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사시 한미관계 150년⑫ 미국, 대일강화조약 체결 시 한국 짓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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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6-09-15 09:4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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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사시 한미관계 150년⑫ 미국, 대일강화조약 체결 시 한국 짓밟아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 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 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 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1945년 조선은, 35년 식민의 상처를 안고 해방의 새벽을 맞았으나, 그 새벽은 완전한 아침이 아니었다.
국토는 둘로 갈라졌고,
민족은 서로 다른 깃발 아래 서게 되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꿈은 분단의 철조망에 걸려 찢겼다.
그런데도
조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래도 정의가 오고.
식민의 고통과 강제징용의 피눈물, 성노예의 절규와 약탈당한 산천의 아픔이 국제사회의 법정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으리라고.
소련의 군사력이 만주를 순식간에 휩쓸어버리자 미국은 경계하며 한반도를 절반으로 갈라친 뒤 소련을 견제할 냉전구도를 만들고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추진했다.
일본을 미국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목적 아래. 그러나 대일 강화조약 협상이 진행되면서 조선의 기대는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렸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쟁을 끝낸다는 이름의 회의장에는 승전국들이 모였으나,
안중근 의사의 투쟁, 3.1 독립운동 등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한국의 자리는 없었다 발언권도 없었으며, 서명할 펜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문밖에 서 있었고 가해자 일본의 미래는 회의장 안에서 따뜻한 분위기 속에 논의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미국은 말했다.
“일본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 경제를 회복해야 하고, 소련과 중국을 막아야 하며, 아시아의 반공 보루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은 곧 배상은 줄어들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전쟁범죄의 책임은 최소한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독일에게는 베르사유의 무거운 사슬을 채웠던 서구가 일본에게는 새로운 출발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 길 위에서 국권 침탈의 아픔 강제징용의 한숨도, 군 위안부의 통곡도, 식민지 백성들의 피와 눈물도, 국제정치의 뒷골목으로 밀려났다.
1945년만 해도 미국은 말했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후유증으로배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1949년 이후 입장을 뒤집고 “한반도는 연합국 자격을 상실했다”며 일본의 배상 부담을 덜어주기에 골몰했다
냉전의 그늘 아래 원칙은 사라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전후를 통해 한국은 일본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큰 목소리로 주장했다.
한국은 1905년부터 일본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40년 동안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강제징용은 물론 문화재, 금, 토지 강제 수용 등을배상 대상으로 포함시켰다.그러자 미국 정부는 한국을 세계 2차 대전 연합국에 포함시키지 않고 단지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일본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규정했다.
필리핀에 대한 배상의 경우도 2차 대전 당시 일본에게 당한 피해에 국한했다.
이어 미국은 일본이 배상할 대상의국가 범위를 2차 대전 당시 일본과 교전한 국가로 축소하는 방침으로 변경하고 남북한, 중국을 회의 초청대상에서도 제외했다.
미국의 원칙은 고무줄처럼 작동하면서 일본을 친미화하는 쪽으로 집중했다. 국제적 규범은 물론 상식도 외면한 것은 물론 규탄받을 짓도 저질렀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관에서 일본과 48개국이 맺은 평화조약 한국은 서명조차 못 했다.
40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연합국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미국은 협의 과정에서부터 한국을 철저히 배제하며 일본의 전쟁범죄 배상 조건 논의에서 한반도를 아예 외면했다.
미 국무부는 파렴치한 괴문서까지 유포했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
남한에 남겨진 일본 자산이 한국의 배상 청구액의 4배라는 미국 국무부의 해괴한 계산법으로 도둑질한 장물을 합리화했다.
식민의 수탈과 탄압으로 가득 찬 세월을 근대화로 둔갑, 미화시킨 것이다.
삼팔선 이남에 일제가 남겨두고 간 적산(敵産)의 무게가 한국이 요구하는 전쟁 배상액의 네 배에 달한다?
조선에 남겨진 일본인 재산이 배상액보다 많다? 미국은 철도와 공장, 건물과 시설을 들먹이며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와 아픔을
회계장부의 숫자로 환산하려 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고통을 무슨 숫자로 셀 수 있으며, 언어, 이름을 빼앗기고 독립운동 탄압 속 목숨을 빼앗긴 세월을
어떤 회계장부에 적을 수 있단 말인가.
