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야기85]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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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2-19 19:5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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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이야기85] 안장왕의 사랑이야기 12
이용섭 기자 : ⓒ 자주시보
참고로 본 연재를 애독하시는 독자들에게 먼저 고구려 제22대 안장왕의 사랑이야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가 연재하는 <우리역사이야기>는 수많은 관련 사서들을 비교, 분석하여 왜곡되고, 삭감되고, 삭제되어 도대체 그 역사적 사실들이 어떻게 이어여 왔는지를 알 수 없는 오늘날 우리 조상들의 상고대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조상들의 역사를 후세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학술적 차원에서 이루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 “고구려 제22대 안장왕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고구려의 건국과정, 백제의 건국과정을 고증하고 논증하여 고구려, 백제의 건국과정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또 양국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민족, 사회,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그 뿌리와 줄기가 하나임을 밝히자는 목적에 의해서 연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야기”라는 종자를 통해 그 사랑 이야기가 싹틀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규명하며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는 비록 나라는 달리하지만 민족은 하나라는 것을 고증, 논증하는 작업이다. 이 점을 잊지 않고 연재를 읽어주시길 바란다.
⓹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의 고구려 건국기사
단재 신채호 선생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에서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보다는 좀 더 구체성을 띄고 있으며 비록 북부여와 동부여의 건국 그리고 도읍지의 이전으로 인한 나라의 이전 등이 약간의 혼선을 빚고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건국이 북부여에서 동부여,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그 관련성이 있음을 고증하고 있다. 또 하나 단재 선생이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은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고구려라는 나라의 뿌리와 줄기가 하나라는 사실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단재 선생이 언급한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사는 비교적 그 분량이 방대한 편이다. 분량이 방대해도 어차피 고구려 건국과 백제와의 관련성 등을 고증하고 논증하기 위해서는 전문을 인용하도록 한다. 또 단재 선생이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 다루었으니 어차피 고구려 건국과정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양 부여를 언급해야만 하기에 이번 연재에서 다루고자 한다.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 모르거나 다루지 않는다면 고구려 건국과정을 결코 명확히 밝힐 수가 없다.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의 동천과 해모수의 등장
북부여와 양 동부여(동북부여와 동남부)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진조선>의 판도 내에 세워진 나라들이다. 그러나 <진조선>이 멸망하여 부여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분열하여 위의 상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부여는 곧 <진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란 왕조가 없이 <진조선>으로부터 위의 상국이 되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고찰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진조선>이 흉노 모돈에게 패할 때가 기원전 200년경이고, 동·북 부여의 분립도 기원전 200년경이니 후설이 혹시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57쪽>
고구려 건국에 관한 <한단고기>의 기사를 인용할 때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하여 상세히 다룰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위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기사에 과해 환돤고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잘못된 부분은 바로 잡고, 또 단재 선생이 비록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를 접하지 않았지만 정확히 추론을 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북부여와 양 동부여 고구려 네 나라는 진조선의 판도내에서 세워진 나라들이다.”라는 단재 선생의 고증은 정확하다. 이에 대한 한단고기의 기사를 간략히 보도록 하자.
“임술 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단군 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다.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례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계해 2년(B.C 238) 이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이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으로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주해 정신세계사 125쪽>
위 인용된 한단고기는 고려 휴애거사 범장이 지은 북부여기의 북부여 시조 단군 해모수에 관한 기사이다. 위 인용문을 보면 해모수가 <후 박달나라> 제 47대 고열가 단군을 이어 북부여를 건국하였음을 알 수가 없다. 해모수가 <후 박달나라> 마지막 임금이 고열가를 이어 북부여를 건국하였다는 사실은 바로 진조선으로부터 북·동부여와 <남부여기> 등을 두 나라와 고구려가 세워진 나라들이라는 단재 선생의 고증을 증명해준다.
또한 단재 선생은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라고 북부여가 아사달 즉 진조선에서 존재하였음을 고증하였다.
이는 후박달나라에서 북부여로, 또 북부여에서 동부여, 동부여가 동북부여, 남동부여로 분국이 되었으며, 북부여를 이어 고구려가 건국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 상세한 결론은 고구려 건국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인용한 후 종합적으로 내릴 것이기에 여기서 그친다.
둘째, 단재 선생 역시 북부여에 대한 자료를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위에서 보았듯이 북부여가 진조선의 판도내에서 세워졌고, 아사달에서 건국하였다라고 하였지만 그 이상이 자세한 고즈을 하지 못했다. 단재 선생이 북부여에 대한 사료를 접하여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러나 진조선이 멸망하여 부여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분열하여 위의 삼국(북부여, 동북부여, 남동부여)이 되었는지 아니면 부여는 곧 <진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란 왕조가 없이 <진조선>으로부터 위의 사국이 되었는지, 이에 대한 고찰할 근거가 없다.”라는 내용이 이를 증명해준다.
