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준211]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한다는 가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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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9-24 18:28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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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준211]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한다는 가짜뉴스
문 경 환 기자 자자쉬보 9월 24일 서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8일 북한의 무인기 성능시험을 현지지도 했다고 다음날 노동신문이 보도했습니다. 여기서 전략·전술 무인정찰기, 자폭형 무인기, 다목적 무인기를 비롯한 각종 무인기가 등장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새로 도입하고 있는 인공지능(AI) 기술을 급속히 발전시키는 데 선차적인 힘을 넣으며 무인기들의 계열생산 능력을 확대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에는 자폭형 무인기가 벙커와 기갑 차량에 명중해 크게 폭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 ▲ 자폭형 무인기 시험 장면. © 노동신문 |
국내 언론도 북한의 무인기 시험에 주목하고 여러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기사 중에는 끝에 러시아에서 관련 기술을 지원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문구를 넣은 게 많았습니다. 무인기뿐 아니라 대륙간 탄도미사일, 핵무기, 인공위성 등 과거 북한 관련 기사를 봐도 러시아 기술을 지원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가 많습니다. 하도 이런 주장이 많다 보니 일부 전문가나 언론은 아예 러시아 기술 지원을 기정사실처럼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북한이 러시아 기술을 지원받았다는 추정에는 직접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그냥 그런 것 같다는 추정일 뿐입니다. 명백한 증거도 없으면서 왜 북한이 뭔가 새로운 기술만 공개하면 러시아 기술을 지원받았다고 하는 걸까요? 이들은 마치 조건반사처럼 북한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거나 뭔가 좋아 보이는 게 등장하면 이런 식으로 분석합니다.
북한의 신기술은 러시아에서 전해준 것이라는 추정이 자꾸 나오는데 혹시 북한에서 그런 추정이 나올만한 모습을 보인 게 있을까요? 역사적으로 북러관계가 어떠했는지 살펴봅시다.
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가른 전투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일명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으로 기록된 이 작전으로 독일은 순식간에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했고 3개월 만에 모스크바까지 진격했습니다. 반년 만에 소련은 500만 명 가까운 군인이 사상·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한편 1936년 10월 25일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맺은 협정에 따라 독일의 소련 침공에 맞춰 일제도 동쪽에서 소련을 협공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일제 관동군은 만주국을 발판으로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점령하려는 ‘북부 타격단 계획’을 세워두었습니다. 만약 일제까지 소련을 공격하면 소련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 ▲ 북부 타격단 계획. |
그런데 일제는 계획과 달리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1939년에 있었던 할힌골 전투의 여파 때문입니다.
1939년 5월 28일 일제가 몽골에 주둔한 소련군을 습격하면서 할힌골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할힌골은 할하강의 몽골 이름이며 이 지역은 일제와 몽골이 국경선 문제로 갈등을 빚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몽골과 소련은 동맹관계로 소련군이 몽골에 주둔하면서 일제의 침략을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할힌골 전투는 8월 말까지 이어졌으며 소련·몽골 측과 일제·만주국 측이 합계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수백 대의 전차·항공기를 투입한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사상자도 쌍방에서 수만 명이 발생했습니다. 9월 15일 양측이 휴전을 합의하면서 소련·몽골의 승리로 전투가 종료됐습니다. 이름은 조그만 국경 분쟁 같지만 사실상 하나의 전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제가 패전 사실을 숨기느라 이 전투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할힌골 전투는 2차 세계대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할힌골 전투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일제는 북부 타격단 계획을 포기하고 해군을 중심으로 동남아에 진출하자는 남부 타격단 구상에 힘을 싣게 됐습니다. 할힌골 전투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쓰지 마사노부 관동군 참모는 소련에 호되게 당한 뒤로 소련을 공격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미국 침공으로 방향을 선회, 진주만 공습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할힌골 전투 때문에 일제가 소련을 협공하지 않았고 그 덕에 소련은 후방에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전세를 역전, 마침내 독소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스튜어트 골드먼 박사는 자신의 저서 『노몬한, 1939: 2차 세계대전을 이끈 붉은 군대의 승리』(미국해군연구소출판사, 2013)에서 소련이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독일의 소련 침공 시 일제가 호응해 소련이 동서 양쪽에서 전쟁하다 패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할힌골 전투 승리에는 김일성 주석이 이끈 항일부대의 역할도 있었습니다.