일제의 식민지배는 단순한 점령이 아니라 토지와 자원과 노동과 기억을 빼앗은 총체적 수탈이었다
그러나 전후 대일조약의 논리 속에서 그 폭력은 희석되었다
침략은 경제정책처럼 설명되었고 수탈은 근대화의 그림자로 위장되었다
강제동원은 통계가 되었고 성노예는 침묵 속으로 밀려났다
도둑이 남의 집에 들어와 강토를 빼앗고 자원을 수탈한 뒤 버리고 간 연장들이 더 비싸다고 속삭이는 해괴한 논리였다.
정상적인 경제의 열매가 아닌, 강도질로 일군 장물을 돈으로 환산하여 배상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던 파렴치한 행위. 한민족의 역사적 고통과 도덕적 청구권을 사악한 논리로 유린한 것이다.
국내 일부 학자들이 맹종하는 식민사관의 수치스러운 뿌리는 미국이 만든 흉악한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일제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무뇌아적 사관은 그때, 미국이 뿌린 악마의 씨앗에서 잉태된 괴물이다.
독도 또한 그 추악한 계산속에서 흥정거리가 되었다.
동해의 외로운 바위섬은 초안에서는 한국 땅이었다가, 다른 초안에서는 일본 땅이 되었고, 또 다른 초안에서는 아예 이름조차 사라졌다.
조약 협상 과정에서 다섯 차례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의 땅으로 명시되었건만 여섯 번째 초안에서 갑자기 일본 땅으로 했다. 일곱 번째부터는 이름조차 사라졌다. 한국이 항의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고, 강제동원과 문화재 약탈, 토지 수탈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조약이 복잡해진다.” “일본의 재건이 늦어진다.”
“냉전의 전략에 방해가 된다.” 조약 협상 과정에서의 파행이 심화되어도 이승만은 적극 나서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이승만은 불만이 있을 때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는 작업을 항상 했다.
정전협정 협상 과정에서도 계속 백악관에 친서를 보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을 반대하는 친서를 미 대통령에게 계속 보내도 반응이 없자 그는 반공포로를 독자적으로 석방까지 했다.
정전협정의 판을 흔들려 벼랑 끝 외교를 펼쳤다.
미국이 발끈했고 이승만을 제거할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지만 대안 부족이라며 중단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관련해
미 대통령에게
직접 친서를 보낸 기록이 없다.
그는 분단과 북진과 대결에 집중했을 뿐이다.
이승만의 시선은
한반도 내부의 전선에 고정되어 있었고
아시아 전체의 전후 질서를 둘러싼 문제에는
충분히 닿지 못했다
그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들은
북진통일에 대한 집착을 드러냈지만
전후 동북아 질서의 정의를 묻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포화 속에서
오직 ‘북진통일’의 함성만을 지른 것이다.
이승만의 태도는 일면 통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할 만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군사적 주권을
미국에 송두리째 넘겼기 때문이다.
그가 북진통일을 염원했다면
군 통수권을 확실히 확보하는 식으로
미국과 협상하지 않았을까?
당시 한국군의 수는 60만 명에 육박해
자주국방을 이룰 만한 규모였다.
그런데도 미국에게 점령군의 지위를 보장해
일제의 침략이 물러간 강산이 외세의
군사적 지배를 받게 했다.
왜 그랬을까?
이승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어
쉽게 말하기 어렵지만
그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
즉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를 만들려는 구상에
침묵으로 협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외교적 감각이 미국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집권유지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오늘날 중러 압박을 위해 활성화된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는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이 구상한 것으로
주한미군이 치외법권적 특권을 지니며
그 핵심적 중추역할을 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 일본과의 안보조약과
일본에 있는 유엔사 후방기지를 하나로 묶는 시스템으로
지난 70여 년간 미국에 의해
한일 간의 감정대립에도 불구하고 유지, 강화되어 왔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일본의 책임을 줄이고
피해국의 발언권을 약하게 만들어
일본의 친미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활용되고
이승만은 그런 미국의 속셈에 침묵으로
적극 기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배 기여론과
‘배상액보다 4배’라는 식의 해괴한 논리를 내놓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침략 피해를
가장 오래, 심하게 당한 한국이 침묵해야
다른 일본 피해국들의 입지가 좁아져
일본의 배상 책임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논리를 연이어 내놓은 것이다.
