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없으면 만들어 냈던 안기부, 국정원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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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2-27 08:4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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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당시 민주당 홍사덕 후보를 비방하는 유인물을 몰래 돌리다 적발된 안기부 직원들ⓒ자료사진
[기고] 없으면 만들어 냈던 안기부, 국정원의 흑역사
테러방지법으로 당신의 안전이 지켜질 것 같지 않은 이유 손우정 성공회대 연구교수
흑색 선거운동 나선 방첩 요원들
1992년 14대 총선은 3월 24일 치러졌다.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3월 21일 새벽 0시 30분. 강남구 개포1동 주공아파트 앞에서 의문의 사내들이 유인물 4백여 장을 아파트 우편함에 넣다가 발각됐다. 이 유인물에는 당시 민주당으로 출마한 홍사덕 후보에 대한 비방글이 적혀 있었다.
“홍사덕은 아직도 축첩관계를 계속하며 수많은 여성을 울리고 있습니다.”
“홍사덕은 첩을 두고서도 사생아는 팽개치고 3명의 처녀와 6명의 유부녀를 농락한 파렴치한 후보입니다.”
이들을 발견한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은 몸싸움 끝에 지구당사로 연행하여 6시간 반 동안 자술서를 받고 경찰에 넘겼다. 이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안기부 직원이었다. 그 유명한 이른바 ‘안기부 직원 흑색선전물 살포사건’이다. 체포 당시 이들은 도청기와 무전기, 난수표와 함께 5공 인사와 민자당 의원 중 공천에서 탈락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 26명과 장관 등 정부부처 인사 11명, 기타 국영기업체장 16명 등 모두 83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지닌 비밀메모는 이들 4명이 총 12명으로 구성된 팀의 일원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 중 한 명의 소지품에는 ‘주간정세 분석보고서’도 들어 있었다. 안기부가 작성한 이 문건은 ‘내각제 개헌론의 가능성 대두’, ‘현대그룹의 탄원서 제출 배경과 의미’ 등의 항목에서 정치권의 동향과 예상 흐름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사건 발생 직후 안기부는 이들이 안기부 직원인 것은 맞지만 흑색선전물 살포는 안기부와 무관한 일이라고 발뺌했다. 당사자들은 ‘거절할 수 없는 친구의 부탁’으로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 ‘친구’가 누구였길래 혼자도 아니고 최소 12명이 짝을 지어 움직였을까? 이 문제를 규명할 책임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1부는 이들의 직속상관 1명만을 조사했고 그 이상의 조사는 하지 않았다. 검찰이 늘어놓은 변명은 이랬다.
“안기부는 필수불가결한 국가기관이므로 더 이상의 해부는 결코 국민들에게 이로울 게 없다.”
1992년 5월 8일, 드디어 첫 공판이 열렸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 사건에서 검찰이 던진 질문은 공소사실을 확인하는 단 세 가지, 검찰심리에 걸린 시간은 모두 3분이었다. 언론은 ‘번개공판’이라 칭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공판이 된 이날, 검찰의 구형도 한꺼번에 이뤄졌고 결국 이들은 며칠 뒤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블랙코미디는 재판 이후에도 이어졌다. 검찰은 자신의 구형 수준에 맞춰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에 항소하기 어렵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안기부 직원들이 ‘억울하다’며 항소 입장을 밝히자 허둥지둥 항소에 나섰다. 물론 항소심의 과정과 결과 역시 1심과 다르지 않았다.
눈여겨볼 부분은 이들의 소속이 안기부 내 ‘대공수사단’이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의 공작에 대응하거나 국내로 잠입한 간첩을 수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총선 직전 한밤중에 야당 후보를 모략하는 유인물을 몰래 살포하다 발각된 것이다. 안기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흔적은 여기 저기 남아 있었다. 안기부 직원들이 흑색 유인물을 돌리다 잡히기 2일 전인 3월 18일, 국민은행 목동지점에는 안기부 계좌가 개설되었으며, 하루 뒤인 19일, 29억 원이 입금되자마자 출금되었다. 체포된 직원들이 가지고 있던 10만원권 수표 6장도 여기서 인출한 돈이었다.
당시 검찰은 수사과정에서 이 계좌를 확인했으면서도 체포된 안기부 직원에게 이 사실을 추궁하지 않았음이 후에 밝혀졌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1부 검사는 김수민으로, 그가 22년 뒤인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 국정원 2차장에 임명되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국정원 2차장은 대북, 대테러, 방첩 등 대공업무를 지휘한다. 그리고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은 그 유명한 정형근이다.
뒤에 국회의원이 된 정형근은 김대중 정부 들어 당시 사건의 실질적인 지휘자였다는 전직 안기부 직원의 증언이 나와 곤경에 처했고, 그 스스로는 2002년 국정원이 휴대전화를 도청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형근의 폭로 사건을 조사하면서 ‘휴대폰 도청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리고 사건을 종결시킨 사람은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 부장검사였던 현 국무총리 황교안이다. 그러나 그가 사건을 최종 무혐의 처리하자마자 발생한 ‘삼성X파일 사건’에서 휴대전화 도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실수사 논란에 휩싸였다.
이 일들은 사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에 발생한 일이다.
