선> 1992년 6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저갱도를 통해 김포반도 곳곳에 침투한 공병정찰조는 무인정찰기를 한국군 해병대 제2사단의 머리 위로 날려 그들의 움직임을 촬영한 정찰영상을 조선인민군 전선지휘부에 실시간으로 전송하게 된다.
2) 실시간 정찰정보를 받은 조선인민군 방사포부대와 항공군 비행대는 즉시 한국군 해병대 제2사단에 대한 정밀타격을 개시하게 된다. 한국군 해병대 제2사단을 가장 먼저 공격할 전투단위는 조선인민군에서 최강 포병부대로 알려진 독립포병려단이다. 독립포병려단은 5개 방사포대대로 편성되었다. 1개 방사포대대는 3개 방사포중대로 편성되었는데, 1개 방사포중대가 운용하는 방사포는 9문이다. 그러므로 독립포병려단에는 방사포 135문이 배치된 것이다. 전시에 조선인민군은 독립포병려단 3개를 동원하여 한국군 해병대 제2사단을 공격할 것으로 예견되는데, 이것은 대구경방사포 405문이 상상을 초월한 화력타격을 퍼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구경방사포의 집중타격을 받고 정신을 잃은 한국군 해병대 제2사단은 황해남도 태탄군에 있는 태탄비행장에서 이륙한 수호이(Sukhoi)-25 지상공격기, 무장헬기, 습격기의 순차적인 파상공습을 받을 것으로 예견된다.
조선인민군 독립포병련대가 한국군 해병대 제2사단을 정밀조준하여 대구경방사포를 사격하는 순간, 조선인민군 화력타격집단은 한미련합군 공군기지들과 방공기지들을 정밀조준하여 조종방사포를 사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미련합군 공군기지들과 방공기지들은 조종방사포 공격을 받고 30분 만에 전부 파괴될 것이므로 조선인민군 항공군 비행대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공습작전을 벌이게 된다.
3) 전시에 조선인민군 공병도하조는 한강합수부에 도하구역을 확보하고, 부교를 설치하게 된다. 땅크사단, 기계화사단, 자행포려단, 방사포려단, 차량화보병려단으로 편성된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이 부교도하, 잠수도하, 수상도하로 한강합수부를 신속히 건너 김포반도와 인천을 점령하게 된다. 고속기동군은 인천에서 서해고속도로를 타고 목포로 진격하게 된다.
4)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은 고속도로를 타고 매우 빠른 진격속도로 기동전을 벌여야 한다. 그런데 전시에 수많은 차량들이 밀려나와 고속도로가 꽉 막히면, 운전자와 탑승자들이 자기 차량을 버리고 떠나버리게 된다.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이 버려진 차량들로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진격하려면, 그 차량들을 도로 밖으로 밀어내는 도로정비작전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서 조선인민군은 전시에 도로정비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할 전투단위를 창설했으니, 그것이 바로 이름도 생소한 도로군단이다.
2017년 1월 11일 한국 국방부가 발간한 ‘2016 국방백서’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2개 공병군단을 증설했는데, 그 중에서 1개 공병군단이 도로군단이다. 조선인민군 도로군단은 도로건설부대가 아니라, 중장비를 동원하여 전시도로정비작전을 수행하는 공병부대다. 도로군단의 존재는 201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 열병식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날 열병식에 20번째로 등장한 열병종대는 주철희 륙군소장이 지휘하는 도로군단 소속 공병들이었다. 전시에 조선인민군 도로군단은 중장비를 동원하여 고속도로에 버려진 차량들을 밖으로 밀어내며 고속기동군의 진격로를 열어놓게 된다. <사진 4>
1) 조선인민군 제1군단이 강원도 고성군을 방어하는 한국군 제22보병사단을 전방에서 공격하는 동안, 조선인민군 산악보병사단은 한국군 제22보병사단 후방 산악지대에 진출하고, 조선인민군 륙전대는 한국군 제22보병사단 후방 해안지대에 상륙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군 제22보병사단은 포위망에 들어갈 것이다. 원래 한국군 제22보병사단은 군기가 해이하여 경계작전실패사건을 주기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약골부대이므로, 조선인민군의 포위공격을 받으면 몇 시간 견디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2) 땅크사단, 기계화사단, 자행포련대, 방사포련대, 차량화보병려단으로 편성된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은 한국군 제22보병사단 방어선이 무너진 동부전선 해안지대로 진격하여 속초를 점령하게 된다. 고속기동군은 속초에서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진격하게 된다. 서해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동해고속도로에서도 조선인민군 도로군단이 고속기동군의 진격로를 열어주게 된다.
목포를 점령한 고속기동군과 부산을 점령한 고속기동군은 각각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우회진격하여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경계선에서 조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고속기동전을 완료한 조선인민군은 동해, 서해, 남해의 해안지대를 따라 남측 전역을 포위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조선인민군의 비대칭전법은 주력부대가 전선중앙에서 남진하는 동안, 익측의 고속기동군이 동부해안지대와 서부해안지대에서 각각 진격하는 전법이다.
조선인민군 고속기동군이 동해, 서해, 남해 해안지대에서 기동전을 종료하는 것과 함께 내륙에서는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이 전략갱도를 타고 지하로 침투하고, 수송기와 습격기와 헬기를 타고 공중으로 침투하여 서울, 춘천, 대전, 광주, 대구를 비롯한 대도시들을 신속히 점령하게 된다. 시가전을 거의 하지 않고 신속히 점령할 것이므로 무혈입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쟁피해를 최소화하고, 개전 72시간 만에 신속히 결속되는 초단기속결전은 그렇게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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