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일보> 창간호. <민족일보> 창간호. | |
ⓒ 이철우 |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국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일이었다. 국내는 계엄령과 중앙정보부, 반공법 제정 등으로 다스리면 되는데 문제는 미국이었다.
그는 군에서 오랫동안 정보업무에 종사했기에 한국 정치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훤히 꿰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은 과거 좌익에서 활동을 했던 전력이 있었다.
박정희는 민주당 정부 각료와 군부의 이른바 반혁명세력 그리고 혁신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구속했다. 민주당 각료들과 군부내 라이벌을 제거한 것은 이들의 재기를 막기 위한 조처였지만, 혁신계의 일망타진은 다분히 미국을 겨냥한 처사였다.
'혁명공약' 제1항에 '반공국시'를 내건 것도 박정희의 좌익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박정희 군부는 5월 16일 거사 직후부터 혁신계 인사들의 체포작전에 돌입하여 19일에는 '용공분자 930명', 22일에는 '용공분자 2천 1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미국무성은 그때에야 "한국의 사태는 고무적"이라며 쿠데타에 사실상의 지지를 표명했다. 미국의 지지에 고무된 쿠데타측은 이어서 4천여 명에 이르는 혁신계 인사들을 검거했다고 '전과'를 속속 발표했다. 그럴수록 미국의 신뢰는 두터워져갔다.
쿠데타 세력이 구속한 4천여 명 중에는 진짜 간첩이나 용공분자가 섞여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4월혁명 공간에서 진보ㆍ혁신의 기치를 내걸고 활동을 했거나 과거 남북협상 또는 평화통일운동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6ㆍ25 전쟁기에 용케 살아남은 보도연맹 관계자들도 포함되었다.
박정희는 미국도 놀랄 수준의 '빨갱이 사냥'으로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진짜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도 아니었다.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빨갱이로 때려잡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순전히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세탁시켜주는 용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다. 그 어이없는 게임의 최대 희생자 중 한 사람이 바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였다. (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 1960년대편 1권>)
▲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생전 모습. | |
이승만 시대에 잔뜩 움츠렸던 언론이 4월혁명에 무임승차하면서 기세를 올리고, 자유화 바람을 타고 유명 무명의 각종 언론사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여 사이비 기자들의 민폐가 심각한 형편이었다. 조용수의 처형은 이런 상황에서 선택된 '스케이프 고오트'였다.
5ㆍ16쿠데타가 일어난 지 4일만인 5월 19일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에 폐간을 통보함과 함께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8명의 간부를 구속했다. 조총련계에서 1억 환의 불법자금을 들여와 신문사를 만들고 북한 괴뢰집단에 동조해왔다는 이유였다.
▲ 민족일보 3 조용수 선생이 정당함을 밝히는 옥중 편지 | |
ⓒ 통일 뉴스 |
51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재일거류민단 조직부차장으로 활약, 조총련계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재일교포 북송 때는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했다.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ㆍ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ㆍ윤길중ㆍ고정훈ㆍ김달호ㆍ이동화ㆍ송지영ㆍ이종률ㆍ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르키는 신문
민족일보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민족일보>는 창간 때부터 시련이 따랐다. 진보적 논조 때문이었다. 장면 민주당 정부가 인쇄소 계약을 해지시켜 3일간 휴간한 뒤 3월 6일자로 속간할 수 있었다. 신문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민주당 정부의 2대 악법제정과 부정선거 원흉 등의 재판 지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신문은 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혁신계의 주장과 논리를 대변했으나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 민족일보 1 1961년 8월 28일 오라에 묶여 법정에 들어가는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송지영 (왼쪽부터) | |
ⓒ 연합뉴스 |
조용수는 그가 일본에 있을 당시인 59년 8월 중순경, 대남 간첩인 이영근과 접선하여 소위 혁신세력의 규합 및 위장평화통일 주장의 지령을 받고 귀국한 후, 이(李)로부터 전후 1억 6백만 환의 공작금을 받아 윤길중ㆍ서상일ㆍ고정훈ㆍ최근우 등 혁신계 인물들과 활동하는 동시에,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하여 북한 괴뢰의 주장과 동일한 언론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조용수 외의 피고 12명은 모두 <민족일보>의 사시결정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자이거나, 조와 이영근 간의 자료 수수를 담당한 자들이다.
검찰이 제기한 <민족일보>의 창간 자금은 조총련이 아니라 국내 혁신계 인사들로부터 지국설치 보증금 형식으로 모은 것이었다. 훗날 노태우 정부가 간첩이었다는 이영근에게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문화장을 줄만큼, 이영근을 통한 조총련계의 불순자금 유입설은 날조된 기소장이었다.
8월 28일 열린 혁명재판 2심재판부 김홍규 대령은 "민족일보가 평화통일, 남북협상 등 반국가단체 북한괴뢰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주장에 고무ㆍ동조했다"는 등의 혐의로 조용수ㆍ안신규ㆍ송지영에게 사형, 다수의 간부들에게는 무기 등 중형을 선고했다.
조용수는 장문의 상고이유서를 냈으나, 10월 31일 열린 상고심은 문석해ㆍ선우주ㆍ정기순ㆍ양회경ㆍ이존웅ㆍ계철순 재판관이 배석한 가운데 전우영 재판장은 상고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변호인의 변론도 없이 진행된 재판이었다.
조용수는 61년 12월 21일 오후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32세의 짧은 나이에 이 땅에서 처음으로 진보 정론지를 발행하다가 창간한 지 100일도 못되어 쿠데타를 맞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민족일보 창간호 | |
ⓒ 민족일보 |
형이 집행되기 전 국제펜클럽과 국제신문인협회 등의 항의전문이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구명운동이 제기되었으나 다수의 국내 언론이 침묵한 가운데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12월 20일 사형을 확인한 다음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61년 1월 13일 국제저널리스트협회는 61년도 국제기자상을 추서했다.
조용수의 사형집행 후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던 송지영은 감형이 거듭되어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의 전국구의원,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 등을 지내고, 다른 인물들도 송지영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조용수 처형과 <민족일보> 폐간으로 박정희의 목표가 '훌륭하게' 달성되었기에 나타난 기이한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