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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1-28 07:5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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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촛불은 무엇을 위해 타올라야 하는가!

                                                                                                                                              끌쓴이 : 이백 미주동포 

누구는11월을 슬픈 계절이라 하였다. 호시절을 즐기던 붉고 푸른 잎새들은 마침내 미풍에도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되어 버린다. 무성한 잎새로 열백가지 가면을 만들어 쓰며 미태를 뽐내던 나무들도 더 이상 자기를 가리워 줄 한잎의 잎새조차 없어 앙상한 본태를 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하다면 결코 슬픈 계절이라고만 할 수 없다. 허울도 둔갑도 분칠도 통하지 않고 세상만물이 다 자기의 진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게 된다면11월이야말로 진실과 허위가 갈라지고, 천하의 지위가 뒤바뀌는 계절로 불리우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11월이 바로 그러하다.

20년간이나 화려한 가면을 쓴 채 신기루같은 인기를 유지해오던 박근혜가 드디어 온갖 허위와 거짓을 불사르는 거대한 촛불의 바다에 직면하여 천하의 조소와 멸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껏 허위와 기만으로 세상을 현혹시키고 막강한 권력으로 국민을 내리누르던 여왕이 더 이상 추한 몸을 가리워줄 한잎의 잎새조차 없는 알몸이 되여 순간에 진창 바닥에 굴러 떨어진 꼴은 실로 장관이다.

이 시각 박근혜에게 왕년의 화려한 여름가을이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촛불의 바다가 쉽사리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11월의 촛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서슬 푸른 권력을 밑뿌리채 뒤흔드는 촛불의 의미는 무엇인가. 70여년의 민중투쟁사상 처음으로 각이한 계급과 계층, 남녀노소 모두가 함께 밝힌 저 촛불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11월의 촛불을 분노와 울분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국민의 의지로 보는 시각도 틀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분석과 주장들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광범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것은 혁명론이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의 의미를 혁명과 직결시켜 이야기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은 물론 놀랍게도 대학가의 교수들과 국회 의원들, 지어 유력 대선 주자들까지도 서슴 없이 혁명을 외치고 있다. 진보와 중도를 넘어 보수 진영에서까지 혁명적 사태가 거론되고 혁명론이 대두하고 있다. 언론들은 100만 촛불의 불바다가 청와대를 포위하였던 11 12일을 시민혁명의 날, 11월을 혁명의 달로 칭하고 있다.

어둠을 불사르는 촛불의 바다속에서 연이어 떠오르는 각양각색 혁명의 표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시민혁명, 명예혁명, 사회혁명, 정치혁명, 국민혁명, 제도혁명, 의식혁명, 가치관혁명, 중고생혁명, 청소년혁명, 11월혁명 …

혁명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두려워하던 사회에서 온갖 혁명론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믿기 어려운 이 현실은 며칠전 여의도의 국회 청사안에서 울려나온 한국은 현재 혁명중이라는 주장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분명 비상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것을 김윤태 고려대 교수의 주장처럼 혁명의 시대로 명명한다고 하여 이의를 달 사람도 없을것 같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암흑의 밤천지를 밝히는 100만촛불의 거대한 불바다앞에서 혁명이라고밖에는 달리 부를수 없는 비상한 시대의 태동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은 누구도 모른다. 뜻밖에 찾아든 이 격변의 끝은 어디인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촛불의 바다가 더 펼쳐져야 하겠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예언해줄 사람도 없다.

보다 심각한 것은 무엇을 위한 혁명인지조차 명백치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들고 있는 촛불은 하나 같아도 그들의 생각은 하나가 아니다. 노동자가 말하는 혁명과 정치인이 말하는 혁명이 다르고 평범한 시민들이 갈망하는 혁명과 대선 주자가 생각하는 혁명이 같을 수 없으며 촛불의 바다안에서 울려나오는 혁명론과 촛불의 밖에서 주장하는 혁명론이 또한 같을 수 없다.

매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이 주장하는 혁명의 의미는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혁명이라는 두 글자는 분명 거대한 사회적 변혁과 진보를 의미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독재자, 기회주의자들에게 도용된 실례도 기록하고 있다. 잠간 소급해봐도 박정희가 혁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4.19의 열매를 짓밟았으며 오늘은 박근혜가 ‘5.16혁명을 운운하며 역사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 11월의 촛불이 몰아오는 대격변의 파도앞에서 누구나 혁명을 운운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절대로 같을 수 없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구는 박근혜의 처벌을 시민혁명으로 보는가 하면 누구는 내각제에로의 개헌을 제도혁명이라 주장하고 있다. 지어 혁명의 간판밑에 정적들을 복수하고 자파의 유리한 정치적 지형 확보를 노리는 자들도 있다.

