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호 석 기자 민플러스 12월 17일 서울
“어디서든 말조심해라, 까닥하다 잡혀갈라”는 부모님의 당부를 듣고 자랐다. 하긴 유신독재 시절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해 5‧6공 군사독재와 함께 한 청춘이었으니 괜한 잔소리로 치부하기엔 시대가 너무 암울했다. 더구나 나의 습관적 반골 기질을 부모님이 어찌 몰랐으랴.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흔히 군사독재라고 불렀다. 단지 군인 출신이 행정부와 입법권을 장악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군사정권에 굳이 독재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국민이 선거한 공직자 위에 이들 군인 출신들이 군림했기 때문이다.
군사독재 시절 국회의원들은 자신을 선거한 국민 대신 군부세력에 의해 조종당했다. 국민의 눈보다 군부의 총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할 당시 국회의사당 안에 차지철을 비롯한 군부세력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국회가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하자,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해 광주학살을 감행하고 김대중 당시 야당 총재를 구속했다. 급기야 국회를 해산시켰다. 전두환은 “국회라는 게 국가발전에 장애가 된다”며 ‘국회무용론’을 폈고, 제도 언론은 ‘땡전뉴스’(9시 땡치면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하는 뉴스가 나와서 붙여진 이름)로 맞장구를 쳤다.
그랬으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대한민국은 군부공화국이다”로 둔갑했고,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군부로부터 나왔다. 그때를 군사독재 시절이라 부른다.
군사독재가 종말을 고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30년 세월이 흘렀다.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끼리 모여 그때 그 시절을 추억처럼 회고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군사독재라면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이때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독재권력과 마주하고 있다. 이번엔 군인 대신 검찰의 등장이다.
군사독재 시절, 총이 정치를 대신했다면 검찰독재에 와선 법이 그 자리를 차고 앉았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압수수색과 구속영장이 판을 친다.
군사독재가 총을 찬 군인 출신들의 ‘무법천지’였다면 검찰독재는 정치권력을 쥔 검사 출신들이 법치를 독점한 ‘유법천지’가 돼 버렸다.
‘누구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라는 명분을 앞세워 야당을 탄압하고,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유포해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다.
군사독재 시절에도 못한 제1야당 당사를 그것도 3번이나 털었다. 정부가 한 약속을 지키라는 노동자의 외침에 손배가압류라는 악법을 적용해 목을 조인다.
‘법 대로 하겠다’는데 뭐라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설사 작은 잘못에 큰 처벌을 받는 억울함을 겪어도 별도리가 없다. 당하지 않으려면 권력에 밉보이지 않아야 한다. 죄를 안 짓는 것보다 검찰독재에 잘 보여야 살아남는다.
군사독재 시절 총이 그랬던 것처럼 검찰독재 하에서 법은 만능의 보검이다. 말 그대로 무소불위(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에도 없음)의 권력을 자랑한다.
군사독재 시절엔 총이 겁나 말은 못 했어도 그들이 독재권력이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다. 그래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을 민주투사로 칭송하고, 민주세력이라고 남몰래 도왔다.
하지만 검찰독재 하에서는 권력에 맞서다 기소되는 순간 파렴치한 양아치 신세가 되고 만다. 그의 억울함을 변론이라도 하는 날엔 도매금으로 넘어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 일쑤다.
법이 정의고 기소가 곧 판결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따윈 권력의 시녀가 된 언론의 막강한 힘 앞에서 맥없이 무너진다.
며칠 전 기자인 아들에게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왔다. “말조심 하라”고. 30년 전처럼 또 잡혀갈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아흔을 앞둔 어머니 눈에도 현 정권이 독재로 보이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