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 중인 김호(49) 씨에겐 최초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문재인 정부 최초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 국가보안법 최초 경제 관련자 등 범상치 않은 이력이 눈길을 끈다.
“미국의 대북 제재가 나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한 이유”라고 주장하는 김호 씨는 5월 11일 판결을 앞두고 돌연 문재인 대통령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김호 씨 취재를 더 미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4월의 봄 햇살이 내리쪼이는 금요일 오후 한적한 식당에서 IT(정보통신) 사업가 김호 씨를 만났다. 그는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기 직전 군사기밀을 북한(조선)에 건넨 혐의로 구속기소 돼 1심에선 무죄, 2심 고등법원에선 유죄 판결을 받고,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냐? 대북 제재 위반이냐?
김호 씨는 국정원과 검찰이 자신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지만 이념 문제가 아닌 대북 제재 문제를 다뤘다고 기소 과정을 떠올렸다.
2018년 8월 검찰은 김호 씨가 북한(조선)이 개발한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상업화하면서 수억 원의 개발비와 군사기밀을 북에 건넨 혐의로 기소하고, 김호 씨의 재산을 몰수했다. 검찰이 적시한 혐의는 자진지원, 금품수수, 편의제공 등이다.
공소사실만 보면 대북 제재 위반으로 보인다.
김호 씨는 구치소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소식을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고 당시 심경을 털어 놓았다.
문 대통령은 ‘9월평양공동선언’에서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철도‧도로 연결 등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를 약속했고,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설치해 군사정보뿐만 아니라 군대교류까지 합의했다.
“이런 합의를 하러 평양으로 떠나면서 ‘대북 지원’, ‘군사기밀 누설’ 혐의로 나를 구속했다고?”
‘내국인을 대북 제재 위반으로 기소할 수 없으니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대북 제재에 악용된 국가보안법
자유민주주의의 최고 가치인 사유재산까지 부정하면서 김호 씨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기소한 이유는 무엇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김호 씨의 구속 이유를 찾기 위해 가설을 설정해 보았다.
“남북 경제교류를 대북 제재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문재인 정부가 9월 평양을 방문한다. 이에 미국은 대북 경제사업 일선에 있는 김호 씨를 구속함으로써 문 대통령이 평양에서 대북 제재를 위반하지 못하게 남북합의의 가이드라인(규제범위)을 제시한 경고성 메시지를 날린 것”
가설을 듣고 난 김호 씨는 “문빠(문재인 지지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라고 일갈했다.
그렇다면 김호 씨는 자신이 왜 구속됐다고 생각할까? 김호 씨는 대북제재와 관련 있지만 미국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가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김호 씨를) 수사한 당시 국정원은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을 주도한 서훈이 원장이었다는 점, 한-미 워킹그룹처럼 문재인 정부를 직접 장악 통제할 다른 수단이 많다는 점으로 볼 때 무리해서 미국이 구속을 주도할 리 없다. 오히려 방북을 계획한 문재인 정부가 (김호 씨를) 구속함으로써 대북 제재에 충실한 모습을 미국에 전하는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김호 씨 구속을 미국이 주도했냐, 문재인 정부가 주도했냐’를 두고 설전이 오갔지만 정황만 있을 뿐 입증할 만한 근거는 어느 쪽도 제시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할 특별한 이유
김호 씨는 문재인 대통령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검찰이 문 대통령을 기소할 리 없지만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해 고발장을 제출했다”라고 말문을 연 김호 씨는 “180석에 달하는 민주당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않는다면 민주당 국회의원을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김호 씨가 국가보안법 철폐에 전력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김호 씨는 국가보안법만 철폐되면 대북 제재가 아무리 강화돼도 남북 경제교류를 재개할 수 있다고 본다.
김호 씨의 주장에 따르면 많은 기업가가 대북 제재가 무서워서 북한(조선)과 경제 교류를 안하는 게 아니라 국가보안법 때문에 못한다. 국가보안법만 사라지면 기업인들의 대북 투자는 당장 봇물이 터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제정했다는 국가보안법이 이제 사유재산까지 침범해 대북 경제교류를 차단하는 데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2시간여 인터뷰가 끝났을 때 문득 ‘김호 씨 구속을 누가 주도했냐’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남북 경제교류가 대북 제재 때문에 재개되지 못하는지, 아니면 국가보안법 때문에 안 되고 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어쩌면 이 답을 아는 문재인 정부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