미국이 파렴치한 계산법 등을 앞세워
식민 강탈의 범죄를
정상적 행위처럼 둔갑시키면서
국제법의 언어는 흔들리고
도덕의 기준은 뒤집혔다
빼앗긴 땅의 자산은
강탈자의 정당한 소유가 아니라
폭력의 증거인 것이다
그것을 악마적 계산법으로 환산해
배상의 크기를 깎아내리는 행위는
피해의 본질을 지우는 또 다른 폭력이었다
미국이 자국 이익을 탐해 그렇게 했다.
그 추악한 행위로 동북아 냉전 구도 속
한미일 군사협력 시스템이 발족하고
일제의 식민지배 기여론이라는
해괴한 언어로 이어졌다
폭력은 공로로 둔갑했고
침탈은 발전의 조건으로 포장되었다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
샌프란시스코 문서 속에서
뒤집히는 죄악이 범해졌다
독도 문제도 그랬다
조약의 초안이 바뀔 때마다
그 섬의 이름은 오락가락했다
한국이었다가 일본이었고
다시 사라졌다
국제문서에서 이름이 빠진다는 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그것은 미래의 분쟁을
남겨두는 방식이었다.
독도에 대한 미국의 망발과 무원칙은
대단히 심각하고 무겁다.
미국은 독도로 인한
영토의 분쟁 소지를 남겨두어
한일 간의 영토분쟁과 갈등을 구조화했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한 독도 도둑질을
거짓말로 꾸며
교과서에 넣고
일본 청소년에게 가르치고 있다.
한일 미래 세대의 전쟁 불씨를
심어 놓고 부채질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다.
그 뒤에 미국의 더 치밀한 계산이 있다.
향후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독도 영유권 보호를 위해
참전할 국제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한미일 3각 군사협력 체제를 위해
설계한 전략 구도의 일부라 한다.
거짓말일까, 사실일까?
어느 것이 사실이라 해도
독도 영유권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미국의 책임은
영원히 벗을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또 이승만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강 건너 불 보듯 한 것은
미국의 신냉전 전략이
이 조약을 토대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더 짙어지는 것이다.
미국에게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북아 전략은 미 국익 추구를 위해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그것을 눈여겨 본 이승만이 미국을
도와주기 위해 거리를 둔 것이란
의혹은 그가 미국과 합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 2, 4조에서
더 짙어진다.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을
주한미군이 비밀리에 수행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외국군 주둔의 공식은
대등한 주권국 간의 상식적인 관계로
당시 유럽연합 회원국과 미국의 군사관계 등에서
쉽게 확인되는데도
이승만은 미군을 점령군에 흡사한 괴물로 받아들였다.
이승만이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미동맹의 골격을 만드는 식으로
미국에 몰빵한 의혹에 대한
진위 여부가 더 이상 침묵 속에
방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식이 열리던 날,
미국이 한국에 내민 마지막 배려는
회의 참석의 권한도, 발언의 기회도 없는
‘비공식 게스트’의 자격을 준 것이었다.
단지 대표단이 숙소 호텔을 예약하는 데만
도움 되는 미 정부의 조치였다.
그 뼈아픈 모욕 앞에서도
이승만은 여전히 침묵했다.
협상 초기부터 한국은 참여를 요구했지만
그 요구는 번번이 낮춰졌다
처음에는 협의국이, 다음에는 옵서버가 되었다가
마침내 비공식 손님이 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국가가
전범국 일본에 대한 강화조약 회담에서
존재감 없는 손님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적 시각으로 보면
그것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역사를 구경꾼으로 전락하거나
강대국 미국에 무한대로
봉사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뿐이다
미국은 비공식 손님으로 전락한
한국을 대외적으로 가차 없이 짓밟았다.
호텔 예약을 돕는 배려만 주어졌을 뿐
역사적 정의를 위한 좌석은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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