더하여 “그러나 <진조선>이 흉노 모돈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경이고 동·북부여의 분립 또한 기원전 200년경이니 후설이 혹시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라고 하는 대목을 보면 북부여·동부여의 성립과 동부여의 분국관계에 대해 명확히 고증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부여는 곧 <진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란 왕조가 없이 <진조선>으로부터 위의 삼국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추론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라는 데에서 단재 선생이 북부여와 동부여의 분립관계에 대한 사료를 접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일단 여기서는 <후 박달나라> 마지막 임금인 제 47대 고열가 단군을 이어 해모수가 진조선의 자리엣 북부여를 건국하였으며 북부여 제4대 단군 고무루의 아들 해부루가 나라를 들어 제5세대 단군으로 등극한, 고두막한에게 항복을 한 후 가십원 혹은 분능이라는 곳으로 옮겨와 동부여를 건국하였다.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한 시기는 단재 선생이 진조선이 흉노 모돈에게 패하였따고 하는 기원전 200년경이 아니고, 기원전 86년 을리년이다. 여기서는 이정도까지만 언급을 한다. 다만 북부여와 동부여의 건국은 고구려 시조인 고추모의 탄생 연대와 고구려의 건국 시기 그리고 고추모 이후 고구려 존속시기 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 존속시기, 고추모의 탄생시기 등을 알기 위해서는 북부여, 동부여의 역사적 사실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이다. 북부여는 곧 고구려요, 동부여의 존재는 고추모의 탄생 그리고 성장과정과 고구려 건국 시기를 정확하게 밝혀주기 때문이다.
그럼 단재 선생의 동북부여의 분립에 대해 고증한 내용을 인용하기로 한다.
전사에서는 동·북 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이름난 산천을 찾아다니며 아들 낳기를 기도하였다. 곤연(원주)에 이르렀을 때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에,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어 보니 누런 황금색 개구리 모양의 아이가 있었다. 이를 보고 왕이 말했다. ‘이는 하늘이 주신 나의 아들이다.’
그리고는 그를 데려와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라 부르고 태자로 삼았다.
그 뒤 얼마 후에 대신 아란불이 왕에게 고하기를 ‘최근에 천신이 내려와서 이르기를 이 땅에는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도록 하고자 하니 너희들은 피하여 동해가의 가섭원으로 가거라. 그곳은 토질이 오국 농사에 적합하니라.’고 하였나이다 고하면서 천도하기를 청하였다.
부여왕이 그 청원을 좇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구호를 동부여라 하고 고도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수행원 1백 여 명을 흰 고니를 타고 웅심산(지금의 하얼빈의 완달산)에 내려왔는데 이 때 머리 위에는 오색구름이 뜨고 구름 속에는 음악소리가 들렸다. 해모수가 10여 일만에 산에서 내려와서 새 깃(다른 사료들에게는 까마귀 깃털로 되어 있다)을 꽂은 관을 쓰고 용의 광채가 나는 칼을 차고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천제의 아들이라 불렀다."
<조선상고사, 단채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157~158쪽>
이상은 단재 선생이 조선상고사에 기록한 북부여에서 동부여로 분립되는 과정이다. 이미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단민사, 신단실기 등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 기사들을 다룰 때 여러 차례 간략히 언급을 하였지만 단재 선생 역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화하족들이 남긴 단편적인 기록들을 참조하다 보니 다른 사서들이 안고 있는 모순과 혼선을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북부여·동부여를 다루는 것이 아니기에 상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 재 선생이 인용한 동부여 분립기사 내용에서 선후에 관해서만 언급을 하고자 한다. 사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단민산, 신단실기 그리고 위 단재 선생의 북·동부여가 분립을 어떤 과정을 거쳐 하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우선 위 동부여의 분립기사들을 북부여 기록과 동부여에 관한 기록으로 정리하여 보도록 한다. 북·동부여의 역사에서 북부여가 건국이 되고 약 153년 후 동부여가 분립을 했으니 북부여의 기사 그리고 동부여에 관한 기사로 정리를 한다.
위 인용문에서 “~고도에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중략-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천제의 아들이라 불렀다.”라는 내용은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할 때를 묘사한 것이다. 북부여 시조인 해모수가 <후박달나라> 제 47대 임금인 <고열가>로부터 단군조선을 이어 임술년에 웅심산에서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따라서 본 기록은 바로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이 북부여를 건국할 때는 묘사한 <북부여 건국기>이다.