당시 만주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김일성 주석은 할힌골 전투가 일제의 소련 침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1939년 8월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에 일제의 후방을 공격해 소련을 지원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북한은 일제의 주요 군사 보급로와 후방 기지를 파괴하는 후방 교란작전이 일제의 소련 침공 저지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산 모범’이라고 평가합니다. (오미영, 「할힌골 전투에 대한 남·북한 역사 인식 비교」, 『몽골학』 제72호, 한국몽골학회, 2023.2., 157~158쪽.)
당시 조선인민혁명군이 할힌골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벌인 전투 가운데 1939년 8월 24~25일 진행한 지린(길림)성 안투(안도)현의 대사하(영경향), 대장강(류수촌) 전투를 대표 사례로 꼽을 수 있습니다. 북한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대사하, 대장강 전투는 일제가 할힌골에 투입할 제6군을 새로 편성하느라 분주하던 시기에 진행한 교란작전으로 이틀 동안 일제 군대 500여 명을 소멸했다고 합니다.
훗날 북한에서 인민무력부장(국방부장관)을 역임했던 최현도 이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지휘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회상기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 주석이 ‘소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는 구호 아래 적 배후 교란작전 방침을 제출했고 이 명령서를 받은 조선인민혁명군 각 부대가 여러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특히 대사하 전투에서 전사한 양형우 14연대 정치위원은 “일제 놈들은 우리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다. 놈들은 지금 소련을 침공하고 있다. 저 원수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자. 소련을 피로써 옹호하자”라고 부대원을 격려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장병들이 어떤 목적과 자세로 전투에 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할힌골 전투 이후에도 김일성 주석이 이끈 조선인민혁명군은 만주에서 계속 관동군의 발목을 잡아 일제가 소련을 침공하지 못하게 방해했습니다. 1945년 9월 소련해군출판사에서 발간한 책에는 “1942년 초 북부조선에서 조선 빨치산들은 일련의 전투 작전으로 22대의 일제 비행기와 2개의 격납고를 파괴하고 2척의 유조선과 92척의 어선을 침몰시켰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에 일제는 관동군의 노조에 쇼토쿠 토벌대 사령관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쫓아 사령부를 옮기고 관동군은 물론 위만군(만주국군), 경찰, 철도경호대, 협화회까지 토벌에 동원해야 했습니다.
또 조선인민혁명군은 정찰을 통해 일제가 소련-만주 국경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소련을 위협했지만 사실 이는 위장이었고 병력이나 무기를 수송하는 척만 했다는 것도 파악했습니다. 이런 정찰 결과를 소련에 전달해 소련이 독일과의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자국 병사를 직접 만주에 투입해 정찰하기에는 외모가 달라 너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찰에 많이 의존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만주는 물론 한반도와 일본까지 침투해 정찰 정보를 수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이 소련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소련, 러시아도 이를 인정합니다. 1945년 9월 소련은 ‘대일 전승 훈장’을 제정해 김일성 주석에게 수여했고, 1946년에는 적기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후 레닌 훈장 2회, 카를 마르크스 훈장 2회 수여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북러관계에서 지원을 주고받은 최초의 경험입니다. 이 사례는 북한이 러시아(소련)의 지원을 받은 게 아니라 러시아가 북한의 지원을 받은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과 즈다노프 정치국 위원의 대화
김일성 주석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945년 여름, 회의 참석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안드레이 즈다노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을 만났습니다. 그는 김일성 주석에게 해방 후 건국을 할 텐데 어떤 지원을 주면 좋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김일성 주석은 ‘소련이 독일과 4년 동안이나 전쟁을 했고 앞으로 또 일본과도 큰 전쟁을 치러야 하겠는데 무슨 힘으로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도와준다면 물론 고맙겠지만 우리는 될수록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한다, 힘들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장래를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역대로 사대주의가 망국의 근원으로 존재해 왔다, 새 조국을 건설할 때는 사대주의로 인한 폐해가 절대로 없게 하자는 것이 우리의 결심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지지다, 소련이 앞으로 국제 무대에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고 조선 문제가 조선 인민의 이익과 의사에 맞게 해결되도록 힘써주기 바란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즈다노프는 “얼마 전에 동유럽의 어떤 나라 사람이 나를 만나자마자 자기 나라는 본래부터 경제적으로 낙후한 데다가 전쟁 피해가 막심해서 난관이 한둘이 아닌데 소련이 큰집이 된 셈 치고 도와주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입장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이것이 바로 동방과 서방의 차이, 해 뜨는 나라와 해 지는 나라의 차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걸 봐도 북한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2015년 북한 대홍수
2015년 8월 22~23일 태풍 고니가 지나가면서 북한의 라선시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대홍수 때문에 40여 명의 인명 피해, 1,070여 동의 주택 파괴, 99동의 공공건물과 철길 51개 파괴, 125정보의 농경지 침수 등 엄청난 피해가 났습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은 2만 5천여 명의 수재민이 발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피해 현장을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당창건 기념일인 10월 10일까지 복구를 마칠 것을 군대에 지시했습니다.
