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남북 수교론을 비판하며...진보.개혁, 이제 통일은 말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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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4-14 19:5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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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북 수교론을 비판하며...진보·개혁, 이제 통일은 말하지 않을 것인가
[기고] 남북 수교론을 비판하며... / 김광수 통일뉴스 4월11일 서울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에서 ‘통일’은 이제 사라지고 있는, 아니 이미 사라진 ‘낡은’ 개념이 되었다. 민주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통일 대신 평화 공존론을 주창해 왔고, 문제는 진보도 이제는 ‘통일’을 입에 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례를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벅차다. 그래서 한 예만 든다. 자칭 범민련 남측위원회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받겠다며 출범한 자주연합 준비위원회도 자신의 출범을 알리는 출범선언문(2024.7.18.)에서 “지정학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내외정세로 보나, 자주 없이 민생도 민주도 평화도 없고, 한반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도 없다."라고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래 노출된 사진에서 아주 명쾌하게(?) 상징한다. “자주없이 민생·민주·평화없다!”, “한미예속동맹 철폐하고 자주평화국가 실현하자!”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한미예속동맹체제와 자주는 서로 양립되지 않는 모순관계이다. 해서 ‘예속’에서 벗어나는 순간 ‘평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통일의 하위적 담론체계이다. 그런데 이를 ‘통일’ 대신 ‘평화’를 집어넣는다?
우리는 배웠다. 철학에서 사물의 관계를 설명할 때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왜곡해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또한 깨달았다. 실제 집이 건축되는 순서는 주춧돌부터 시작되지만, 우리가 집을 짓는 그림에는 지붕부터 먼저 그린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주춧돌’ 인식을 하지 않고, 본질에 우선하기보다는 드러난 현상만으로 인식하는(그것도 때때로는 현상이 본질을 왜곡해서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것은 현상에 대한 형이상학적 접근의 결과이다. 그러니 위 구호는 ”자주없이 민생·민주·통일없다”, 마찬가지로 “한미예속동맹 철폐하고 자주(적) 통일국가 실현하자!”가 정상적이다.
그렇다 하여 오해는 하지 마시라. 평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단지 분단된 국가에서의 평화 문제는 국제관계학(정치학)에서 말하는 학술 담론적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보충 설명] 왜 한반도에서는 ‘순수’ 평화운동이 가능하지 않나?
한반도에서의 자주통일운동은 분단체제 극복을 전제로 하는 운동의 논리인데, 분단을 용인하는 순간 그 평화운동은 분단과 상관없는 ‘순수’ 평화운동이 된다. 설명으로는 ‘순수’ 평화운동은 분단되지 않은 주권국가가 타국과의 군사적 긴장이 발생할 때 ‘전쟁반대’와 같은 구호를 들고 평화운동을 한다면 그 정당성을 띠지만, 즉 ‘전쟁의 반대는 평화’, 혹은 그 반대, ‘평화의 반대는 전쟁’ 개념으로 연결되어 국제관계학(정치학)이나 평화학에서 말하고 있는 ‘전쟁과 평화’의 담론체계가 성립한다.
하지만 분단된 국가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것도 외세(구체적으로는 미 “제국”)에 의해 분단된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일반론인 국제관계학(정치학)이나 평화학에서 말하고 있는 ‘전쟁과 평화’의 관계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다. 즉 학술적 담론체계가 아닌 실천적 담론체계 안에서의 평화 개념이어야 하고, 같은 논리로 우리의 분단체제는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닌 ‘분단’이라는 원리를 강제한다. 그런 만큼, 이러한 전제 없이 진행되는 평화운동, 그 자체는 절대 통일운동이라 할 수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측면에서도 한번 더 상술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에서 평화가 오지 않고, 혹은 평화체제가 수립되지 않은 것은 전쟁 그 자체로 인해 발생한 원인이 결코 아니다. 분단으로 인해 생긴 결과이다. 그러다 보니 전쟁은 이미 분단 안에 내재해 있다고 봐야 하며 그래서 이 분단을 극복하지 않으면 분단체제는 늘 전쟁의 먹구름을 한 하늘 아래 이고 살 수밖에 없는, 그 논리화가 분단된 땅에서는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닌 분단이라는 인과관계가 성립할 뿐만 아니라 분단 극복없이는 그 평화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얼음장 위의 평화’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해서 이 땅 대한민국에서 평화는 왜 반드시 통일과 결합해야 하고, 평화운동은 왜 반미‘자주’와 결합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그렇게 명확하다. (<더 통일>, 185~186쪽, 재인용)
해서 참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연속된다. ‘전쟁으로 통일하자’, ‘통일은 이제 필요없다’ 등이 그 예인데, 왜 그런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통일문제에 있어 ‘전쟁으로 통일하자’는 좌편향이고, ‘통일은 이제 필요 없다’는 우편향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 ‘두’ 사례보다 더 심각한 편향 문제가 발생했다. 남북 수교론이 그것이다. 남과 북은 이제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는 두 국가이니, 이를 인정하고 남과 북이 수교하여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 그 논리의 핵심이다. 그리고 북의 ‘적대적’ 남북 관계에서 남의 남북 수교론을 통해 ‘평화적’ 남북 관계를 만들어내자는 것이 이들 주장의 골자이다. 가히 제3유형의 편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놓고, 각각의 주장이 왜 편향인지 한번 살펴보자.