진상 드러나도 솜방망이 처벌... 되풀이 되는 선거개입
흑색선전물 사건으로 안기부는 여론의 호된 질책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바로 같은 해 있는 대선을 앞두고 부산 초원 복집에는 김기춘 전법무부장관과 안기부 지부장을 비롯해 이 지역 시장, 경찰청장, 기무사 지대장, 교육감, 지검장,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모여 선거대책을 논의 했다. “우리가 남이가”,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냐 하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자”, “민간에 지역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음됐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도청을 한 국민당 관계자만 사법처리를 받았다. 당시 이 사건 담당 검사는 박근혜 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역임한 김진태고, 담당 부장검사는 박근혜 정부에서 ‘본의 아니게’ 최장수 총리가 된 정홍원이다.
이후에도 유사한 일은 계속됐다. 1996년 4.11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북의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과 관련, 1997년 <시사저널>은 안기부 특수공작원들이 대북 공작 와중에 접촉한 북한 대남 공작수뇌부와의 대화 녹음 테이프에 대북식량과 물자 지원을 대가로 무력시위를 요청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법원은 총풍 사건의 주범에 대해 “북한에 무력시위를 요청하기로 모의했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당사자는 검찰과 법원에서 자신이 무력시위를 요청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19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서도 북풍 사건이 일어났다. 안기부의 사주를 받은 재미교포 윤홍준씨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취지의 허위사실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이 사건 수사는 1998년 3월 21일 검찰 수사 중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 화장실에서 자살을 시도하면서 흐름이 크게 바뀌어 증거가 명백한 권 전부장과 사건을 주도한 203실(해외공작실) 소속 직원 5명, 그리고 윤홍준씨만 구속됐다.
당시 203실을 지휘한 안기부 2차장은 사건 당시 대만에 체류 중이었다는 이유로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최근 윤홍준이 기자회견을 한 1997년 12월 11일 국내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검찰은 안기부 2차장이 “윤 씨의 기자회견 공작을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안기부 2차장이 바로 김기춘의 뒤를 이어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병기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쭉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간첩과 테러범을 잡는다던 정보요원들이 끊임없이 국내 정치와 선거에 개입했으며, 간혹 어렵게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도 책임자는 처벌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건 당사자는 물론 솜방망이 처벌을 방조한 이들은 이후에도(특히 현 정부에서!) 승승장구 했다는 사실이다. 일벌백계로 처벌받지 않았으니,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벌어졌던 국정원의 노골적인 선거개입 역시 핵심 증거가 드러났어도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정보기관과 사법기관의 이런 ‘특수’ 관계의 재현이라 할 만하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처벌 의지를 가졌던 검찰총장마저 ‘찍어내기’에 물러나고 수사 관계자가 줄줄이 좌천된 상황에서 추진되고 있는 테러방지법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지를 상상하기란 상당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공안기관이 비대해지면 벌어질 일들
테러방지법은 이처럼 과거에 대한 성찰과 반성, 국가 범죄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추진되고 있다. 공안기관이 비대해질 뿐만 아니라 권한까지 확대될 것이 분명한 테러방지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인가?
우리 역사에서 ‘조작 간첩’ 사건이 급증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 이후 ‘지능화’될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 확대되는 시국사범을 상대하기 위해 법대 출신 대공수사 요원을 1천명이나 늘릴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천명을 다 뽑지 못하고 7백명 정도 늘려 놨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70년대 들어 북의 대남정책이 바뀌면서 남파간첩의 수가 확 줄었다는 점이다. 공안기관은 비대해졌지만 ‘건수’가 줄어든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조작 간첩’의 대량생산이었다. 고문과 가혹행위로 만들어진 간첩들은 남은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이들을 간첩으로 만든 이들 중 처벌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며 대부분은 오히려 탄탄대로를 걸었다.
반성 없는 역사는 반복된다 했는가? 지난 해 최종 판결이 끝난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에서 증거 조작에 가담한 이인철 전 선양주재 영사는 2007년 국정원에 설치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파견 근무한 전 국정원 직원으로,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인 인혁당 사건의 조사 담당이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한다는 과거사위에서 조작 사건을 조사했던 이가, 다시 간첩 조작에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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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유예도 과하다며 검찰도 은근슬쩍 포기한 ‘항소’를 외친 1992년 안기부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의 피고들처럼, ‘적반하장’도 되풀이되고 있다. 국정원이고 뭐고 간에 인간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민망한 댓글을 여기 저기 뿌리고 다닌 ‘좌익효수’는 지난해 12월 열린 첫 재판에서 사실관계는 모두 인정하지만 “국정원 직원의 특정 정당·특정인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위반 시 7년 이하 징역 및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한 국정원법 9조2항4호 등은 위헌”이라며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명백한 잘못에도 ‘뭐가 잘못이냐’를 외치고, 솜방망이 처벌에도 ‘가혹하다’고 발끈하는 심리상태를 가진 이들에게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 테러방지법까지 쥐어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국회에서 진행되는 필리버스터가 정말 심각한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는 테러방지법을 ‘방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법이 통과되었을 때 벌어질 일들은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책상을 백번이라도 탁탁 내리치면서 ‘테러방지법 결사반대’를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손우정 연구교수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학살, 고문, 간첩조작, 부정선거 등 국가권력을 활용해 헌법을 파괴해온 이들을 기록하려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기획조사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시민여러분의 소중한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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