당시 노동신문은 한 외국인이 “정말 10월 10일까지 그 많은 주택 건설을 끝내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장담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라선시는 경제특구로 외국인 사업가도 많이 체류합니다. 노동신문은 한 외국인 사업가가 “대홍수로 거리들이 물에 잠기고 집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선봉지구가 다시 일어서자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겠다고 하며 서둘러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복구 건설을 맡은 한 지휘관은 “우리는 보란 듯이 그 날짜보다 더 빨리 무릉도원을 세워놓”을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남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기 힘으로 뭐든 하겠다는 기질이 뚜렷합니다.
실제로 북한은 8월 27일 복구에 돌입해 한 달 보름도 안 걸려 1,300세대의 주택을 건설하는 등 복구를 끝냈습니다. 그것도 기존의 주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급 주택으로 건설했습니다. 노동신문은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많은 외국인들은 누구나 이런 놀라움을 안고 라선땅이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유심히 보아왔다”라고 소개했습니다.
다른 나라가 북한의 라선시 수해 복구를 지원했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습니다. 현지의 외국인들도 수해 복구에 외부의 지원이 없다는 걸 직접 확인해 알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두 달도 안 걸려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장담한 것입니다. 아마 러시아는 10월 10일 수해 복구 완료 소식을 듣고 광복 직전에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 이상으로 감탄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북한은 수해 복구에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2024년 쿠르스크 전투
북한은 쿠르스크 전투에 북한군을 대규모로 파견했습니다. 심지어 러시아의 요청이 있기 전에 북한이 먼저 지원을 결정했습니다. 이건 명백히 북한이 러시아를 지원한 것입니다.
2024년 8월 6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쿠르스크주를 침공하자 많은 이들이 무모한 작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미국과 서방의 지원을 받아 최정예 부대와 가장 좋은 무기들을 집중해 공격했고,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함부로 부대를 빼 쿠르스크에 투입할 수 없어서 난감한 처지가 됐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순식간에 서울시 면적의 2배를 점령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이 바뀌었습니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쿠르스크에서 모두 후퇴했고 러시아는 거꾸로 쿠르스크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의 수미주를 점령해 완충지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 ▲ 러시아 쿠르스크주 수잔스키군 포그렙키 마을에서 전투를 벌일 당시 장면. 포그렙키 마을에 있는 정교회 건물 앞에서 북한 군인(왼쪽)과 러시아 군인이 포옹을 한 후 손을 흔들고 있다. |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참모총장은 2025년 4월 26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쿠르스크 전투 종료를 보고하면서 “나는 북러조약에 따라 우크라이나 군대를 물리치는 데 상당한 지원을 제공한 북한 군인들의 국경지역 쿠르스크주 해방 참여를 특별히 언급하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북한군이) 높은 전문성, 강인함, 용기, 영웅성을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같은 날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도 텔레그램을 통해 “북한군 장병들은 쿠르스크주에서 우리 군인, 장교들과 같은 참호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며 적 침략자들로부터 러시아 땅을 해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라고 밝혔습니다.
알렉산드르 스테파노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선임연구원도 같은 날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에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은 북한군이 러시아 영토를 해방하는 데 실질적이면서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리나 김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은 “현시점에서 북한 군대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가장 전투 준비가 잘된 군대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무쌍한 전사들이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뛰어난 군사적 기량을 갖춘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군대 중 하나다”라고 증언했습니다.