“그 뒤 얼마 후에 대신 아란불이 왕에게 고하기를 -중략- 천도하기를 청하였다.”라는 기사는 북부여 제4세 <고우루> 단군 갑오34(서기전 86)년에 스스로 동명왕이라 칭하고, 고우루 계유 13(서기전 108)년에 조본천에서 제위에 등극한 북부여 제 5세 임금인 <고두막한>이 북부여 제4세 단군인 고우루에게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오.”라고 하니 고우루 단군이 이를 걱정하여 병을 얻어 붕어하고 태자인 해부루가 등극한 뒤 재상인 아란불이 도읍을 옮겨 나라를 세울 것을 권유하는 말이다. 결국 북부여 제4대 임금인 고우루의 뒤를 이어 재위에 오른 해부루는 재위 원년 재상인 아란불의 청을 받아들여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해부루가 재상인 아란불의 청을 받아들여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해부루가 재상인 아란불의 청을 받아들여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겼다는 것은 명분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고우루 게유 13년(서기전 108년)에 졸본천에서 나라를 세우고 날로 융성해가는 고두막한의 위세와 압력에 의해 북부영서 나와 가섭원으로 가서 도읍을 정하고 동부여를 건국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이가 없어서 이름난 산천을 찾아다니며 아들 낳기를 기도하였다. 곤연 -중략- 그리고는 그를 데여와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라 부르고 태자로 삼았다.”라는 기록은 동부여 시조인 해부루가 도읍을 북부여에서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를 건국한 해가 을미(서기전 86)년이니 동부여 시조 해부루가 금와를 얻은 해는 이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환단고기의 기록으로는 동부여 시조 해부루가 금와를 얻은 해는 재위에 등극한 10년인 갑진(서기전 77)년이다. 이에 대하 한단고기의 기록을 인용해보기로 한다.
“갑진 10년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얻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그가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한단고기 계연수 엮음, 임승국 번역, 정신세계사 140쪽>
위 한단고기 인용문을 고려의 휴애거사 범장이 지은 가섭원 부여기, 시조 해부루가 갑진 10년조에 나오는 기사이다. 물론 신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지만 인용문을 보면 환단고기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우리는 위 인용문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시조 고추모와 동부여 임금들인 금와, 대소 사시의 그 세대를 구분할 수가 있다. 즉 위 인용문의 내용과 연대가 대폭 삭감된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년대를 기준으로 비교해봐도 고구려 시조 고추모는 동부여의 제2대 임금인 대소와는 같은 세대가 될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 건국에 관한 종합 부분에서 상세하기로 한다.
이상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인용한 동부여 분립시기를 살펴보았다. 단재 선생이 인용한 내용은 북부여 건국기사, 동부여 건국기사, 해부루가 금와를 얻는 과정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그 나열 순서가 역순으로 되어 있으며 그러다 보니 북부여 기사인지, 동부여에 관한 기사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단재 선생이 인용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북부여는 후박달나라 마지막 임금인 고열가 단군 57년인 임술년에 시조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건국을 하였다. 동부여는 북부여 제 4대 단구인 고우루 13년 게유년에 스스로를 동명이라 칭하여 졸본천에서 재위에 오른 고두막한이 세력이 날로 융성번영하고 또 그 고두막한의 압력에 밀려 을미년에 도읍을 가섭원으로 옮기고 나라를 세움으로써 생겨난 국가이다.
마지막으로 동부여 시조인 해부루가 동부여 제2대 임금이 된 금와를 얻은 해는 재위 10년인 갑진년이다. 이는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한 10년 후의 일이다.
지금까지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 기록한 북부여·동부여의 거국 그리고 동부여 시조인 해부루가 동부여 제2대 임금인 금와를 얻는 과정을 인용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고구려이 건국과정과 건국시기, 그리고 고구려 존속 기간 등을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북부여의 건국과정과 존속기간, 동부여의 건국과정과 존속기간 등을 정확하게 고증하고 논증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상세하지는 않지만 고구려 건국과정을 분석하면서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첨가) 진조선이란
후박달나라는 지금으로부터 4341년(B.C 2333)전 무진년에 건국하였다. 후박달나라는 건국을 한 후 지경을 삼분을 하다. 삼분한 각각의 땅에 <신한>, <말한>, <불한> 등 삼한을 두어 다스렸다. 제 44대 단군 구물 병진 원년(B.C 425)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라고 바꾸고 이전의 삼한을 삼조선으로 바꾸어 불렀다. 삼조선 가운데 하나인 진조선을 말한다.
2018년 1월 14일
서울구치소에서 이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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