역사와 현실은 혁명을 잉태한 시대가 도래한다고 하여 반드시 민중이 갈망하는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깨우쳐 주고 있다.

그렇다면11월의 촛불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타오르고 있단말인가.

단지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만을 터치기 위해서인가. 무당에게 놀아난 박근혜의 직무유기 책임만을 따져 묻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한 채 악귀들을 저주하고있는 세월호 영령들의 피타는 절규를 들어보라.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한많은 세상을 원통하게 하직한 백남기농민의 유족들에게 물어 보라. 거대한 상여를 메고 청와대 앞까지 행진해간 농민들과 수능시험 공부까지 미루며 촛불의 바다에 뛰여든 고등학교 학생들, 철부지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항거의 촛불을 든 부모들이 바라는 것이 다만 최순실의 투옥과 박근혜의 퇴진 뿐이겠는가.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지 두명의 악귀가 사라진 세상이 아니다. 어째서 촛불 광장에서 미완의 4.19’라는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계속 울려 나오고 있는가. 박근혜나 최순실이 사라진다고 해서 제2의 세월호 참사가 없고 제2의 백남기 농민이 없다고 담보할 수 없으며 제2의 박근혜, 최순실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구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1월의 촛불이 최순실과 박근혜에 대한 타매로 그치고 이내 꺼질 것을 바라는 자들은 하나로 뭉쳐지는 민중의 힘에 대한 공포를 애써 감추며 촛불의 본질을 오도하려 하고 있으나 민중은 결코 청맹과니가 아니다.

보라! 촛불은 작아도 누리를 비치고 있다. 촛불의 강렬한 빛살 앞에서 온갖 허위와 위선의 가면들이, 지지리 오랜 세월 한국 사회의 병폐를 감싸고 있던 두터운 허울의 장막들까지 벗겨져 내리고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만이 아니라 재벌과 검찰, 친박계와 새누리당을 비롯한 낡고 부패한 특권 족속들 모두가 차례차례 줄지어 보잘 것 없는 락엽의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산업화민주화’, ‘한강의 기적과 같은 온갖 사치스런 가면들을 뒤집어 쓰고 있던 한국이 드디어 세상에 다시 없을 가장 부끄럽고 처참하고 앙상한 알몸뚱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전세계의 경악과 비난, 조소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하나의 촛불은 십보앞도 밝힐 수 없지만 100만의 촛불은 세상을 밝히고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불러올 수 있다. 지난 촛불집회에서 우리의 삶을 혁명하고 우리의 제도를 혁명하고 우리의 의식을 혁명하고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압제를 혁명해야 한다.’고 외친 한신대학교 김용옥 교수의 연설이 수만 군중을 열광시켰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난 수십년동안 체념과 절망, 자포자기의 나락에 깊숙히 빠져 있던 수백만 민중의 의식이 촛불의 바다속에서 바야흐로 깨여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확언해야 한다.

11월의 촛불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타올라야 하는가.

그것은 민중의 새로운 삶을 위해 타올라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고 참된 정의가 구현된 새로운 사회,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민중이 진정한 주인으로 되여 자기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불러 더욱 힘차게 타올라야 한다.

이 시각에도 촛불의 바다에 공포와 앙심을 품고 바람 불면 다 꺼질 촛불이라고 뇌까리는 반동들은 있다. 하지만 11월의 촛불은 순간적인 충동의 불꽃이 아니라 지난 70여년동안 쌓여온 온갖 부정의에 대한 총체적인 분노의 대폭발이다. 바로 그것으로 하여 촛불은 박근혜나 최순실, 새누리당같은 악의 무리들을 끊임없이 배설해온 썩고 병든 사회제도 자체를 부정하고 타매하면서 낡고 부패한 모든 것을 깡그리 불태워버리는 요원의 불길로 더욱 기세차게, 더욱 무섭게 타번져 나가게 될 것이다.

정의보다 강한 힘이 없고 진리보다 더 높이 오를 자가 없다.

11월의 촛불은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정의의 불길, 진리의 불길이다.

이 글을 얼마전에 발표된 황규관 한국작가회의 이사의 시 우리가 혁명이 됩시다!’의 마지막 구절로 맺으려 한다.

지난10, 저들이 더럽혀놓은 지난 10

아니 그 이전의 수십년 수백년을 쓸어내고

노예로 산 시간을 영영 떼어내고

사랑과 자유가

정오의 태양처럼 가득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저들을, 지난 10년을

구태와 탐욕, 부정과 거짓을

깨끗이 몰아냅시다

깨끗해져서 다시 비바람이 올 때까지

깨끗해지다 못해 강물이 철철 흐를 때까지

우리가 밤하늘을 뒤덮은 성좌가 될 때까지

우리가 혁명이 됩시다!

이백 – 로스앤젤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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