북한군과의 교전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제225독립강습여단 사령관 올레흐 시랴예프는 “군인들에게 북한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라고 지시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북한군과 교전하면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북한군이 없었다면 러시아가 쿠르스크를 탈환할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북한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정예 공격부대가 됐다”, “빠르게 러시아 공격의 선두 주자로 부상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또 “그들은 신체적 준비 면에서 최고로 잘 준비되어 있다. 그들은 훌륭한 저격수다. 드론과 교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총으로 드론을 격추한다. 부상자를 버려두지 않는다. 항상 후송하려고 노력한다”라며 러시아군과 비교했습니다.
에이피(AP)통신은 1월 12일 자 보도에서 “북한군과 교전해 본 우크라이나 군인은 북한군이 러시아군보다 더 전문적이고 잘 훈련되었으며 매우 체계적이라고 밝혔다”라고 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3월 18일 자 보도에서 “쿠르스크 전선에 잘 훈련된 북한군이 등장하면서 전황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했습니다.
미국 NPR은 6월 16일 자 보도에서 우크라이나 제8특전연대 병사의 증언을 소개했는데 그는 “북한군은 러시아군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신체적으로 준비된 상태였다”, “러시아군에게서 관찰한 것보다 훨씬 더 규율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북한 군인이 목숨을 걸고 들판에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러시아군이 그러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북한군에 관한 정보를 청취한 유용원 국힘당 의원은 “우크라이나 특수작전군은 북한군 5명이 러시아군 10명 전투력과 맞먹을 정도로 높은 전투력을 보유했다고 평가했다. 북한군을 상대해 본 우크라이나 군인의 공통적인 평가는 ▲강인한 체력 보유 ▲20세 어간의 젊은 청년층 ▲공포심이 없음 등이다”라고 전했습니다.
종합해 보면 러시아가 쿠르스크를 탈환할 때 북한군의 지원이 결정적이었으며, 북한군이 러시아군보다 더 우수하다고 합니다. 북한군이 러시아의 지원으로 성장했다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사례를 보면 북한이 러시아를 지원했지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객관적으로 입증됩니다.
심지어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부상한 러시아 군인 수백 명을 북한 요양소와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또 전사한 병사의 자녀를 송도원 국제소년단야영소에 초대했습니다.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는 “우리가 북한 친구들에게 일부 비용이라도 보상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그들은 진심으로 기분 상해하며 다시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물론 양국 관계가 좋기 때문에 기술을 주고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룩한 모든 발전을 러시아의 지원으로 해석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북한은 독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개발
북한의 핵개발을 러시아가 지원했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납니다. 동맹국 사이에도 핵개발을 도와주는 일은 없습니다. 중국도 소련의 방해를 뚫고 자력으로 핵개발을 했고 영국, 프랑스도 미국의 방해 속에서 직접 핵개발을 했습니다. 북한이 한창 핵개발을 할 때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을 규탄했고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결의에도 동참했습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는 5월 29일 기자회견에서 “북한과의 관계는 훨씬 더 일찍 오늘날처럼 구축되고 확립될 수 있었다”라면서 “오랜 시간 우리는 북한이 고립에 빠졌을 때 그저 확립된 규칙(제재)을 따르고 행동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라고 했습니다. 대북 제재에 동참한 걸 반성한 것입니다.
