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일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텔레비전>이 2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받침대를 들고 서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연합뉴스
허위로 판명된 ‘김정은 신변 이상·사망설’이 아니더라도 70년 남북관계사에서 ‘북한 가짜뉴스’의 흑역사는 고질병에 가깝고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86년 11월16일치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김일성 피격설’이 가장 유명하다. 김일성 주석은 보도 이틀 뒤 평양 순안공항에 나타나 ‘가짜뉴스’를 몸소 부인했다.
범위를 2012년 이후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기로 좁혀도 나라 안팎의 언론이 합작해 산 사람을 죽이거나 멀쩡한 사람을 숙청됐다고 한 사례가 숱하다. 이런 가짜뉴스의 생산·전파·증폭엔 흐름이 있다. 첫 보도의 근거는 대부분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북한 내부 소식통’이다. 조선일보 같은 국내 매체가 선도할 때가 많은데, <시엔엔>(CNN) 등 세계적 외신이 나서거나 정부가 개입하면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폭발적으로 전파된다. ‘북한 소식통(또는 탈북민)→국내 언론→외국 언론→국내 언론→정부·정치인·탈북민’ 등의 경로를 거치며 무한복제되는 것이다. 허위보도라는 사실이 드러나도 정정보도나 사과가 거의 없다는 점도 눈에 띈다.
김영철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오른쪽)이 4월1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 참석해 주석단에 앉았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조선일보는 2019년 5월31일치 1면에 “김영철은 노역형, 김혁철은 총살”이란 기사를 냈다. 근거는 단 한 명의 “북한 소식통”이다. 교차 확인은 없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2018~2019년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과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 성사에 기여한 ‘김정은 대리인’이라, 사실이라면 중대 사태이므로 다수 언론이 ‘김영철 숙청설’을 뒤따라 보도했다. 하지만 김영철 부위원장은 이틀 뒤인 2019년 6월2일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군인가족예술소조공연’을 관람해 ‘노역형’이 사실무근임을 간접 확인했다. 조선일보는 2013년 8월29일 “김정은 옛 애인(현송월) 총살”을 보도했는데, 현송월은 2014년 5월16일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에 참석해 생존을 확인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 전 경공업부장(오른쪽 파란 원 안 여성)이 1월25일 삼지연극장에서 진행된 ‘설 명절 기념공연’을 김 위원장 부부와 함께 관람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이번 ‘김정은 신변 이상·사망설’ 확산의 결정적 방아쇠 구실을 한 시엔엔은 2015년 5월11일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인 김경희 전 경공업부장이 “2014년 5월 독살됐다”고 보도했다. 보도 근거는 역시 정체를 확인할 길이 없는 “고위 탈북자”였다. <티브이조선>과 <채널에이(A)>가 ‘뉴스특보’를 내는 등 파장이 컸다. 김경희는 지난 1월25일 김정은 위원장 부부와 함께 ‘설 명절 기념공연’을 관람해 생존을 확인했다. 시엔엔 보도 이후 4년 8개월 만이다.
정부가 오보 생산의 발원지일 때도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발표한 2016년 2월10일 오후 통일부 출입 기자들한테 “이영길 인민군 총참모장 처형” 문건을 나눠줬다. 리영길은 석 달 뒤인 2016년 5월7~8일 노동당 7차 대회에서 중앙군사위원에 선임돼 생존을 확인했다. 박근혜 정부가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민군 총참모장 처형’설을 언론에 직접 흘린 건 몇 시간 전 발표한 ‘개성공단 전면 중단’ 결정에 쏠릴 비판적 시선을 억제하려는 ‘공작’에 가까웠다.
지난해 11월8일 오후 해군이 동해상에서 북한 목선을 북쪽에 인계하고 있다. 이 목선은 지난해 11월2일 우리 해군에 나포됐으며, ‘16명의 동료 승선원을 살해하고 도피했다’고 자백한 20대 북한 선원 2명이 타고 있었다. 탈북 선원 2명은 전날 북한으로 강제 추방됐다. 통일부 제공
탈북민 이애란씨가 대표인 인터넷 매체 <리버티코리아포스트>는 2019년 12월17일, 정부가 오징어잡이배에서 동료 선원 16명을 죽인 혐의로 북송(2019년 11월7일)한 북한 선원 2명이 “살인과 무관한 탈북 브로커(알선책)”라고 보도했다. 근거는 역시 ‘북한 소식통’이었다. 보도 다음날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은 탈북민들과 기자회견을 함께 하는 등 정부를 ‘살인정권’이라 맹비난했다. 리버티코리아포스트는 지난 2월18일 “정정보도문”을 실어 애초 보도가 잘못됐음을 인정했다.
북한 관련 보도에 유독 ‘아니면 말고’식의 가짜뉴스가 쏟아지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북한을 상대로 한 현지 취재나 당국자 직접 취재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현실이 ‘면책 사유’로 악용된다.
둘째, 오보에 따른 정정보도나 손해배상 등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아니면 말고’ 보도를 부추긴다.
셋째, 북한과 관련한 (무)의식적 경멸·증오·편견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엔 유튜브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기반으로 한 ‘1인·소수 매체’가 뿌리 깊은 반북 여론에 편승해 무리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김정은 신변 이상·사망설’ 논란 와중엔 <조선중앙텔레비전>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 동영상을 교묘하게 짜깁기해 ‘김정은 장례식’이라 주장한, 의도적인 가짜뉴스 생산·유포가 광범위하게 이뤄졌을 정도다. 일부 탈북민 단체들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경쟁적으로 미확인 ‘북한 소식통’발 주장을 쏟아내는 현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북한 관련 가짜뉴스의 폐해는 심각하다. 무엇보다 분단·무역국인 한국에 ‘김정은 신변 이상·사망설’은 그 자체로 ‘한반도 위험’(코리아 리스크)을 높여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시엔엔의 ‘김정은 위중’ 보도 당일 주가가 한때 2.99%포인트나 떨어지고, 원-달러 환율이 9.2원 급등한 건 ‘사소한 파장’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해 불필요한 혼란과 비용을 초래한다. 북쪽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부의 남북관계 상황 관리와 개선 노력에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이제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