먼저, ‘전쟁으로 통일하자’는 우리 민족이 상상해서는 안 될 통일 논리이다. 거두절미, 왜냐하면 우리가 통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우리 민족 운명을 우리 스스로 자주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대원칙이 있고, 통일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 민족의 부흥 강성과 인류애적 호혜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인데, 전쟁의 방식은 이와 확연히 대치한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에서 이미 확인받듯 우리 민족의 공멸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 ‘통일은 이제 필요 없다’ 역시 우리 민족의 분단이 왜 생겨났는가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이다. 우리 민족의 분단은 우리 민족 스스로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외세-구체적으로는 미 “제국” 자신들의 이해와 이익으로 인해 생긴 분단인 것이다. 해서 우리 민족은 숙명적으로 이를 바로잡을 책무-비정상성의 정상성으로의 회복-가 있으며 이는 곧 외세를 물리쳐 통일로 완전히 회복되는 자주독립 국가 건설이 그것이다.
셋, 작금의 현실론을 수용해 남과 북은 ‘두’ 국가로 실체하니 이를 인정해 불가능한 ‘통일’ 대신 그나마 현실 가능한 수교를 통해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해서 살자는 주장이 그것인데, 언뜻 보면 참으로 그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런가?
북의 적대적 두 국가론 본질을 전혀 엉뚱하게 해석한 오류가 있다. 북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는 것은 민족·동족 개념 그 자체를 부정한 것도, 남과 북이 두 국가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근거는....
북이 언급한 적대적 두 국가론은 다음과 같은 조건절이 있다.
“우리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하여 ‘정권 붕괴’와 ‘흡수 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며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강조, 필자),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였다.(당 전원회의)”
해석해 보면 ‘두 국가’ 개념 성립의 전제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적’을 선포한 대한민국
둘째, ‘외세(구체적으로는 미 제국)’와 야합한 대한민국
셋째, (‘첫째’와 ‘둘째’에 의해 진행되는) ‘정권 붕괴’와 ‘흡수 통일’을 추진하는 대한민국
반면 위 세 가지 조건이 철회된다면 당연히 그 상태는 남과 북의 관계가 두 국가일 필요가 없다, 이다.
첫째, ‘주적’을 철회한 대한민국
둘째, ‘외세(구체적으로는 미 제국)’로부터 자주권을 회복한 대한민국
셋째, ‘정권 붕괴’와 ‘흡수 통일’을 추진하지 않는 대한민국
결과, 우리의 관점은 북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현상적으로 인식하고 수렴할 것이 아니라 그 ‘조건절’을 위 표와 같이 전환시켜 내는 자주통일운동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이를 남북 수교론으로 왜곡하는 것은 자주통일운동에서(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편향적 주창이다.
해서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정세는 현상에서 있지 않다. 같은 논리로 이 땅의 자주통일운동도 ‘평화’에 있지 않고 ‘통일’에 있다. 현상에 집착되어 본질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갈 길이 멀다(어렵다)하여 우회해서도 안 된다. 정도만이 정답이다.
마치 이는 식물의 존재 이유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자연에 있듯, 통일의 존재 이유 또한 진보·개혁에 있지 않고 우리 민족에게 있다는 이치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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