러시아가 북한 핵개발을 지원했다면 대북 제재에 찬성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반성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2024년 3월 13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언론과 대담에서 “북한은 자체 핵우산 갖췄다”라며 “우리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핵개발을 하면서 러시아의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체고라 대사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북한은 핵개발 과정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역방향 지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일본에 의존하는 한국
그렇다면 왜 한국 언론은 북한이 러시아 지원을 받았다고 생각할까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제일 큰 요인은 자기가 큰 나라에 의존하니까 북한도 그럴 것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보입니다. 원래 사람들은 남들도 자기와 비슷할 거로 쉽게 여기기 마련입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기회만 있으면 미국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고마워합니다. 또 많은 국민이 여기에 공감합니다. 때로는 10위권 경제대국이요, 군사력 5위요 자랑하다가도 뒤돌아서는 ‘미국의 지원이 없으면 한국은 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북한도 한국처럼 큰 나라에 기대야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윤석열 정권 시기에 한국이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굴욕적인 노예 계약을 맺은 게 드러나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북미·유럽 등 알짜배기 지역에 핵발전소를 수출할 수 없고, 핵발전소를 수출할 때는 1기당 1조 원에 육박하는 대가를 지급한다는 철저한 불공정 계약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계약의 유효기간이 50년이나 되고 웨스팅하우스가 원하면 5년씩 자동 연장하기 때문에 한국은 영원히 웨스팅하우스의 노예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국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노예 계약을 맺었을까요? 한국에 원천기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만드는 핵발전소는 웨스팅하우스의 가압경수로 기술을 바탕으로 합니다. 물론 국산화를 시도해 2세대 OPR1000, 3세대 APR1400 등의 핵발전소를 개발했고 특히 APR1400은 아랍에미리트에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국산화지 미국 컨버스천엔지니어링의 기술 전수를 통해 2세대 모델을 개발했고 이를 토대로 3세대 모델을 개발한 것이라서 여전히 원천기술은 미국에 매여 있습니다. 또 웨스팅하우스가 컨버스천엔지니어링을 인수하면서 결국 한국의 핵발전소 기술은 웨스팅하우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일부 부품에서 국산화를 이뤘지만 여전히 기술 독립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이후 지금까지 본토에 단 한 개의 핵발전소도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웨스팅하우스는 실제 시공 능력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웨스팅하우스의 실제 주인인 브룩필드 사모펀드는 기술 개발에 관심이 없고 특허를 앞세워 경쟁사를 견제하는 ‘특허 괴물’입니다. 반면 한국은 계속해서 시공 경험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한국이 열심히 핵발전소를 건설하면 웨스팅하우스는 앉아서 특허료를 받아먹으며 배를 불립니다.
한국이 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핵발전소 원천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야 합니다. 즉, 미국 기술을 베끼지 않고 완전히 시작부터 자체 기술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관련 논문을 엄청나게 써야 하고 특허도 굉장히 많이 출원해야 합니다. 많은 시간과 자금,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냥 미국 기술을 도입하는 게 당장은 편합니다. 1978년 고리 1호기가 상업 운전을 시작하면서 한국은 핵발전소 보유국이 되었지만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의 기술 전수에 의존하는 이유입니다.
한국이 자랑하는 반도체는 어떨까요? 삼성반도체,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원천기술 역시 미국 것입니다.
헤럴드경제 2024년 12월 4일 자 기사 「美 입김에 K-반도체 또 흔들…‘원천기술’ 없는 약점이 최대 원인」은 “K-반도체에는 결정적인 무기가 없어요. 양산기술은 있는데 원천기술이 없으니 그걸 가진 국가들이 공급망을 막으면 큰 타격을 입는 거죠”라고 한 시스템반도체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했습니다. 또 다른 업계 전문가는 “한국은 메모리 제조 1위 국가지만, 세계 각국의 원천기술을 받아다가 양산하는 ‘맨 끝단’에 있는 역할”이라며 “소재나 부품, 장비 등 주요 공급망 분야에서 우위를 갖고 있는 국가들이 기술을 안 준다면 오롯이 영향을 다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고성능 메모리반도체의 중국 수출을 통제하는데 한국 기업이 만든 반도체 수출을 미국이 통제할 수 있는 이유도 원천기술 때문입니다. 일단 반도체 설계에 필요한 설계자동화(EDA) 소프트웨어부터 미국 기업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한국 수출 1위 품목인 자동차는 어떨까요? 한국은 오래전부터 자동차 국산화에 국가적 관심을 쏟아 현재 내연 자동차의 국산화율은 95%가 넘습니다. 초기에는 일본의 기술을 배워 만들다가 지금은 거의 모든 부품을 국내에서 생산합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만드는 공작기계와 생산설비의 제어장치 등은 여전히 일본 제품입니다. 우리 기계공업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전기자동차나 자율주행차 등 차세대 자동차의 경우 국산화율이 매우 낮습니다. 대부분 외국의 기술과 부품에 의존합니다.
이처럼 한국이 자랑하는 산업을 보면 자기 힘으로 발전한 게 없습니다. 원천기술도, 자본도, 원료도, 기계도 모두 큰 나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의존을 당연히 여기는 생각이 완전히 굳어진 걸로 보입니다. 그러니 북한도 당연히 큰 나라에 의존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한국
단적인 사례로 독자 핵무장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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